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반세기! 한국전쟁의 기념관
분단 반세기! 한국전쟁의 기념관
정호기 한구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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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인 페프가 제1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다룬「어느 날 밤, 전쟁기념탑에서......」라는 책의 일부가 2002년에 번역 후 출판되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어른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이책의 주인공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위해 조국 땡 곳곳에서 목숨을 바친” 병사들이다. 이들은 전쟁기념탑에서 빠져나와 ‘그들이 치렀던 전쟁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아마도 이러한 의문은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전쟁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현재도 이라크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한반도의 전쟁위기설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휴전이 이루어진지 정확히 반세기가 흐른 현재도 한반도에서는 전쟁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여전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동춘 교수는「전쟁과 사회」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한 민족, 민중, 인권, 여성의 관점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오로지 국가의 관점, 반공의 관점만 있다’,’북한의 전쟁관도 남한측의 공식적인 전쟁관과 동일한 논리구조에서 있다‘. 한국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과 집단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고 말하는 방식과 내용, 심지어 주장의 전개방식까지 제약을 받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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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기념 혹은 기억 전쟁을 기념하는 행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로마의 개선문과 같이 건축물을 만들기도 하고, 기념비 혹은 상징조형물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 산재되어 있는 대다수의 전쟁관련 기념물들은 근대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근대에 발생한 수많은 전쟁이 기념공간, 기념물, 기념관 혹은 박물관들을 조성하게 된 계기였다. 이러한 기념행위의 상당수는 승전(勝戰)을 상징한다. 그러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Auschwiz)와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공원 등과 같이 전쟁의 비극과 참혹한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있고,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리는 위령비가 건립된 경우도 있다. 그 형태가 어떻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기념행위들은 항상 가치를 지니고 있고, 과거의 사건을 단순하게 알리는 기능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 및 필요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전쟁의 담론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배할 가능성이 많다. 한국전쟁에 관한 기억과 기념은 이러한 주장과 잘 부합된다. 근래에 들어 왜 휴전일을 기념하지 않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을 기념하며, 이를 기준으로 전쟁의 성격을 규정짓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전쟁을 지배하고 있는 기억에 균열의 지점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해마다 6월을 지배하고 있던 한국전쟁과 관련된 담론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이후에는 다소 상쇄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올해부터는 6월에 대한 새로운 담론으로 2002년에 있었던 월드컵에 대한 기억이 추가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학문적 영역에 있어서도 전쟁의 배경. 기원, 발발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전쟁의 과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실제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김동춘 교수의 주장처럼, 클라우제비츠(Calusewitz)와 같이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한다면, 정치의 행동은 그 과정과 결과에 의해 평가받아야 하고, 민중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과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라는 문제의식이 공감을 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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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의 기념관 국가보훈처가 1996년에 발행한「참전기념조형물도감」을 보면, 전국에 건립된 참전기념조형물이 총 667개(해외 포함 702개)였다. 그런데 이 책이 발행된지 불과 8여 년이 흐른 오늘날 국가보훈처의 홈페이지에 실린 ‘국가수호시설’은 842개로, 그 사이에 175개나 증가했다. 이 가운데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념공간이 국립현충원과 전쟁기념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96년 6월부터 권위주의와 군사정권과의 친화성을 탈피하고자 국립현충원으로 명명되기 시작한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 국립묘지는 분단된 한반도의 비극을 가장 잘 알려주는 기념공간이다. 앤더슨(B.Anderson)이 말한 바와 같이, 국립묘지는 ‘민족국가’라는 일정한 영토적 개념에 기초하고 시민권과 병역의무가 결합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립묘지가 조성되었는데, ‘국군묘지’라는 처음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군인과 군문원이 주요 안장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애국지사, 경찰관, 향토예비군 등도 안장대상으로 포함되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기념관이 처음 개관한 것은 1961년 12월 5일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1980년 12월에 ‘현충관(영화관)’이, 1990년 8월에 ‘기념관(유품전시관)’이, 그리고 1991년 11월에 ‘호국관(사진전시관)’이 각각 건립되어 그 기능이 분화되어 있다. 이 중 기념관과 호국관이 전시관의 기능을 하고 있다. 430여평의 철근 콘크리트 기와조 2층과 기둥, 주춧돌, 지붕 등에 한국식을 가미했다고 하는 이 절충식 두 건물은 동작동 국립묘지의 좌측 공간에 ‘현충관’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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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건립된 기념관은 일제하 애국지사를 대상으로 한 ‘충렬실’, 한국전쟁·대간첩작전·월남전의 희생자와 전리품을 전시한 ‘충무실’, 그리고 해방 이후 국가유공자의 유품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한 ‘충훈실’로 구분되어 있다. 일단 이 세 가지의 기념 대상들이 영관성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민주화운동’과 관련지어 보면 ‘충훈실’은 가치관에 혼란을 준다. 왜냐면, 충훈실에는 4월혁명의 원인 제공자인 이승만대통령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유신독재체제를 수립한 박정희 대통령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홍보되고 있는 전쟁기념관의 건립 목적은 ① 호국자료의 수집, 보존 및 전시, ② 전쟁의 교훈과 호국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 ③ 선열들의 호국위훈 추모이다. | |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한반도 전역이 한국전쟁의 흔적을 담고 있고, 그러한 점에서 기념공간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어떻게 보면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념물은 이미 충분하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전쟁을 기념하는 공간과 기념물이 한반도 곳곳에 세워진 만큼, 우리의 평화로운 미래는 보장되고 있는 것일까·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양민들과 이들에 대한 학살의 기억은 공식적 영역으로 부상하여 역사화 되었는가· 치욕의 전쟁으로 기록되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영웅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극찬을 받고 있는 베트남 참전 기념비(Vietnam Veterans memorial)를 건립한 미국은 이후에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또 다시 벌였고, 핵폭탄의 참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평화기념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군주의는 강화되는 추세이다. 전쟁기념물의 존재와 예술성, 그리고 상징성과 무관하게 전쟁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전쟁 그 자체가 기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평화와 희생, 그리고 한국전쟁이 갖는 특별한 의미인 통일의 방안 등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범 교수가「한국전쟁과 양민학살」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전쟁에 대한 진정한 기념은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학살 관련 기억이 자신있게 말해지는 날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 |
글 정호기 사진 황석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