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으로 바로가기

d-letter

슬픈 현대사를 담고 있는 타이페이 2·28기념관

슬픈 현대사를 담고 있는


타이페이 2·28기념관


박강배 (사)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연구실장 

 

  타이완 현대사의 슬픔은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시작된다. 청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뒤 타이완은 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이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옮겨온 국민당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일제 50년 식민통치 동안 타이완은 작은 일본으로 살았고, 해방 직후부터 국민당 통치기간 50년은 북벌통일론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타이완의 독립이냐 통일이냐’,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대륙의 중국 정부와 타이완 정부, 그리고 타이완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얻어진 ‘차이나 타이페이’라는 국제적 부호에는 타이완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다.

  타이완의 슬픈 현대사
  이런게 역사일까!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1947년 2월 타이완에는 후에 백색공포로 이어진 국민당 정권의 광풍이 몰아닥친다. 이른바 2·28사건이다. 1992년 2월 20일 타이완 행정원(타이완 최고의 행정기관) ‘연구 2·28사건 조사소조’는 타이완 역사상 최대의 비극「2·28사건」조사보고를 발표하였다.
  조사 보고서는 “광복직후 국운에 대한 기대가 높은 상황에서 정치적으로는 국민당 정부의 폭압에 대한 불만, 타이완 성 출신의 정치참여 기회 불공평, 경제적으로는 타이완에 대한 무리한 통제, 경기침체로 인한 불경기, 높은 물가와 실업, 기타 사회적인 문제 등이 얽혀 발생한 사건으로 단일한 원인으로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발생 배경을 가졌다”고 2·28사건의 성격을 정의하고, 사건의 기간을 ”1947년 2월 27일부터 5월 16일“까지로 하고 있다.
  2·28사건은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에서 밀수를 단속하던 전매국 직원이 상인을 폭행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발생하였다. 그동안 쌓여 있던 민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타이완 전역에서 관과 민의 거대한 충돌로 확대되었고 3월 8일에는 대륙의 주둔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가 타이완에 상륙, 진압에 나섬으로써 대량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2·28사건에 이어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반공항소(反共抗蘇)사상의 확립, 타이완 사회의 사상과 문화, 교육을 통치궤도 안에 넣으려는 국민당 정부의 국가폭력은 장기간의 군사계엄령(1949년 5월 20일~1987년 7월 14일) 상태에서 자행되는데 사상과 행동의 엄밀한 통제와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였다. 이를 두고 계엄시기 백색공포라고 부른다.

 38년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군사계엄 기간 동안 민중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고, 행방불명되었으며, 수난을 당하였는지 그 누구도 모른다. 국민당 정부는 반정부적 성향을 가진 인사와 군인, 공무원 그리고 무고한 민중들을 간첩과 공비라는 누명을 씌워 살해하고 투옥하였다.

  이 기간 동안 타이완 사람들은 정치, 집회, 결사, 언론, 사상의 자유는커녕 연좌제에 묶이고 해외 출국의 자유도 없이 일제 식민에 버금가는 공포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했다.

 장개석 집안의 몰락과 함께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으로 1987년 계엄 해제와 여러 억압 조례들이 폐지되었다. 1992년「2·28사건」조사보고에 이어 1995년 4월 7일「2·28사건처리및보상조례」를 공포하고,「재단법인 2·28사건기념기금회」를 설치하여 피해자들에게 보상하였다. 1995년에는 2·28기념비를 준공하고 리덩훼이 당시 총통은 국가원수로서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였으며, 1998년 6월 17일에는「계엄시기 부당한 반란 및 간첩심판안건 보상 조례」를 공포하고 수난자들에게 보상하였다. 그러나 해결과정을 보면 정부의 공식 사과, 국가공휴일 제정(2월 28일), 교과서 수록, 수난자 특별사면, 명예회복과 보상, 기념사업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동반하지 않아 진정한 과거청산이라 볼수 없을뿐더러 지난 반세기 동안 쌓인 타이완 민중들의 슬픔을 달래기에도 턱없이 모자라 보인다. 타이완의 인권평화 관련 시설은 20여 곳에 세워진 2·28기념비와 국민당 정부 초기 학살 터로 이용된 마장정 공원, 타이페이 2·28평화공원에 있는 타이페이 2·28기념관 그리고 타이완 남쪽에 있는 섬 녹도의 옛 정치범 수용소 앞에 있는 인권기념공원 등이 있다. 기념시설의 대부분이 기념비이기 때문에 타이페이 2·28기념관과 녹도의 인권기념공원 만을 소개하려고 한다.

