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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한낮 경인선 전철 안, 발아래 히터와 창문에 내리쬐는 햇볕을 베게삼아 한 시간을 까무룩 졸고 났더니 1호선 전철역의 동쪽 끝, 동인천에 와 닿았다. 내륙에만 살던 그래서 바다는 어른이 되어서만 갈 수 있을 것 같던 사춘기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려 그 바다를 보러 온 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그래서 인천은 수도권 부근에 살았던 10대 청소년들에게는 그렇게 ‘바다’에 대한 로망이기도 했던 곳이다. 실상 바다라 해서 왔던 인천에는 상상 속의 그 광활한 바다가 아니었지만…….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
동인천 전철역 앞에서 5분 거리에 신포시장이 있다. 그곳에 지역 문화 운동을 위해 ‘판’을 벌이고 있는 이종복(48세) 씨를 만났다. 참고로 그의 직업은 시인이며 생업으로 방앗간 일을 한다. 이 씨가 오전 중에 끝마치지 못한 떡 배달을 위해 시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닌다. 떡 나르는 그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일이 끝나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길가에 허물어진 건축물 터를 보더니 심마니가 산삼 발견한 것 마냥 기뻐하며 비집고 들어간다. “이 자리가 일제 개항 시기 때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건물 터에요. 여기 이 벽면 보세요. 예전에는 흙집을 지을 때 새끼를 꽈서 얼키설키 놨어요. 쉽게 부서지지 않게 하기 위한 거죠.” 이 씨가 놓치지 않고 설명을 해 주며 터에 다시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와서 재조사를 해야 겠다고 말한다. “급격한 개발로 인해 내 고향이 변해가는 모습이 그다지 아름답지마는 않다는 데 제 활동의 가장 큰 이유가 있고 동인천이라는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과연 무엇을 하는 게 옳은 일일까를 고민했기 때문이죠.” 이씨는 지난 1996년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라는 문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배다리 일대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배다리를 지키는 시민 모임’ 등 지역 문화 활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해마다 8월 15일 광복절에 펼쳐지는 ‘인천장정’은 인천의 해안선을 따라가는 역사 기행으로 한국 근대사에서 개항을 맞은 인천의 참의미를 되새겨보는 프로그램이다. 또한 인천역 인근의 근대 유적과 건축물을 돌아보는 ‘개항장 거북이 마라톤’은 해마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가족 단위나 학생들이 단체로 참여하기도 하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신포시장 입구에서 펼치는 ‘터진개(신포동의 옛이름) 지신밟기’도 신포시장의 연례 행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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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복 씨는 부모의 일을 물려받아 신포동에서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
고향에 대한 애정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인천이란 지역은 역사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항구 중에 가장 먼저 인천을 개항하면서 병참기지로 사용했고 또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이 가장 먼저 들어와서 기지를 지었어요. 이런 역사적 격변기에 있던 곳이니 그 문화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돈을 벌러 왔던 사람들, 혹은 잠시 배 타고 들어왔다 떠나는 사람들이었죠.” 그의 말은 그런 정주의식 없는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지역에 대한 애정보다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그야말로 ‘밀리고 쓸리고’ 하는 장소로만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잔존하는 문화 의식을 지역 시민들이 스스로 깨고 ‘인천’을 제대로 바라봐야 하고 그런 속에서만이 인천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고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천 토박이다. 서울에 인구가 그렇게 많아도 토박이가 얼마 안 되는 것처럼 인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가 느끼는 인천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일제 개항 전, 한적한 어촌 마을에서 터 잡고 살던 조부모와 부모 아래서 자라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그는 인천에서 살았다. 군대에 간 기간 빼고는 인천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이라면 느꼈을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에게도 변하는 계기가 온다.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가 이 동인천이 주요 무대거든요. 대학교 1학년 때 맥아더 장군 동상에 올라간 일이 있었어요. 사실 말 그대로 난리가 났죠. 그거야 말로 국가 안보에 걸리는 행위였으니까, 그 사건으로 경찰서에 간 일이 사회적 참여 활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죠. 소설에서처럼 나도 인천을 아니 내 조국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러면서 이제는 맥아더 동상을 송도 전쟁기념관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는 말도 꺼냈다. 예전 같은 심정이라면 저항감으로 무너뜨리고도 남았지만 이제는 부모 세대들이 겪은 아픔이나 경험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은 갖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유연해진 그리고 비교적 관용의 폭이 넓어 보이는 그의 말에 비교가 될 진 모르겠지만 남과 북의 차이를 인정하고 살았으면 하는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급격한 개발로 인해 내 고향이 변해가는 모습이 그다지 아름답지마는 않다는 데 제 활동의 가장 큰 이유가 있고 인천이라는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과연 무엇을 하는 게 옳은 일일까를 고민했기 때문이죠." |
문화 활동으로 인천의 미래를
“근대사를 통해 배출해 낸 인천의 문학인들이 많죠. 시인 고은, 조병화,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가 한상억 등 이런 작가들을 발굴해서 지역의 문학을 재생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인천의 독특한 문학적 분위기를 지금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느끼고 키울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채워나갈 겁니다.” 그는 또 인천의 생활 문화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생활 문화사 연구를 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기록하는 중이다. “쉽지마는 않죠. 얼마 전부터 사무실로 쓰던 공간이 임대료를 못 내는 바람에 사용을 못 하고 있어요. 하지만 꼭 사무실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이렇게 길거리에서 그리고 시장에서 시민들을 만나죠. 언젠가 또다시 문을 열 날이 올 거니까, 그래도 저는 계속 인천에서 살아갈 거고 시대가 바뀌면서 내용은 바뀌겠지만 ‘인천’이란 지역을 역사 속에서 다시 보고자 하는 문화 활동을 계속 해 나갈 겁니다.” 그가 하는 일들은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인천의 역사를 알고 그 속에서 지금 인천의 모습이 어떠한지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천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문화적 코드’를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하시던 방앗간을 물려받은 그에게 혹시 자녀들에게도 물려줄 의향이 있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아이들이 생각 외로 방앗간 일을 재밌어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가 이제까지 강의 한 내용과 직접 발로 조사하며 정리한 책과 자료집을 찾아보면 인천이란 지역이 다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인천 한 세기』, 『길 따라 건물 따라』, 「인천 근대 건축 기행」, 「인천의 해안선」, 「인천의 주산을 따라서」 등이 있다. 그래도 항구인데……. 바다를 보기 위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올라갔다. 이 작은 항구 도시가 한국 근대사에서 겪었을 수난을 생각하니 이 땅의 역사와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취재가 끝나고 신포동 주변을 잠깐 둘러보는데 적산 가옥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거기에 이 씨의 설명이 덧붙여진다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역사 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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