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투명사회와 어깨를 겨루고 경쟁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사)한국투명성기구 김거성
IMF 10년이 남긴 것
지난 11월 21일은 김영삼 정권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신한국당 후예인 한나라당이 창당된 날이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잃어버린 10년’ 타령에만 골몰하는 저들의 모습에선 ‘갱제’ 살리기는 고사하고 쪽박마저 깨버린 지난날에 대한 겸허한 반성도, 자기성찰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권의 반격도 꼴사납긴 마찬가지다. 지난 10년은 독재와 부패의 고리를 끊어낸 ‘되찾은 10년’이었다는 그들의 주장 속에는, 민주화의 과실을 맛볼 겨를도 없이 IMF라는 철퇴를 맞아 신자유주의의 거센 풍랑에 휩쓸린 국민들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
사단법인 한국투명성기구 김거성(49세) 회장은 10년 전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국가 부도 상황을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 누적돼 온 병폐들의 총체적 폭발’로 본다. 작은 교회의 목사이자 재야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벌여왔던 그가 IMF 체제 이후 특별히 ‘부패’ 문제에 주목하고 반부패운동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운동에 나서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은 과연 어떤 시점이었는가. 결국은 IMF로 대표되는 당시 상황은 우리 사회 곳곳에 쌓이고 쌓인 병폐, 즉 적폐(積弊)가 종합적으로 곪아터진 것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는 이 사회의 기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여러 영역들 중에서도 반부패운동, 투명성운동에서 희망을 찾게 된 거죠. 개인의 정치적인 의지나 제도를 개선하고, 새로운 법률과 기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반부패운동을 국민운동 차원에서 힘 있게 벌여 대중적인 큰 흐름을 형성해 나가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러한 흐름에 역류할 수 없도록 만들 때 이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수가 있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거죠.”
그는 자신이 줄곧 몸담아 왔고 자신의 ‘달란트’를 필요로 하는 시민운동 영역에서 그와 같은 생각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9년 8월 24일 한국YMCA전국연맹, 흥사단, 언론개혁시민연대,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등 각 부문별 20여 개 주요단체가 발의하고 총 837개 단체가 참가한 반부패국민연대라는 이름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김거성 회장이 한국 반부패운동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를 만나게 된 것은 반부패국민연대의 창립을 목전에 둔 어느 날이었다.
“반부패운동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국제투명성기구란 단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각국의 부패지수가 몇 점이고, 세계 몇 등이고 하는 걸 발표하는 데가 바로 TI거든요. ‘이 단체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무턱대고 이메일을 보냈는데, 다행히 컨텍이 된 거예요. 얼마 후 TI에서 한국을 방문하게 됐어요. 한국의 파트너를 결정하기 위해 반부패국민연대를 비롯한 몇몇 단체를 만나러 온 거죠. 이 사람 저 사람 쭉 만나보더니 우리하고 하겠다고 결정을 하더군요. 반부패국민연대 창립도 하기 전에 소위 입도선매(立稻先賣)가 된 거죠.”
우리 사회는 얼마나 투명해졌을까
2000년 9월 29일, 캐나다 오타와 총회에서 TI의 공식 인준을 받은 반부패국민연대는 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로 거듭나게 됐다. 반부패국민연대를 창립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처럼 창립 1년 만에 인준을 받은 경우는 거의 드문 일이죠. 다른 나라의 경우 보통 2~3년은 걸리거든요. 아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 반독재운동의 오랜 경험, 역동성 같은 것들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1993년에 설립된 국제투명성기구는 세계 유일의 반부패 국제 NGO다. 설립자 피터 아이겐(Peter Eigen)은 세계은행(IBRD)의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경제개발 프로그램 관리자로 근무하던 중 부패가 후진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퇴직한 뒤 국제투명성기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언젠가 피터 아이겐이 제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개발이라는 아젠다가 사회에 풍미하고 있었을 때 이런 고민을 했대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의 개발 원조를 해주는데 그 원조가 과연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사용되느냐 아니면 그 사회 독재자들의 비밀금고로 들어가서 그 사람들 배불리는 데 쓰이느냐. 개발이라는 것도 결국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가 아닌가. 결국 부패야말로 사회의 암이구나. 지금까지 대문자 C를 의학적인 의미에서 ‘암’이라고 했다면, 이제는 사회암으로서의 부패를 얘기해야 될 때다…….’ 이런 고민들이 국제투명성기구 창립의 배경이 된 거죠.”