 ​
  

 




방송국을 개축한 2·28기념관


  타이페이 도심 한가운데 있는 2·28평화공원은 일제에 의해 세워져 1996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공원 중앙에 위치한 2·28기념비는 다소 높게 느껴지는 다각형 철 구조물이다. 기념비는 끊임없이 흩어지고 합쳐지기를 반복하여 끝내는 함께 흘러가는 ‘물’을 주제로 ‘화합’이라는 설계정신을 담고 있다. 기념비 하단에 흐르는 물은 주변의 울창한 나무숲과 조화를 이뤄 기념비가 마치 처음부터 공원에 있던 하나의 조형물처럼 느껴진다.​
기념비를 거치면 공원 한켠에 자리 잡은 소박하고 아담한 황갈색 2층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은 타이페이 라디오 방송국으로 1930년 일본인 구리야마순이치가 설계한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이름만 바꾸어 방송국으로 사용하다가 1973년 방송국 이전 후에는 타이페이 시가 관리하였다. 타이페이 시 정부의 2·28기념관 설립계획에 따라 개축공사를 거쳐, 1997년 2월 28일 지금의 타이페이 2·28기념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2·28사건이 일어난 지 꼭 50년이 지난 후였다.

  설계자 구리야마는 1910년 동경제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일제의 식민지 건설계획에 의해 타이완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타이페이 방송국과 우체국 등을 설계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해충에 의한 목재의 부패방지나 철과 진흙의 결합, 여름철 실내습도 조절기능 등을 설계에 적용하였고 거적의 보호 방법에 대해서도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일본인 설계사들이 타이완에서 장엄성과 엄숙성을 강조한 건축을 추구하였다면 구리야마는 이를 탈피한 낭만적 건축가로 분류되는데, 타이페이 방송국은 그의 전문성과 낭만적 풍격이 한껏 발휘된 건축이다. 

타이완의 주요도시에는 붉은 색 벽돌과 곧게 솟은 기둥, 원형 돔의 지붕으로 대표되는 일제 식민지 건축물이 많이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붉은 벽돌 건축과 구미의 고전 건축, 약식 고딕풍 건축, 로마풍을 모방한 건축이 그것들이다. 이어 1930년대부터는 이집트, 인도, 마야, 인디언의 문화를 채용한 이국풍의 건축이 등장하는데 구리야마가 설계한 타이페이 방송국이 시초이다. 타이페이 방송국은 복도의 아치형 외벽과 스페인 풍의 베란다. 나지막한 풍채로 일제 식민지 건축 중 가장 아시아적이며 매우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1930년대 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온·습도 조절기와 냉방기를 갖추었다. 기념관 정문의 지붕이 제국주의 관모(冠帽) 모양을 하고 있는데 아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있던 시기여서 일제의 식민지 건설이라는 정책이 건축설계에도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구의 조화가 어우러진 개축

  타이페이 방송국은 일제 전쟁체제 하에서 총독부의 방침을 전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2·28사건 당시에는 민중들이 방송국을 점령하여 국민당 정권의 불합리한 통치에 성난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으나 사건 후에는 국민당 정권의 충실한 명령을 하달하는 발신소였다.

  2·28기념관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던 타이페이 시 정부는 2·28사건과 이러한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타이페이 방송국을 기념관으로 선택했다. 1996년에 피해자, 역사학자, 공간학자, 박물관학자 등으로 구성된 ‘2·28기념관 건립위원회’는 기념성, 교육성, 참여성의 3원칙 아래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였다. 개축은 이준인(李俊仁), 왕림보(王立甫) 건축사무소와 타이완 연예설계공사가 담당하여 원래의 황갈색 외형과 건축의 원형을 유지한 채 철강과 유리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여 개조하였는데 신구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개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시설이라는 가능성에 강조를 두어 현대화하였음은 물론 주변의 일제시대 건물인 타이완 국립박물관 및 타이완대학 병원과 조화의 측면에서도 기념관 개조는 아주 성공적이다.  

전시설계는 오삼련(吳三連) 타이완 사료 기금회가 담당하였고, 운영은 민간위탁방식으로 개관부터 2000년 6월까지는 타이완 평화 기금회가, 현재는 재단법인 타이완구역 발전연구원이 맡고 있다. 기념관은 전시관 운영 외에도 음악회, 미술 전시회, 학술 심포지엄과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1층과 2층으로 된 총 건평 820평의 전시장은 2·28사건의 배경과 전개, 이후 투쟁과정을 중심으로 간략한 타이완 역사와 일제시대 및 해방 이후 상황, 그리고 이 건물이 방송국이었음을 알 수 있게 꾸며 놓았다. 무엇보다도 50여 년이 지난 후에 시작된 기념사업임에도 1만 3천여 건의 충실한 자료수집과 현대적 전시기법 및 과학적 보관기법의 사용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는 기념관을 설립할 때 기념관의 필요성 공감, 전시 시나리오 구성, 건물 개축, 경험 있는 단체에게 위탁 등 전 과정을 총체적으로 구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를 소통시키는 창

