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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공간의 전형 ‘독립기념관’

기념공간의 전형 ‘독립기념관’

현재의 ‘독립’에 응답하고 있는가·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필자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에는 탑신까지 포함하여 1.5m 남짓한 ‘해방탑’이 있다. 이 탑은 5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한 눈에 세월의 풍상을 느끼게 해준다. 초등할교 때는 물론이요. 대학 재학 중에도 인지하지 못했던 이 탑이 눈에 띈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이 탑이 세워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일제하 교육이 이루어지던 장면을 담은 사진들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곳에 탑을 세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록 이 탑은 조그맣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던 어느 농촌에서의 기념 행위와 방식을 보여주며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는데 필수적인 해개체이다. 지금도 매년 8월 15일이면, 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면민(面民) 체육대회가 열리는데, 해방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로부터 벗어났던 것을 ‘해방’, ‘광복’, ‘독립’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이를 기념하는 행위도 다양하다. 3·1운동과 같은 사건의 기념과 안중근·류관순·윤봉길·한용운·김좌진·김구 등과 같은 항일 인물의 기념, 항일 운동가들이 수감되어 고초를 겪거나 죽임을 당한 역사적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에 ‘역사관’ 조성, 일제의 상징적 건물인 구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와 경복궁 복원 등 생각하면 나름대로 많은 사업들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민간차원에서도 수많은 기념비 혹은 기념탑을 건립하였고, ‘위안부 역사관’이 건립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추진된 가장 큰 국가 프로젝트는 역시 ‘독립기념관’ 건립이었다.

‘독립’의 공간화
  기념이라는 점에서 보면, ‘독립’이라는 용어가 먼저 등장했던 것 같다. 1896년 7월 2일에 조직된 ‘독립협회;는 모화관(慕華館)을 개수·완공(1897. 5. 23)할 후 ’독립관‘이라 명명하고, 1898년 1월 중순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부순 후에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이 때 독립의 대상은 중국(청국) 이었다.  
  
  해방 후 ‘독립’에 대한 기념사업은 ‘반일’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던 ‘3·1’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처음엔 기념관 건립으로 시작되었으나, 몇몇의 기념탑 건립만이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항일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동상 건립이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조각가들의 상당수는 ‘친일부역자 미술인’ 이었다.
  독립기념관 건립에 관한 논의는 1974년에 다시 구체화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3선 개헌 이후에 유신체제의 확립 및 공고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에 헌법 개정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발물관건립계획안’을 수립했다. 이 계획안에는 ‘5·15쿠데타’와 ‘새마을운동’ 등을 정당화하는 내용들이 독립된 상설전시관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은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건립될 수 있었다. 1982년 4월 22일 일본국토청(國土廳) 장관인 마쯔노의 발언과 7월 말부터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기화가 되어 독립기념관 건립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언론 및 방송 매체들은 ‘광복절’이 임박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국민의 반일감정은 극대화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탄생의 부당성을 희석하고,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이 반일감정을 독립기념관 건립이라는 시각적 표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이 주도하니 사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을 리 없었다.




  기념관 건립에 소요되는 자금은 국민의 성금으로 충당했다. 우선 8월 31일에 ‘한국신문협회’가 성금모금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고, 9월 3일에는 MBC가 14시간 동안, 12월 1일에는 KBS가 18시간 동안 생방송을 하는 등 학생들의 주머니 돈까지 모아들여 4개월 만에 349억 8천여만 원을 확보했다. 국민성금모금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1986년 상반기까지 모은 금액이 과실금을 포함하여 총 692억여 원이었다. 다만 독립기념관 건립 부지는 정부에서 매입하였는데, 그 해 10월초부터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12월 24일 총 14개 후보지 가운데 현 위치인 충청남도 천원군 목천면 남화리 흑성산록이 결정되었다.
  기념사업의 추진기구와 장소 선정 및 예산 확보만 급속하게 추진된 것이 아니라, 공사도 군사작전과 같이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공기가 ‘준비위원회’ 발기대회 때 제출된 ‘광복기념관 건립계획(안)’의 5년 보다 1년을 단축하여 기본계획에는 4년으로 정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1986년 가을 서울에서 열릴 ‘아시아 경기대회’ 이전에 독립기념관을 개관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독립기념관의 상징 건물인 ‘겨레의 집’이 개관을 불과 10여일 앞둔 8월 4일에 화재로 소실됨에 따라, 6월항쟁 직후 시작된 7~9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1987년 8월 15일에 독립기념관은 개관했다.


