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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반성케 하고 힘을 주는_ 남경대학살기념관

되돌아 반성케 하고 힘을 주는


남경대학살기념관


박강배 (재)5·18기념재단 사업부장

 

  1946년 5월, 도교, 극동국제군사법정,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재판소에 증인으로 출석한 미국인 존 그레스피 머기 목사가 일본군들이 중국 평민들을 대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증언하고 있다. 이 재판은 적어도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음을 밝히었고 남경학살 직접 책임자 마츠이 세네키등 전범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남경대학살 사건은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6주 동안 일본군들이 남경에서 중국인을 비열하고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학살당한 숫자는 약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집단총살, 일본도(刀)로 목베기,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 불태워 죽이기, 집단 생매장, 강간 후 살해 등 일본군의 ‘살인경기’는 끝이 없었다. 학살과 함께 방화 등으로 남경시의 3분의1이 파괴되었고 책과 문화재도 약탈당하여 2차 대전 3대학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던지 남경시를 휘감아 도는 “양자강이 학살기간 동안 붉게 흘렀다”고 생존자들은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남경대학살기념관(침화일군남경대학살우난동포기념관)은 남경시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나누어 개관하였다. 1차는 1985년 8월 15일, 2차는 남경학살 60주년을 맞은 1997년 12월 11일에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념관은 회안주은래기념관, 하남박물관, 진해구해방역사기념관 등을 설계한 남경의 동남대학 제강교수의 작품이다.
  기념관은 남경시 서쪽 외곽의 학살 터에 자리잡고 있어 역사성과 장소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두 개의 전시관과 두 곳의 유골 전시관, 파괴된 도심과 살해된 죽음을 의미하는 부조물, 금릉겁난, 2002년 학살 65주년 기념으로 생존해 있는 수난자 222명의 족적을 탁본해 만든 부조물, 그리고 당시 상황을 부조한 벽, 기념물이 아닌 듯 느껴지나 실제로는 기념관의 주제인 삶과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풀밭과 자갈밭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하기 위하여 국치와 민족의 피와 눈물의 재난을 어떻게 표혈할 수 있을까?
  설계자가 후에 말하였듯 이곳 남경대학살기념관과 기념물은 사회, 국가, 민족감정의 결정체이다. 그래서 일까 설계자는 기념관을 설계함에 있어 수난자의 고통, 살아남은 자의 한, 관람자에게 전해질 감염력을 건축물, 장소, 벽, 나무, 언덕, 부조물, 주변과의 분위기 고려로 표현했고, 기념관의 주제를 삶과 죽음, 고통과 한으로 설정하였다.

 

사회, 국가, 민족감정의 결정체
  기념관을 관람하다 보면 설계자가 관람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느낌은 비단 남경대학살기념관이 특정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만은 아닐 것이다. 어디로 소통되는 계단일까? 어디서 본 듯한데 자갈의 의미가 무엇일까? 왜 벽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을까? 어째서 유골을 수습하지 않고 전시했을까? 이러한 관람자의 의문은 곧 설계자가 설계 시 채용한 겁난, 비분, 억압이라는 ‘깊은 언어’에 화답하는 것이며, 재난의 역사는 영원히 소멸할 수도 없고 소멸해서도 안 된다는 설계자의 “기억하여 기념하기”에 동의하는 것이다. 10년 이상의 차이를 두고 1차에는 주 전시관, 계단, 자갈밭과 풀밭, 부조벽, 유골 전시관, 그리고 2차에는 통곡의 벽, 부조물 금릉겁난으로 나누어 시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념관은 너무도 조화롭다.
  남경대학살기념관에서는 우리가 기존에 보아왔던 기념관의 배치를 생각하면 입구에서부터 영락없는 낭패이다. 정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엄숙하기 그지없고 중앙에 우뚝 솟은 추모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뚜렷하여 한없이 위용을 품는 우리네 기념시설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무릇 기념관이란 웅장하고 규모 있고 네모 반듯해서 권위가 하늘을 찔러야 기념되리라는 우리의 관념은 완전히 무너진다. 도심의 길거리와 맞닿아 전혀 차별하여 구분하지 않은 입구, 주변의 주택과 자연스런 어울림의 높이, 네 방향 어디로든 소통되는 울타리, 원래 구릉이라는 지형을 그대로 살리어 높고 낮음을 맞춰 시설한 기념물들이 오히려 관람자를 숙연케 한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은 부끄러움이 한치라도 있는 자는 감히 근접을 못하도록 벽을 치는 성스러운 기념물이 아니라 수난에 살아남아 고통스럽고, 삶에 지쳐 죄지은 세인에게 되돌아 반성케 하고 힘을 주는 그런 곳이다.

