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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의 논리와 민의 논리_일본의 전쟁기념관과 평화기념관

군의 논리와 민의 논리


일본의 전쟁기념관과 평화기념관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 교수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념관이 있다. 따라서 그 기념관들을 모두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여러 곳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도 많지 않다. 필자도 단지 몇 군데 밖에 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 소개는 매우 제한적인 부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념관들이 과연 어떤 목적에서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동시에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초점은 각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 내의 어떤 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역사적 기억의 방향을 이끌고 가고 하는가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일본의 기념관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전쟁기념관과 평화기념관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서 전쟁 경험의 내용을 어떤 방향으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갈라진다. 물론 두 기념관의 전시 내용은 모두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청일전쟁 이후 15년 전쟁이라 부르는 만주사변부터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1945년까지의 전쟁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전시의 방향과 내용은 크게 다르다.
  전쟁기념관은 전쟁에 참전해 죽어간 일본군을 추모하면서, 일본군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의 부활을 노래한다. 반면 평화기념관은 전쟁기념관과는 달리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면서, 전쟁 속에서 겪은 민중의 고통과 아픔을 널리 되새기게 하는 공간으로서 만들어 졌다. 지금 일본 곳곳에는 군의 논리에 따라 세워진 전쟁기념관과 민의 논리에 따라 세워진, 그래서 전쟁의 참극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고 평화를 외치는 평화기념관이 서로 다른 논리를 지닌 채 세워져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쟁의 기억을 바탕으로 전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떠한 교훈을 얻어, 어떻게 다음 세대로 계승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군사의 관점·군의 논리」(군사·군비에 의한 안전 보장)와「민중의 관점·民의 논리」(비군사적인 평화·민중의 안전 보장)가 지속적으로 대립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기념관으로서의 호국신사

  일본의 전쟁기념관은 흔히 볼 수 있는 박물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국가신도의 기관인 호국신사(護國神社)라는 형태로 존재한다.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호국신사들은 전쟁에 참전해 죽어간 각 지역 출신 일본군을 추모하면서, 동시에 경내에 전시관을 운영한다든가. 그 지역 출신 일본군 장군의 사당이나 동상을 세워 놓고 참배하게 한다든지 하는 형태를 띤다. 호국신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당에 일장기가 휘날리는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호국신사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왜 신사에 일장기를 높이 매달았나, 신사가 천황을 모시는 국가종교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일본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의 전쟁기념관은 전쟁 중에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터에 나아가 싸운 이들을 위령하는 장소인 야스쿠니신사일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죽은 자의 넋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장소이지만, 유골을 모신 것이 아니라 레이지보라고 부르는 각종 전쟁에서 숨진 사람 2백46만여 명의 명부가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경내에는 전쟁 때 사용하던 대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가 널려있고, 군견(軍犬) 위령탑과 가미카제 돌격대원의 동상도 있다. 그리고 유슈칸이라는 전쟁박물관을 갖추고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 곳에는 진주만 공격의 성공을 알린 암호 전보와 포탄 속에 자살 특공대원이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발사됐던 인간어뢰 ‘가이텐’도 전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국군주의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일본 보수 세력의 근거지로서, 국군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이들의 메카이기도 하다.
  그밖에 현(懸)단위로 설립된 조그만 전쟁기념관들이 많이 있는데, 한 군데 예를 들면 가고시마현 지란조에 있는 지란특공평화회관이 그런 곳이다. 그 곳은 1945년 오키나와전투에서 죽어간 어린 특공대원들을 위령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관련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그들을 국가, 민족을 위해 산화한 영웅으로 미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평화기념관

  한편 일본 내에는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민중의 고통을 되새기면서 다시는 전쟁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설립된 평화기념관이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본에서 전쟁자료관이나 평화박물관 건설운동은 전쟁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경험한 히로시마, 나가사키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기념공원과 자료관 건설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과 원폭돔은 현장성을 기초로 한 대표적인 반핵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이자 건물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전쟁의 비참한의 체험을 널리 알리고 평화의 메시지를 교육하는 평화운동을 바탕으로 평화기념관건설운동이 본격화되었고 그것이 여러 지역, 또는 대학에 평화기념관으로 결실을 맺었다는 점이다. 일본 곳곳에서 평화를 주제로 한 전쟁 전시회가 전쟁 체험자·유족·시민단체, 노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사카 공습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한「전쟁전」이었다, 곧「오사카부평화기념전쟁자료실」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를 모태로 다양한 세력들이 평화기념관 건설운동을 추진한 결과 오사카부와 오사카시가 공동으로 오사카평화센타(Peace Osaka)를 만들게 되었다.
  이처럼 평화운동으로부터 출발해서 평화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가와사키 평화관, 사이타마현 평화자료관, 그리고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자료관이나 박물관은 전쟁의 비참함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가해 상을 포함한 자료들을 상설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교토의 있는 리츠메이칸대학 국제평화뮤지엄은 여러 해에 걸쳐 민주적인 시민운동단체들이「평화를 위한 전쟁전」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수준 높은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반전 이념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주목할 만한 곳이다. 특히 반전 이념을 중심으로 시민들에게 다양한 평화교육을 실시하는 관서지역의 대표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센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올해 초 방문고 느낀 점은 전시 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는 지나치게 평면적인 구성에 뚜렷이 부각되는 포인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제의식은 분명하지만, 전시 방법은 개선할 점이 많은 상태였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과 자료관