  독립기념관의 공간 구성과 특성

  독립기념관은 25만평의 기념관 지역인 중곡 25만평, 동곡 11만평, 서곡 13만평, 그리고 산림 71만평 등 총 120만평의 규모이다. 그러나 흔히 독립기념관이라고 하면, 기념관 지역인 중곡을 말한다. 이 곳은 ‘겨레의 집’ 외 7개의 전시관과 원형극장을 포함한 총 59개동의 건물과 ‘겨레의 탑’, ‘불굴의 한국인 상’, ‘추모의 자리’ 외 14개의 상징조형물, 70여기의 애국시 및 어록비, 백련못, 그리고 1998년 조성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간’ 등으로 구성된 국내 최대의 기념공간이다.   
독립기념관의 공간구조를 보면, ‘겨레의 집’ 및 ‘겨레의 큰 마당’을 기준으로 십자형·좌우대칭형 구도를 띠고 있으며, 종단 축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구조는 전형적인 국가 기념비적 공간의 형태인데, 이후 민주화운동의 기념공간 조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기념공간 중 가장 긴 독립기념관의 종단 축은 최 하단에 설치된 불꽃 모양의 분수대에서 51m의 ‘겨레의 탑’, 백련못, 다른 건물들의 거대함과 위엄에 눌려 지나치기 쉬운 ‘독립기념관 건립문 중국의 천안문보다 큰 동양 최대의 기와집임을 자랑한 ’겨레의 집‘과 그 내부의 ’불굴의 한국인 상‘, 제4전시관인 ’3·1운동관‘, 그리고 3·1운동 대표 33인과 105인 사건을 상징하는 총 138개의 계단과 그 위 최 상단에 ’추모의 자리‘가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길고 먼 종단 축은 익히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관람객들의 관람 동선을 힘들게 했다. 진입부문으로부터 대표 전시물 혹은 전시관이 위치한 장소까지 거리를 두는 방식은 엄숙성과 경건함 들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되는 공간 배치이다. 그런데 다른 어느 기념공간보다 왜 독립기념관에서 이 이미지와 더불어 권위적이며, 위압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 규모의 거대함이다. 수직으로 솟아 오른 저 높다란 ‘겨레의 탑’과 제법 규모 있는 학교운동장만 한 면적에 45m의 높이를 자랑하는 저 큰 기와집(‘겨레의 집’)에서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더욱이 ‘겨레의 집’ 앞에는 12만 명의 군중이 참석한 행사가 가능한 장대한 광장과 1Km 가량의 종단 축이 펄쳐져 있지 않은가, 관람객이 왜소함과 위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둘째, 권위적인 ‘전통’이라는 재현 담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겨레의 집’에서 상징적으로 잘 드러나는데, 현상공모 및 공모지침서에서부터 ‘전통적 표현’ 방식이라는 것이 지정되어 있었다. 당선자인 김기웅은 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하여 전면과 후면을 분리하고 후면이 전면의 일부를 덮는 엇갈린 맞배지붕의 구조로 만들었으며, 입구부의 트러스와 지면에서 들어올려진 계단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모두 수정되어 국가적 기념공간의 전형적 건축양식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겨레의 집’ 하단부와 7개의 전시관에 적용된 성곽건축 양식도 답답함과 폐쇄적인 느낌을 더 해준다.  

7개 전시관의 특성과 변화

  독립기념관은 시대별, 주제별 내용에 따라 총 7개의 전시관과 16개의 전시실로 구분된다. 각각 전시관은 독립된 건물로 제1전시관은 민족전통관, 제2전시관은 근대민족운동관(근대민족운동실, 애국계몽운동실, 의병실), 제3전시관은 일제침략관, 제4전시관은 3·1운동관, 제5전시관은 독립전쟁관(의병투쟁실, 독립군실, 사회운동실, 학생운동실, 문화운동실), 제6전시관은 임시정부관(재외동포실, 임시정부실 - 광복군실), 제7전시관은 대한민국관(정부수립과 분단의 비극실, 경제개발실, 국력성장과 통일 의지실)으로 만들어졌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 제2~7전시관이 리모델링되었고, 현재는 제1전시관의 리모델링 계획을 입안 중이다. 리모델링은 수장고에 있던 자료일부를 교체 전시하고, 전시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 중심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다만 제6관의 임시정부관이 사회문화운동관으로 재편되고, 제7관이 대한민국임시정부관이 되면서 6관의 시설과 자료들이 7관으로 이전된 점, 그리고 제7관에 한국인의 해외이민사가 추가된 점이 가장 큰 변화이다. 이는 일단 기념관이 건립되면, 이를 수정·보완하여 변화를 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굳이 전시방법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자료를 읽지 않더라도 전시관을 둘러보면 여러 가지 전시 기법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전시 매체의 활용, 디오라마, 모형, 기록화, 입체지도, 동상, 조각 등의 전시를 통해 입체감을 전달하고 이미지 전달, 다양한 영상 및 전자화 전시 기법 등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을, 즉 기념의 대상으로 선정한 내용과 구체적 대상이 무엇이었는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념관은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은 목적에 따라 메시지와 구성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보면 독립기념관의 전시실은 영웅과 거대한 사건들의 교과서적 배치와 같은 1980년대 이데올로기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에서, 그리고 반일이라는 그물망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독립기념관은 1980년대 이후 진행된 근·현대사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을 반영하였는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파 및 과거 청산의 문제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일제하 민중들의 일상적 삶과 고통, 특히 강제 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조선인 소환 및 방문 등의 문제 해결에 대해 충분한 관심과 성실한 노력을 하였는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독립’을 위해 진실된 응답과 실천을 하고 있는가 등의 의문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6전시실에 전시 중인 ‘일제시대 조선일보 윤전기의 철거 논쟁’, 마산에서 발생한 ‘조두남 기념관’ 및 ‘논산 이은상 문학관’ 파문 등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지표인지도 모른다. 
 
  한국은 몇 퍼센트 독립 국가인가·
  일본의 과거사 망언에 대한 분노 여론을 바탕으로 ‘국민적 합의’ 하에 건립되었다는 독립기념관! 그러나 독립기념관이 건립된 이후에도 유사 사건들은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한국의 항의, 이에 대한 일본의 변명, 무마가 되풀이되었다. 올해 7월 중순에도 전 일본총무청장관의 발언이 또 다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군사·문화 등 영역에서의 자주성을 외치는 목소리도 점차 거세어지고 있다.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국민국가 단위의 경계는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 (국민)국가주의의 담론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 여전히 국민국가의 벽은 유지되고 있으며 사회변화의 첫 걸음은 국민국가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 등이 혼재하고 있는 오늘날! 과연 한국은 몇 퍼센트 독립 국가인가· 올해 8월 15일에도 어김없이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 에서는 기념식이 열릴 것이다. 
 
 
 
정호기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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