 

우리네 기념시설과는 달라
  기념관 정문에 들어서면 13미터 높이의 ‘1937. 12. 13~1938. 1’이라 새겨진 표지를 만날 수 있다. 숫자를 유념하며 저만치 300,000이라 각인된 벽을 향하여 걷는 동안 관람자는 이미 학살의 기간과 희생의 정도를 체득케 된다. 그래서 설계자가 의도한 오래된 역사의 현장이 아닌 바로 지금도 계속되는 듯한 ‘감염력’에 빨려 들어간다.
  선명한 숫자에서 받은 여러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재난 중에 부서지고 남은 것을 의미한다는 부조물 금릉겁난(금릉은 남경의 옛 이름)에 이른다. 상처 받음 남경의 상징 중산문과 거기에 남은 기관총 사격 흔적, 도살용 칼에 잘린 머리, 생매장 당할 때 묶여져 발버둥 치는 손, 그리고 파괴된 남경의 도심 벽, 이 각각의 부조물을 마치 하나처럼 형상화해 놓은 조형물 금릉겁난을 뒤로 하면 느닷없는 계단이다.
  한번은 오르고 다른 한번은 내려오는 계단이다. 설계자의 의도를 다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관람자는 계단을 오르면서 무언가 전환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오르는 계단 벽에 다시 한번 새겨진 300,000을 기억하고 언덕의 정상에 서면 한없는 자갈밭이다.

  

 

무엇일까? 어디서 보았을까? 왜 무수히 많은 자갈들이 뒤엉켜 있는 것일까? 구릉 위에서서 마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백 평 자갈밭 끝자락에 살아있는 듯 죽어 있고, 죽어 있는 듯 살아있는 고목(枯木) 두 세 그루와 강렬한 인상의 모친상이 보인다. 그리고 모친상 너머에는 죽음을 모시는 관 모양의 유골 전시관이 있다. 이 기념관에서 고개를 넘는 것은 현실에서 과거로 즉 66년 전 학살의 현장으로 가는 것이다. 고개를 넘어 과거로 가면 양자강 가에 쌓이고 쌓였다던 주검의 유골을 표현한 자갈밭이고 민족의 피 흘림을 보고 그토록 슬피 울며 흘렀다는 새파란 강물의 초지이다.
  그래서 자갈밭을 둘러 싸고있는 새파란 풀과 그 안의 자갈은 강렬하게 대비되어 삶과 죽음의 의미로 다가온다.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부조해 놓은 벽은 기념관의 남서쪽을 둘러싸고 있다. 이 부조벽은 도심과 경계지어 놓은 외벽에 의해 또 감싸여 있으나 결코 도심과 기념관을 분리하고 있지 않다. 정호기 씨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기념사업의 망각화와 박제화 위험만큼이나 또 다른 의미로 관람자들에게 과거를 제한하여 기억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기념관이 지어진 장소만을 한정하여 기억하려는 관람자들의 기념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맞서 설계자는 벽을 낮게 하고 높낮이를 일정치 않게 하여 도심 전체의 학살과 이곳을 맞닿게 함으로써 남경시내 전체가 학살 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50여 미터에 이르는 벽의 끝자락 통곡의 벽에서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면 지붕만 보이던 유골 전시관에 들어 설 수 있다. 도무지 어떻게 얽혀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게 뒤엉켜 있는 유골을 발굴 당시 그대로 땅속에 전시한 유골 전시관은 그래서 반 지하이다. 보통의 전시물과는 달리 유골을 관람자가 허리를 굽혀야 보이도록 꼭 낮게 시설할 필요가 있었는가를 물었더니 안내원은 직접 무릎을 꿇고 동작을 취해 보인다. “적지 않은 일본인 참관자들이 여기에 올 때에 잇달아 무릎을 꿇고, 참회와 애도를 표시할 것이다” 이것이 설계자의 설계정신이란다. 그러나 충격적인 전시 방법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헤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에서 이미 보았듯이 전시실에서 완충 공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외부로 나오게 되어 있어, 관람자가 받은 충격이 너무 빨리 현실에 노출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현장성을 충분히 가진 기념관에서는 어둠과 밝음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관람자를 쉽게 몰입시키고 그 여운을 길게 남기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대학살아동기념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아이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촛불 형식의 가느다란 불빛, 관람자를 몰입케 하는 어두움의 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나면 관람자는 150만 어린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쉽게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게 된다.
  유골 전시관을 지나 주 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유리벽으로 에워 쌓인 유골 발굴현장을 볼 수 있다. 이곳 만인항은 1차 기념관 건설 과정 중에 발견하였으나, 1998년에 본격적으로 발굴한 곳이다. 208구의 유골이 죽음 당시 모습 그대로 수습되지 않은 채 전시되어 있다. 남경대학살사건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에 맞서 발굴현장을 전시관으로 만들었다는 안내자의 설명은 참으로 침통하다.

