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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 보랏빛 수건으로 물드는 탑골공원

 

오래도록 눈에 익은 세 가지 풍경
인사동 초입에 자리한 탑골공원은 189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근대식 공원이다. 장장 11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셈이다. 당시 공원으로서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서울 시민들에게 휴식처로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담장과 고풍스런 출입문이 안팎을 확연히 구분 짓고 있어서인지 그곳을 공원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그곳에는 오래도록 눈에 익은 풍경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듯 애용하는 노인들이고, 둘째는 1980~90년대 집회 시작과 마무리를 선언하는 장소이자 가두시위의 정해진 코스로 이용했던 시위대이고, 셋째는 매주 목요일 낮 2시만 되면 나타나는 어머니들이다. 이것은 탑골공원이 서울 한복판에 있어 접근하기가 수월하고 유동인구가 많아 선전 효과가 크기 때문에 생긴 풍경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태자면 3·1운동의 발상지로서 역사적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삼일문을 들어서면 대원각사 비각이나 원각사지 10층석탑 등 근대 이전의 유물은 저 뒤로 물러난 듯 눈에 잘 띄지 않고,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팔각정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독립선언문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의 모습을 돋을새김한 청동 조형물군이 시야를 차지하고 들어온다. 2001년 후반기부터 2002년 3월 1일 재개장까지 성역화 작업을 거친 결과이며, 또 그로 인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변화는 탑골공원을 찾던 노인들이 가까운 종묘공원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종묘공원은 주말이면 인도를 지나다니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노인들로 북적거린다. 취재를 간 날에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담을 나누는 노인들이 군데군데 보였고, 그 틈에서 교복 치마를 무릎 위로 기장을 조절한 여고생 서넛이 독립선언문비 앞에서 자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 땅의 모든 약자들을 위해
공원 밖에서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이 보랏빛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서로 안부 인사를 건넸다. 18일, 목요일 오후 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681회째를 맞는 목요집회였다. 햇수로 15년째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는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열렸고, 특정 사건으로 국회나 경찰서 등 관할 장소를 방문해야 하는 날만 빼고는 어김없이 탑골공원 앞에서 열렸다. 이날 목요집회에는 민가협 어머니 열 명과 비전향 장기수,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 등 일곱 명의 할아버지도 참석했다.
민가협의 활동으로 장기수들의 전원 석방이 이루어진 1999년 이래로 서울에 살거나 건강이 허락하는 이들의 참여가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온 것이다. 보랏빛 수건을 목에 두른 그들은 집회가 끝나자 현수막을 접고 유인물을 걷고 스피커 등 무거운 물건을 트럭에 싣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돌려주고’ 있었다.



이영(65) 상임의장의 모두발언 후,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에 합의한 만큼 국가보안법은 더 이상 존립 근거가 없어졌으니 당장 철폐해야 한다는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의 발언 그리고 임기란 전 상임의장의 안양교도소 인권침해 관련 발언이 길게 이어졌다. 수용자를 폭행한 교도관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가 해당 교도관을 징계하라는 권고 결정을 내렸으나 교도소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시민단체와 사회 각계의 노력으로 인권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명실상부한 국가 독립기구로 설립되었음에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무런 법적 강제성을 띄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인권보호의 현주소이다. 모든 개인의 인권은 누구로부터도, 무엇으로부터도 침범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인권 보호의 수준은 민주화의 척도가 된다. 그러니 국가인권위원회의 유명무실한 권고는 곧 우리 사회 민주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민가협에서 파악한 양심수는 2007년 10월 18일 현재, 72명이고 국가보안법 관련은 물론 한미FTA 반대,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해고 반대 노동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에서 조사한 병역거부 양심수만 올해 10월 현재 760명에 달한다. 목요집회 자리에는 이렇듯 다양한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들의 사진과 행적을 실은 선전물이 함께 놓여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간 학생의 학부모들이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민가협을 만들었고, 90년대 군부정권을 종식시켰다고 믿었던 문민정부 하에서 양심수가 더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삶의 일상으로 파고드는 인권침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목요집회를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총련 소속 학생의 어머니들이 새 식구로 들어왔고 세월이 흘러 구속된 자식들은 모두 출소했지만, 어머니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침해 사례는 더욱 다양해졌고,  
15년 째 매주 목요일 10월 현재 680회가 넘게 열리고 있는 민가협 목요집회

어머니들은 그것이 누구든, 어떤 법적 테두리 안에서 심판을 받든 모두를 자식처럼 받아들였다. 그 품 안에는 병역거부자, 성적소수자, 철거민, 장애우,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은 늘 약자이고 소수자이다.
물론 처음부터 오롯이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학습되어온 전통적인 가치관은, 특히 병역거부자나 성적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쉽게 허물 수 없게 하는 장벽이었다.
“왜 거부감이 안 들었겠어. 왜 남들 다 가는 군엘 안 가? 이런 생각부터 들었지. 언제 한번은 스물다섯 살 먹은 총각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종교 때문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총을 들 수가 없다고 해. 그 얘길 듣고 이해하게 된 거야."

 


탑골공원 앞에 각 나라의 국기를 판매하는 노점이 있는 것도 흥미롭다.
 