  이 기념관의 멋은 ‘창(窓)이다. 창은 ’관람자와 역사‘(혹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괴된 개인사) 그리고 ’한없이 고요하여 멈춰 있는 듯 적막한 공원내의 기념관과 현대화 물결로 역동하는 타이페이 시‘를 소통케 한다. 기념관 로비에 들어서면서부터 관람자는 이미 창을 통하여 뒷면의 정원과 소통하고, 전시실 중간마다 설치되어 있는 창으로 또 다른 현실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소통의 절정은 전시의 마지막 전시인 영상물을 보고 난 후 뒤 돌아서서 한없이 사색하는 관람자를 붙들어 ’바로 지금‘을 글로 쓰게 만드는 유언실(流言室)의 창문이다.
  요동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기념관 맨 끝에 위치한 화랑과 서점으로 갈 수 있는데, 사무치는 역사에 대한 온갖 회한을 몇 권의 관련 서적을 통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제는 더 이상 화랑과 서점을 볼 수 없다. 기념관은 개관 5년 만에 갈수록 줄어드는 관람자 수와 운영적자를 못 이겨 재작년 12월 화랑과 서점을 철거하였다. 아울러 무슨 영문인지 전시물이 많이 낡았으나 전면보수를 하지 않고 있는데, 현 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등 국가인권정책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연관되어 영 개운치 않다. 이렇듯 2·28기념관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계획에 의해 방송국으로 세워져 2·28과 백색공포라는 아픔을 거치고 이를 역사의 경험으로 삼고자 기념관으로 만들어진 타이완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옛 정치범 수용소 앞의 인권기념비
  물을 소재로 하는 기념물은 녹도의 인권기념공원 내 ‘인권기념비’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녹도는 타이완 본 섬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화소도(火燒島)라는 영화로 더 잘 알려진 녹도는 백색공포 시대에 악명 높은 정치범 감옥(1951년~1987년)이 있던 곳이다. 녹도에 있는 옛 감옥 중 일부는 범죄인들의 교도소 출소 후 사회적응을 돕는 직업교육 훈련소로 쓰이고, 나머지는 천쉐이삐옌 현 정부의 국가인권정책에 따라 인권공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옛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다. 현재 녹도 인권기념공원에는 시설물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감옥 바로 앞은 망망대해 태평양인데 그 바닷가에 당시를 기억나게 하는 기념비가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은 규모이지만 이 조형물의 위치와 설계가 아주 돋보인다. 조형물의 벽에는 수형 생활을 했던 정치범들의 명단과 다음과 같은 글귀가 이들의 심정을 말해 준다.

“감옥에서 태평양의 파도소리가 들리면 비로소 아직 살아 있구나! 라고 느끼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가 언제쯤일까? 하고 상상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고.

 

  설계자는 이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하여 감옥에서 바다가 잘 보이도록 조형물을 지하에 건축하였다. 수형자들의 기나긴 바램을 꺽지 않고 바다를 가시권에 두기위해 조형물을 땅을 파서 시설한 것이다. 이 조형물 역시 주제는 물인데 감옥 쪽에서 흐르는 물을 조형물이 일시적으로 가두어 수위가 높아져 가득 차면 스스로 바다로 흐르게 함으로써 살아 돌아가고자 하는 수형자들의 간절한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이제 타이완에는 더 이상 양심수로 갇혀 있는 사람은 없다.

  학살터의 마장정 공원
  계엄시기 수난자들이 끌려가 총살당하였던 마장정에는 묘(墓)를 상징한 간단한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마장정 공원’은 타이페이 시내 강가에 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시대에 이곳은 경마장이었다. 2001년에는 2·28기념물을 방문자로서 보았고 지난해에는 우연히 마장정 공원 부근에 살게 되어 틈이 나면 여러 기념시설물에 들르곤 하였다. 수 개월간 지켜본 이곳 학살 기념터는 2월 28일 추모식을 위하여 1년에 딱 한번 사람들이 찾는 그런 곳으로 변해 있었다.
  타이완의 2·28 관련 기관에는 정부 파견 공무원과 피해자 단체가 공동으로 구성한 ‘재단법인 2·28사건기념기금회’가 있고, 타이페이 시 정부 문화국 관리를 받는 ‘타이페이 2·28기념관’, 그리고 지역별 피해자 단체가 있다. 이들에게 마장정 공원의 관리 부실에 대해 무엇이 문제인지를 여러 차례 물었으나 시원스런 답변은 듣지 못했다.
  남경 대학살 기념관과 타이완의 기념시설을 볼 때 작고 아담하고 소박하며 주변과 조화를 잘 이뤄야 오히려 관람자들이 지나간 역사가 아닌 현실로서 기억하여 기념하기에 용이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점에서 남경과 타이완의 기념시설물은 살아 남아 찾아간 사람들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현실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박강배
사진 황석선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