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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희망을!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지금 어디 포기한 사람이 있어요?

‘희망’을 묻기 어려운 세상이다. 집, 일자리, 노후, 자녀교육……. 뭐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600년 만에 찾아온 황금돼지해는 밝았으되, 올해도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살림살이를 면치 못할 듯싶다. 이러니 자식들 앞에서 ‘미래’며 ‘희망’을 말하기가 영 궁색스럽다. 신이 난 것은 정치인들과 황금돼지 저금통 장사꾼들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의 이합과 집산이 한창이다. 그래, 텔레비전 밖 무지렁이들에게 ‘희망’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래도 희망은 있어요.”
나이 든 소녀 하나가 조용히 눈을 빛낸다. 수줍으나 단호한 음성이다. 늘씬한 키에 단정하고 검소한 매무새가 학 같다.
“억압을 받거나 차별을 받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는 데서 희망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어디 포기한 사람이 있어요? 자살자가 있긴 하지만 자살도 하나의 몸부림의 표현이잖아요? 포기하지 않는 한 보다 나은 세상은 올 거라고 생각해요.”
 

 

 

 

자살도 희망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그래, 섣달그믐의 어둠도 이겨낸 우린데……. 나는 꾸지람 듣는 초등학생처럼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주름진 커다란 손으로 그가 꽉 움켜쥐고 있는 ‘그것’이 혹여 나로 인해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박영숙. 74세.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는 이 땅의 모든 딸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여성기금인 한국여성재단의 문을 연 장본인이다. 국내 공익재단법인 1호. 박원순 변호사의 ‘아름다운재단’도 알고 보면 그 후발이다.
“1999년, 사회 원로와 124개 여성단체가 새천년의 과제를 논의한 결과, 딸들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서는 여성운동 단체들이 공히 겪고 있는 재정난을 타개할 재단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 사회의 모든 기부는 불우이웃 돕는 데 올인 돼 있었어요. 시민운동의 기금재단으로서는 우리가 처음이었지요. 원래 개척이라는 게 힘들잖아요. 당장 재단법인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느 부처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거예요. 전례가 없으니까. 그때는 여성가족부도 없을 때여서 행정자치부에서 안 해주려고 하는 것을 겨우 애써서 만들었죠. 그래서 우리 다음에 생긴 재단들은 우리 전철을 밟아서 다들 잘 됐어요.”
시민사회의 기금재단들이 만들어지고 기부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우리 사회 기부시장의 규모는 확실히 커졌다. 2005년 전경련 추산에 따르면, 국내 기부시장 규모는 연간 1조 5천억 원대.
“최근 국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요. 국내 기부시장의 규모가 커진 데는 그 영향도 있다고 봐야죠. 재단 초기만 해도 기부시장 규모가 1천억 원은 넘었어요. 그런데 그게 다 정치권으로 간 거죠. 돈을 쓰고도 욕을 먹으니 기업에서도 기부문화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요. 자기네들도 돈 낸 것만큼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기부문화라는 게 실은 공격받지 않을 만큼의 돈을 써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겠다는 거지 진정한 사회 공헌은 아니거든요. 결국 다 마케팅의 일환일 뿐이죠.”

 

 



기부문화에도 성차별 있다

여성재단은 출범 직후 1,000억 원이라는 기금조성 목표액을 정했다. 당시 시민운동 단체들의 옹색한 형편을 감안하면 입이 딱 벌어지는 액수였다. 그러나 기금의 이자로 딸들을 위한 공익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돼야 했다. 게다가 ‘세상의 반쪽’인 딸들의 몫을 찾는 일이 아닌가. 때론 박 이사장이 직접 나서기도 한다. 대기업과 기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여성에게 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여성재단의 모금활동을 가리켜 ‘구걸’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시각도 있다. 박 이사장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구걸이 아니에요. 여성의 몫을 당당히 요구하는 거죠. 국제적으로 볼 때도 시민사회운동에서 회비가 차지하는 것은 반도 안 돼요. 사실 참여연대가 70%를 회비로 한다는 건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일이에요. 정말 우리나라의 특이한 사정이거든요. 결국 기부금으로 충당이 돼야 하는데 여성을 위한 기부는 정말 힘들어요. 기부문화에서도 성차별을 받고 있다니까요. 기부시장이 넓어졌다지만, 여성재단의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어요. 말로는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다, 여성복지는 그 나라의 발전도를 측정하는 척도다라고 하지만, 아직 멀었죠.”
‘구걸’ 시비를 의식한 것일까. 최근 들어 여성재단의 활동이 한층 공세적으로 됐다. 오는 5월 집중모금 캠페인 기간의 목표액도 10억 원으로 잡았고, 여성복지 지원사업을 전국에 공모하여 전액을 지원할 예정이다.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100인 기부릴레이로 시작한다. 100인 기부릴레이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주축이 된 100명의 ‘이끔이’들이 기부를 한 후 하루 한 명씩 다음 기부자를 늘려가 한 달 후 총 3,100명의 기부자를 탄생시키는 여성재단만의 독특한 기부 축제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여성들을 지원하는 데 너무 인색했잖아요? 그러나 돌봄과 나눔의 특성을 지닌 여성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양성평등의 기부문화를 정착시켜 기부시장의 반을 여성이 써야 돼요. 삼성이 내놓은 8천억도 여성의 몫을 찾을 거예요. 지난번에 복권통합법 만들어졌을 때도 우리가 여성의 권리를 찾았어요. 국무총리 찾아가고 관련부처에 요구해서 연간 백 몇 십 억을 따냈거든요. 그걸 지금 여성가족부에서 받아다가 성폭력 방지를 위한 사업에 쓰죠.”


