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이념과 역사
『희망세상』은 2008년 연속 기획으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1987년 6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민주화를 이끌어낸 후, 한국 사회는 최초로 이상이나 이론이 아닌 현실과 실천으로서 민주주의를 대면해야 했다. 그 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 직면했던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경제적 삶의 급속한 황폐화 속에서 더 이상 희망의 언어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 시기보다 민주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은 민주주의가 초래한 결과가 아닌 민주주의 결핍의 결과이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도 다수의 보통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와 갈등을 해소하는 최선의 정치는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걸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 기반해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을 돌이켜 봄으로써 한국 사회가 실천할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여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위해서이다.
편집자 주
들어가는 말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현대인들에게도 여러모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영역이다. 유대, 기독교 문화와 더불어 서구의 역사를 가장 강하게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인 헤겔은 그리스를 서구인의 고향으로 묘사함으로써 서구 문화에서 고대 그리스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 예술, 철학 등의 각 분야에서 고대 그리스가 이룩한 업적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호머의 2대 서사시와 고대 그리스 비극은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상적, 문학적,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현대 예술의 새로운 장르인 영화에서도 고대 그리스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된다.프랑스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루소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 열광했던 근대인들 중의 하나였다. 미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아테네 민주주의와 로마 공화정의 역사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역사는 현대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아테네 민주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현대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므로, 현대 민주주의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려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대화의 상대자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이 재단의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 속에 나타난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리소스 북’(Resource Book)에서 예화를 선택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토론이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역사와 우리 자신 보기 프로그램’은 나찌(Nazzi) 독재가 시민들의 선택과 지지 속에 이루어 졌음을 상기하면서, 역사는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선택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해서 책임 의식을 갖고, 올바른 참여와 공동의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더불어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교사연수 프로그램과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페리클레스
기원전 445년부터 429년까지 15회에 걸쳐 최고 권좌인 장군(스트라테고스)직에 재임하며 그리그를 민주주의 국가로 이끌어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사
기원전 750년과 450년 사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민주정은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다수에 의한 지배가 더 좋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신념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소수의 귀족이나 왕, 참주 등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통치의 특권을 부여했던 정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남자 성인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의 변화가 발생했다. 이런 새로운 정치 생활과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는 인민을 뜻하는 ‘demos’와 힘이나 지배를 의미하는 ‘kratia’의 합성어로 ‘인민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새로운 정치적 신념과 이를 실현할 제도적 장치들에 대한 모색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아테네에서의 민주주의는 솔론의 개혁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민주주의의 이상과 제도가 전면적으로 발전하여 완성된 모습을 갖추었던 시기는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제 개혁이 시작되었던 기원전 508년에서부터 페리클레스가 시민권에 대한 그의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켰던 기원전 451년을 거치는 대략 한 세기 동안이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절정에 이르게 했던 페리클레스가 행한 민주적 개혁 조치들로는 배심원 제도, 500인 평의회 제도, 추첨으로 임명한 공직자 등에게 국가 수입으로 공무수당을 제공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등이 있다. 공무수당 지급으로 가난한 시민들도 공공의 정치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가 주어졌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 통치기구는 민회, 500인 평의회 그리고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으로 운영되는 법원이었다. 아테네의 민주정 하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정치영역에서 공동체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에 대해 최종 의사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과 재판 업무에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권한으로 여겼다.
아테네의 최고 의결 기구인 민회는 모든 남자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의 남자 시민들은 20세가 되면 민회에 참가할 자격을 부여 받았다. 민회는 외교 문제, 재정, 선전 포고와 군사 작전 등 나라의 중대사와 관련된 문제를 의결했으며, 장군들의 선발 심지어는 나라의 안위와 관련된 범죄에 대한 재판까지 했던 기구이다.
500인 평의회는 주로 민회의 업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그날그날의 일상 행정을 맡아보는 기구로서 아테네 전역에서 매년 추첨으로 선출되었다. 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려면 적어도 30세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평생 두 번을 초과하여 평의회 의원으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 이는 가능한 모든 시민들에게 골고루 정치 활동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함이었다. 평의회 의장은 일종의 아테네 폴리스의 수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임기는 24시간에 불과했다. 이론적으로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일생에 한번쯤은 민주 공화국의 수장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아테네의 재판제도는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 제도였다. 즉 아테네의 배심원은 행정 단위인 10개 부족에서 600명씩 추첨으로 선발된 6,000명의 배심원단 명부에서 지명되었다. 배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30세 이상의 아테네 남성 시민들이었다.