현재 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이영 어머니의 말이다. 어머니들은 당신 자식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시대의 거센 풍랑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민가협 22년의 역사와 함께해오면서 인간답게 살 권리와 차별 없이 누려야 하는 자유와 평등 앞에서는 기존의 통념을 스스로 버릴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으며, 그 누구보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목요집회는 우리 사회의 약자,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알리는 ‘인권 신문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비록 귀 기울여 듣는 이들이 많은 건 아니지만,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바로 옆에서 누군가 무고하게 끌려가도, 누군가 죽임을 당해도 관심 두지 않는 시대에 바로 그 검은 ‘돈’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알리고자 어머니들은 이토록 오랫동안 거리로 나서고 있다.
15년째, 하 15년이라니! 그 햇수만 헤아려보아도 숙연해진다.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평화를 진정한 평화라고 착각하고 사는 동안 우리는 가진 자들이 보이지 않게 쳐놓은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는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다. 어머니들은 우리 모두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늙고 힘없는 몸을 이끌고 나와 소리 높여 외친다.


아직도 멀고 먼 길, 쉼 없이 가리라
평일 낮, 탑골공원 앞을 지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행인들 중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늘어놓은 양심수들의 사진과 행적을 보았다. 소일거리 없어 나온 할아버지들은 참 꼼꼼하게 오래도록 보았고, 남녀 한 쌍과 소녀들과 청년들도 진중한 눈빛으로 보았다. 집회가 시작되고 어머니들이 나직나직하게 또는 카랑카랑하게 열변을 토하자 박수를 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도 이런 자리라면 꼭 하나씩은 있는 방해꾼이 나타났다. 으레 머리 허연 할아버지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날의 방해꾼은 양복 입은 신사다. 무슨 일을 하는지 두툼한 서류가방을 두 개나 들고 삐딱하게 서서 몇 마디 듣더니 마이크라도 뺏을 듯이 성큼성큼 걸어가 “국회 앞에 가서 해라”고 신경질적으로 내뱉는다. 간사가 달려와 가로막자 양복 입은 신사라서 체면 생각이라도 뒤늦게 들었는지 곱게 물러나더니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며 곧장 사라졌다.



평일 낮, 탑골공원 앞을 지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행인들 중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늘어놓은 양심수들의 사진과 행적을 보았다. 소일거리 없어 나온 할아버지들은 참 꼼꼼하게 오래도록 보았다.

“우리가 왜 국회고 청와대고 안 갔겠어.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쫓아다녔는지 말도 못해. 그런데, 찾아가면 들어주기나 해?”
전 상임의장을 지낸 임기란 어머니는 칠순을 훌쩍 넘긴 연세에 관절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아집회를 해야 하지만 목요집회를 빠지는 날이 없고, 윗자리에 앉은 그 ‘못된 놈들’에 대한 비판의식은 정말 얄짤없다. 우렁찬 목소리에 결기만큼은 젊은 사람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았다. 어머니들 중 최고령자이기도 해서 이런저런 대소사를 진두지휘하는 믿음직한 맏언니였다. 민가협의 역사가 곧 임기란 어머니의 중년 이후의 생애사인 것이다. 예전의 목요집회 풍경은 어땠을까?
“대놓고 욕설이었지, 빨갱이놈들이다 그러면서. 지금도 늙은이들 중에는 국가보안법 없으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아. 요새는 종묘공원으로 많이 가니까 덜한 거지. 거, 일당 받고 움직이는 대한노인회 같은 데 말야. 집단적으로 와서 훼방이란 훼방은 다 놓고……. 그땐 내가 젊었으니까 욕하는 놈들 있으면 슬쩍 다리도 걸고, 같이 대거리도 많이 했어.”
지금도 반공교육의 학습효과는 대물림되고 있으니, 그때는 오죽했으랴. 그 와중에도 음료수도 사다 주고 격려해주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니, 어머니들의 눈물겨운 외침이 희망의 빛으로 비추는 날도 많았으리라. 그러한 작은 빛이 하나둘 쌓여 수십 년 동안 창살 안에 갇혀 있던 역사의 어두운 그늘을 세상 속으로 나오게 했던 것이다. 그 역사적 의미인 목요집회를 담당하고 있는 조미영(36) 간사에게 들어보자.

“목요집회는 ‘양심수’를 처음으로 사회문제화 했으며, ‘인권’이라는 주제로 장기간 진행되고 있는 집회입니다. 특히,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결과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비전향 장기수 모두를 석방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그 동안 많은 국제사회 활동가들이 목요집회를 찾았다.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어머니회를 비롯해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 세계인권기구대회에 참가한 각국의 인권활동가들이 탑골공원 앞에서 함께했으며, 올해 3월에는 필리핀, 버마, 동티모르,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인권활동가들이 참여했다.
 
목요집회는 `양심수`를 처음으로 사회문제화하고 `인권`이라는 주제로 드러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조미영 간사

그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집회를 이어간다는 사실에서부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목요집회는 이렇듯 누구나 마음껏 ‘인권’에 대한 발언을 소리높일 수 있는 지정 장소로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아오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3명만 모여도 잡아간다는 동아시아의 인권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며 연대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전한다.
목요집회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우선은 우리 사회에 양심수가 0명이 되는 그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0명이 다시 1명이 되지 않도록 감시를 늦추지 않을 것이며, 인권 지수가 곧 진정한 민주화의 척도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탑골공원 앞은 보랏빛 수건을 두른 어머니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글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6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와 『푸른 손들의 꽃밭』이 있다.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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