  평화기념관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지켜 본 곳은 오키나와의 평화기념공원과 그 안에 자리 잡은 평화 자료관이다. 이 곳은 1975년에 문을 연 이래 오키나와에서 가장 중요한 평화교육의 센터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에서 오는 방문객들에게 참배의 장소가 되고 있다.
  1999년 여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처럼 각종 무기와 탱크, 그리고 일본군이 미군과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전투장면이나 장렬히 전사한 장군에 관한 전시물을 볼 줄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가 본 것은 일본군이 총에 착검을 한 채 오키나와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었다. 일본군이 오키나와 사람들을 어떻게 무참히 죽였는지 만행을 드러내는 동시에 동굴 속에서 죽어간 어린 학생들과 노인, 부녀자들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분명 일본의 한 지역인데도, 일본군의 만행을 그대로 고발할 수 있는 용기에 나는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올해 공원과 자료관을 다시 찾았다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공원의 공간 배치는 물론 새로 지은 평화자료관의 전시 내용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선 공원의 공간 구성의 변화를 보면, 우선 자료관 구관이 철거되고,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웅장한 신관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위령제를 치르는「평화의 언덕」이라는 제단이 새로 조성되었으며, 전에는 공원 울타리 밖에 있던 평화기념당이 울타리 안으로 배치되었다. 평화기념당은 유지들과 기업체들로 이루어진 단체인유구협회가 중앙정부의 돈을 받아다 일본군을 위령하는 불상을 안치한, 말하자면 군의 논리에 따라 건설된 관변 기념관이다. 평화기념당이 이제는 공원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오키나와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이들의 명단을 기록한「평화의 돌」과 자료관은 한편으로 밀려난 듯이 보였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간 내의 시설 배치와 동선체계는 그 공간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공간 상징은 그 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 시설물을 참배·견학하는 동안 상징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공원 내에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 이동하는 방문자들은 어떤 공간과 시설물이 우선적으로 참배·견학할 곳인지, 어떤 시설물을 더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교육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평화공원 내의 공간 배치의 변화는 민의 논리를 중심으로 건설되었던 공원의 핵심을 흐려 놓은 것이었다.
  자료관의 전시 내용도 많이 바뀌었다. 동굴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 옆에 서 있는 일본 병사의 총부리는 밖을 향하고 있어, 마치 주민들을 보호하는 듯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던 전시물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일본군의 전투 장면 전시가 늘어났다. 전시 기법은 화려해졌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어렵도록 애매하게 되고 말았다. 무척 실망스러웠다. 천황을 위해 용감히 싸우다 옥쇄한 일본군 이야기로 덧칠한 자료관은 더 이상 평화교육장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야스쿠니신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보수세력의 평화기념관 공격

  오키나와현에서는 기념자료관의 제1차 전시문제(1975년), 전적 비문 문제(1977년), 주민학살 교과서 기술 삭제사건(1982년),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 제3차 소송(1984년) 등 오키나와전의 인식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의와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어왔고, 이에 자극 받아 전국적으로도 교과서와 평화박물관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어떻게 시민에게 전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보수 세력이 전국의 평화기념관을「반일자료관(反日資料館)」으로 규정하고 비판·공격하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1996년 하시모토 수상 때부터 시작되었는데,「반일 자료관 공격 행동」은 평화기념관 건립운동에 대한 보수 세력의 반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대립은 1999년 평화자료관 신관을 지으면서 전시 내용을 오키나와현 간부 공무원이 감수위원회에 알리지 않고 멋대로 바꿔버린 사건에서 정점에 달했다. 앞서 지적한 오키나와의 평화기념공원과 평화자료관에서 일어난 변화는 오키나와현 지사와 간부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순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올해 2월 방문 때 나는 오키나와의 학생·교수·시민들에게 이 점을 계속 질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수세력에 의한 평화기념관 공격은 때로는 공개적으로 격렬하게 추진되지만, 때로는 은밀하게 진행된다. 오키나와 기념공원과 전시관의 변화는 바뀌기 전의 형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교묘했다. 반면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응세력의 활동은 전보다 약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본의 평화기념관설립 운동은 상당히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성윤
사진 조성윤

2003년 희망세상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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