이 재판제도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식적인 기소를 담당하는 독립 기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은 법이 어겨졌다고 생각될 때,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모든 재판은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재판을 담당하는 시민들은 추첨에 의해 정해졌는데, 이들은 시민 배심원으로서 해당 사건의 양쪽 당사자들의 발언을 모두 들은 후에 판단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검사가 기소를 독점하고 있고, 재판에 시민들은 참여할 수 없다. 물론 서유럽과 미국과 같은 여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시민들이 배심원으로서 재판에 참여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주의 이념에 더 충실한 제도이다. 그러나 2,500여 년 전 아테네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하여 배심원과 재판관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 유적
아테네 민주시민의 권리와 의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가장 유명한 주장은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들어 있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죽은 아테네 시민들을 애도하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의 특징을 모든 아테네의 시민들이 아테네 정치 공동체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는다. 즉 민주주의는 권력이 소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손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시민들의 공개 토의 내지 토론을 강조한다.
시민들은 민회나 각종 회의에서 동등한 발언권에 의거한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린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토론을 통해 집단적 구속력을 지니는 결정을 한다는 페리클레스의 신념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일반 대중의 정치 능력에 대한 신뢰 속에 작동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아테네 시민들은 국가의 공적 사안에 적극 참여하는 삶을 훌륭한 시민의 모범으로 생각했다. 물론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강제로 민회나 법정에 참여하도록 하는 법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리클레스가 말한 것처럼, 그런 사적 인간들은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공적인 삶에 무관심하고 민회나 법정에 참여하여 자유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를 다하지 않고 개인적인 활동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이디오테스’(idiote?s)인데, 이 단어가 현재 영어에서는 백치나 바보를 가리키는 ‘idiot’의 어원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민회나 법정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여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하는 삶을 최상의 가치로 인정했다.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을 인간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지름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테네인들에게 정치 생활은 시민 생활의 핵심 영역으로 여겨졌다. 아테네인들에게 정치적 공동체와의 일체감, 즉 애국심은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 미덕이 되었다. 그들은 공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해 국가에 혜택을 줌과 동시에 개인은 더할 나위 없는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했다. 시민으로서 명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에게 유한한 삶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 신과 같은 영원불멸의 삶을 획득하는 길이기도 했다.
자유로운 시민들의 조국인 폴리스, 즉 도시 국가의 번영과 명예를 위한 행동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은 아테네 시민들 모두의 이상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 시인들인 아이스킬로스(Aischylos)나 소포클레스(Sophocles)도 조국을 위해 여러 번 전쟁에 참여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아테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그 유명한 마라톤전쟁과 살라미스 해전에 참여했던 아이스킬로스는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을 인생의 최대 자랑으로 여겼다. ‘비극의 창조자’로서 위대한 명성을 떨쳤던 그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묘비에는 마라톤전쟁에서 페르시아와 싸웠던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함대에게 궤멸적 타격을 가하여 아테네에게 승리의 결정적 기회를 주었던 기원전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이 끝난 후에 소포클레스는 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신을 찬미하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했다. 그 후에 그는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왕』과 같은 불멸의 비극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도 정치가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스파르타와의 전쟁 때는 장군으로서 전쟁을 지휘하기도 했다.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 또한 시민으로서 여러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참가한 전투들을 언급할 정도였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어두운 점들
아테네 민주주의가 장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한계들도 드러냈다.
첫째, 20세 이상의 아테네 자유 시민인 성인 남성만이 시민권을 향유했을 뿐이고 노예와 여성 그리고 외국인 거류민들은 그런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을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둘째, 대중들에게 거의 무제한적으로 결정 권한을 부여했고,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할 여러 폐단을 교정할 수단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소수의 혹은 한 사람에게 권력이 독점되는 상황을 염려하는 것처럼 인민 대중에게 모든 권력이 독점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유명한 격언은 권력이 소수나 일인에 집중되었을 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사형을 언도 받은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셋째, 아테네 민주주의는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대해 지나치게 배타적이었고,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문화권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독선적 태도는 그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문명을 야만인 내지 야만으로 간주하는 데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넷째, 아테네 민주주의의 성공이 제국으로의 팽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인 페리클레스 또한 아테네 제국을 ‘독재’로 부르면서 아테네가 제국으로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잘못인지 모른다는 후회의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 역사를 이해할 때, 아테네의 정치적 안정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제국으로의 팽창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가는 말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었던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시민이 이상적으로 간주했던 ‘정치적 삶’의 중요성이 부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훌륭한 삶의 전형으로 생각한 ‘훌륭한 시민의 이상’은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하다. 시민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사안들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주주의적 자치의 이상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물질적 풍요나 소소하고 안일한 쾌락만을 추구하거나, 시장의 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거의 맹목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적인 생활에 대해 아테네 시민들이 부여한 중요성은 커다란 귀감이 될만한 것이다. 시장의 무차별적 논리가 판을 치는 오늘날에도 시장의 가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가치와 민주적 시민의 덕성도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우리들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 나종석 연세대 철학연구소 전임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