학살현장을 전시관으로
  만인항을 거치면 맨 위쪽에는 행사와 전시를 할 수 있으며 서점을 갖춰 새로 개관한 전시장이 있다. 그러나 기존의 기념시설물과 조화를 무시한 위치와 외관으로 당초 설계자가 전체를 염두에 두고 크고 작은 기념물을 배치한 총체적 설계와는 거리가 있다. 아울러 관람자를 낯설게 하는 것은 주 전시관 입구에 나열된 일본인들의 추모비와 그들이 심은 추모나무이다. 가해자에게 반성을 받고 있고, 받아 마땅하다는 강박증을 나타내는 기념관측의 이러한 운영은 주 전시관 내에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사진을 크게 내걺으로써 극에 달하는데 기왕의 시설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관람자는 심한 부조화를 느낀다.

 

설계정신과 다른 전시와 운영
  오랫동안 살아있는 박물관을 위해서는 설계와 전시 시나리오, 운영의 종합적 구성이 필요하다는 오츠카 가즈요시 교수의 역설에 비추어 보면 주 전시관의 전시와 운영은 설계자의 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 전시관 입구에 내걸린 커다란 전시물부터 심하게 퇴색되고 낡았는데 이는 입구가 서쪽을 향하고 있어 오후에는 전시물이 자연광에 직접 노출되기 때문이다. 전시물은 사건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진상규명 과정 등을 교육적 효과를 고려하여 배치하고 있다. 사진자료가 주를 이루나 영상물과 총, 칼, 의복 등 사건 당시의 1차 자료도 함께 볼 수 있다.
  동굴형 입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애초 설계자는 전시관 실내를 전체적으로 어둡게 구상하여 관람객의 집중을 의도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있다. 불필요하게 창문을 개방해 둠으로써 투시된 햇빛으로 인해 조도조절이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주의를 심하게 분산 당하고 강한 햇빛이 전시물에 직접 닿아 반사광마저 생기는 상황이다. 전시관은 원래부터 공기조절 장치를 갖추고 있지 못한데 이는 오래된 건물이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다른 곳 보다 습기가 많은 남경에서 전시장의 창문을 열어두는 것은 전시물에게는 생명이랄 수 있는 상대습도와 온도조절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아울러 거의 모든 전시물에서 국부적인 손상이 발견되는데 이는 개별 전시물에 직접조명을 하면서도 시간조절 스위치나 방산기를 부착하지 않아 전시물이 조명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적절치 못한 습도와 온도조절 그리고 잘못된 빛의 통제는 전시관이 전시물에 대해 예방차원의 보존(Preventive Conservation)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록물의 보존과 전시는 실과 바늘의 관계인데 중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당인학이 왜 이 기념관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설계와 전시 및 운영이 함께 호흡하지 못하여 아쉬운 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단체 관람객과 개인 관람객을 동시에 입장시키는가 하면, 모든 영상시설은 멈춰 서 있고, 바닥시설을 잘못하여 관람객들의 발자국 소리가 너무 커 전시물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아울러 이 기념관과는 무관해 보이는 당의 영도성을 주장하는 전시물을 비중 있게 배치하고, 전시장 마지막 부분의 한쪽 면에는 아예 전시관이 국가정부와 성정부 등 높은 기관으로부터 무슨 지정을 받았다는 과시성 팻말을 수도없이 내걸어 두었다. 이러한 전시의 기본구상 마저 의심케 하는 전시관 운영은 기념관에 들어서면서 받은 감동과 흥분을 완전히 삭감시킨다. 그래서 돌아나오는 길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연일 계속되는 교육성 단체 관람과 잘못된 운영으로 남경대학살기념관은 조금 지쳐 보였다.

 

지쳐 보이는 기념관

  이제 현실이다. 관람을 끝내고 주 전시관을 나서면 처음 오르던 고갯길이다. 관람자는 이제야 현실에서 과거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이어지는 설계자의 충실한 안내를 깨닫게 된다. 설계자는 학살현장이 구릉임에 착안하여 이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주 전시관을 땅 밑에 배치한 것이다. 결국 관람자가 처음 섰던 고갯길과 거기서 보았던 자갈밭은 주 전시관의 지붕인 것이다. 이로써 정문, 금릉겁난, 계단, 언덕, 자갈밭과 초지, 부조벽, 통곡의 벽, 유골전시관, 주 전시관, 다시 고개로 이어지는 긴 여정은 마무리된다.
  남경대학살기념관은 어느 정도의 전시와 운영의 흠 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저 없이 손에 꼽는 좋은 박물관이다.

  남경에 또 겨울이 찾아왔다. 올해로 예순 여섯 번째이다. 이 6주간의 겨울은 또 얼마나 차가울지,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기념관 설계를 위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발굴되어 쌓인 유골더미에 눈을 찔려 생겼다던 설계자 제강 교수의 통증이 이제 멈췄으면 좋겠다.


 

박강배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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