곱게 빗어 올린 반백의 머리칼, 단아한 입매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박 이사장은 ‘기부시장의 반은 여성 것’이라는 생각을 영국 사회에서 얻었다. 선진사회의 성숙한 기부문화를 보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는 우리 여성단체의 현주소를 떠올렸음직하다.
영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는 62세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1993년, 정당 활동을 막 끝낸 직후였다. 남편 안병무 박사의 독려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선택이었다. 칠순이 넘은 남편이 ‘일을 하려면 전문성을 갖고 해야지 열의만 가지고는 안 된다.’며 환갑 넘은 아내의 등을 떠민 것이다. 당시 안 박사는 툭하면 응급실에 실려 들어가는 심근경색증 환자였다.
“나는 떠날 용기도 못 냈고 원치도 않았어요. 시집 식구들이 볼 때 환갑 넘은 사람이 환자 남편 두고 공부하러 간다니 얼마나 한심하겠어. 그런데 환자복 입고 자동차 세워놓고 날 기어이 태워서 보냈으니까. 그런데, 그 덕을 지금까지 보잖아요. 생전 처음 제대로 공부한 거거든요. 고맙게 생각해요.” 

 

딸들에게 희망을!

그러나 박 이사장이 남편에게 진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된 일이다.
“안 박사하고 산 30년이 제 삶을 바꿔놓은 것만은 확실해요. 결혼 전까지 저는 이른바 기독교인으로서 사회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곤 하지만 돌아보면 극히 이기적인 것이었어요. 차 한 잔 얻어먹으면 두 잔으로 갚아버리고 도무지 빚진 의식이라고는 없었죠. 기독교인의 기본정신은 빚진 자의 생각으로 산다는 거거든요. 항상 갚아야 되는. 그런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마음으로 하는 운동을 알게 되었죠. 사람이 닮아간다고 할까요? 안 박사는 철저하게 남을 배려하는 분이에요. 돌아가실 때 운명 직전에 한 100여 명의 지인들이 찾아왔었어요. 모두가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더라구요. 안 박사가 자기만 사랑하고 위해 주는 줄 알았는데 와 보니까 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죠. 나도 백분의 일이었다고.”
‘안병무’라는 한국 신학계의 거목과 결혼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수십 명씩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이 얼마나 고단했을까는 이사할 때 ‘안 박사 책이 한 트럭, 부엌살림이 한 트럭’이라는 말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남녀차별이 크지 않았던 고향 평양의 분위기와 가풍, ‘백분의 일’로 만족하며 살았던 결혼 생활 덕분일까. 박영숙 이사장에게서는 ‘안사람의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과거 안 박사와의 재밌는 일화도 많건만 자꾸 여성운동가로서 그의 현재 활동에 주목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박 이사장의 걸음걸이는 74세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쾌활하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영원한 현역’이다. 뒷방에 물러나 회고록이나 쓰며 원로 행세 하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나이와 경력으로 보면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 여성운동을 두루 거친 원로 중의 원로지만, 운동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내고 일을 만들어가는 솜씨는 젊은 후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여성운동의 정치화, 권력화를 놓고 최근 일기 시작한 ‘위기론’에 대한 생각도 분명하다.
 

 


 

“새겨들을 점이 있죠. 정계 진출을 개인의 출세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남성문화를 강화시키는 대열에 서는 건 문제라고 봐요. 그런데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여성들이 가진 개혁성이 정치풍토를 바꿔냈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예요. 또 지금 우리는 여성운동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 시민사회운동의 위기를 맞고 있어요. 노무현 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진보적 시민사회와 정부가 동반 위상추락이 된 상황이잖아요? 정말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죠. 이제 그 반동으로 풀뿌리운동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은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정치도 시민사회운동도 생활운동이 돼야 하거든요.”
이제 내년이면 그의 임기도 끝이 난다. 그러나 그의 사전에 은퇴란 없다. 그의 보살핌을 기다리는 또 다른 딸들이 있기 때문이다. 4,000개나 되는 국내 여성운동단체에서 묵묵히 일하는 여성활동가들의 처지가 그는 마냥 애달프다.

 



“여성운동의 진짜 위기는 지속가능하지 못한 여건이라는 거예요. 사실 여성운동도 하나의 직업 분야거든요. 지금 각 기업에서는 전문 지식근로자들을 위한 평생교육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 우리 활동가들에게는 지속적인 리더십트레이닝 기회가 없어요. 활동비도 고작 5, 60만 원이 끝이잖아요. 젊을 땐 열정으로 한다지만 한 십년 지나면 생활인이 되는데 이건 생활이 안 되잖아요. 여성의 빈곤화, 차별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사실 우리 여성단체 실무자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없어요.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제 생애 마지막 과제예요.”
딸들에게 희망을 줄 새로운 과제를 놓고 그는 자꾸만 ‘마지막’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수줍게 웃는다. 그러나 나는 안다. ‘마지막’이라는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로 저서로는 『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 『김진수』, 『최종길』, 『한일회담반대운동』 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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