그는 TI와의 만남을 통해서 반부패운동에 어떤 패러다임이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과거의 분절적이고 일시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이고 종합적이며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한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새로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우리 사회의 바탕과 기틀을 다시 세우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때 TI를 통해서 얻어낸 반부패운동의 여러 가지 경영 전략과 아이디어들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한마디로, 반독재와 반부패의 상관성을 확인했다고 할까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은 대개 한 사건이 터지면 거기에 집중해서 이슈 파이팅을 하거나, 문제를 적발해서 처벌을 요구하거나, 법률 제도를 바꾸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TI의 경우 반부패라는 것이 어느 한 방식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섹터들을 이끌어 내서 사회 밑바탕을 바꿔내는 종합적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IMF로 촉발된 반부패운동이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 지 10년 세월이 흘렀다. 1997년 당시 바닥을 드러냈던 외환보유고는 2천 600억 달러를 돌파하여 세계 4위에 올랐고,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종합주가지수 2천 포인트·수출 3200억불·국가경쟁력 11위 등 지난 10년 동안 우리 경제의 외형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깨끗해지고 투명해졌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변화가 없지는 않다. 이제 민원서류를 빨리 발급받기 위해 동사무소 직원에게 ‘담뱃값’을 찔러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거리에서 교통단속에 걸리면 으레 경찰관에게 만 원 짜리 한두 장 건네며 선처를 부탁하곤 하던 풍경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교사들이나 기자들의 ‘관행적 부패’ 또한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라.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10년 전, 20년 전보다 ‘더 썩었다.’, ‘더 더러워졌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TV만 켜면 BBK 주가조작사건, 후보 자녀의 위장취업 논란, 삼성 비자금 의혹사건 등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패 관련 뉴스들이 줄지어 나온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반부패’라는 희망 찾기
“일반 국민들에게 10년 전하고 지금을 비교해 보라면 ‘더 썩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마 60%는 될 것입니다. 전문가들한테 물어보면 거꾸로 ‘많이 좋아졌다.’라는 답변이 한 70%쯤 될 거구요. 왜냐. 첫째, 일반 국민들이 접하는 사건의 수나 규모가 과거에 비해서 훨씬 많아졌고, 둘째, 부패에 대한 기대 수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이 10년, 20년 전의 권위주의 사회라면 변양균·신정아 사건, 국세청장 뇌물수수 사건은 ‘껀’이 안 되는 거죠. 위에서 한마디 하면 끝나는 거니까……. 지금 우리 사회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해서 과거보다 더 더러워진 것이냐, 과거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느냐,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도 당연히 있었지만 위에 있는 컨트롤타워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되면서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분권화되면서 계속 터져 나오는 거죠. 그래서 저는 가끔 ‘부패의 민주화’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부패의 중앙집중으로부터 부패의 분권화, 민주화를 불러왔다고 이야기해요.”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반부패운동은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2005년 3월에는 (사)한국투명성기구의 발의로 정부·재계·정치권·사회단체 인사들이 부패 척결을 위한 투명사회협약을 체결하였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각 영역에 뿌리내린 부패들을 다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과 기업 총수, 시민사회단체 대표가 만나 부패 청산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은 물론 전에 볼 수 없었던 신선한 광경이었으나, 개인의 자발적인 의지 외에 협약 이행을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은 국민들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이 협약의 실효성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더욱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한 첫 서명자 38명의 면면을 보면서 국민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투명사회협약까지 체결한 ××들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느냐?’는 국민 비판에 대해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 같은 경우는 체결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 문제될 거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죠.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계속 고민거리예요. 투명사회협약 체결을 할 때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반성을 전제로 한 거긴 하지만, 우리가 (이들에게) 면죄부만 주는 건 아닌지,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유의미한 것인지……. 일단 실천협의회에서는 ‘앞으로의 방향과 각 부문의 추진 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정리를 했습니다.”
답변을 하는 김거성 회장의 얼굴에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쳐갔다. 지금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고민들은 우리 사회의 발전과 반부패운동의 진보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반부패라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해외 친구들한테 투명사회협약을 소개했더니, 그들이 그러더군요. ‘너희는 경제도 그렇고, 민주화도 그렇고, 심지어 월드컵도 4강에 제일 빨리 올라간 나라다. 이제 반부패에서도 ‘빨리빨리’ 성과들이 나오는 거냐? 기대한다.’ 아까 부패의 민주화라고 말씀드린 현 상황은, 우리 사회의 윤리적인 바탕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입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우리는 진보하고, 발전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단기적인 낙관론자는 아닙니다만, 장기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CPI(부패인식지수)에서 8점대 이상 나오는 서구의 투명사회들과 어깨를 겨루고 경쟁할 때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글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로 저서로는『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김진수』·『최종길』『한일회담반대운동』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