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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노동자들의 우등불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인천, 노동자 그리고‘인간 문제’
 
1934년에 발표된 강경애의 소설『인간문제』의 배경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관문 인천이다. 여주인공 선비는 살인적인 노조 탄압의 대명사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의 여공으로 공장 내 조직 활동에 관여한다. 부두노동자 첫째는 경성제국 대학생 신철을 만나 의식화되고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선비가 폐병으로 죽고 신철마저 전향하자 첫째는,‘ 인간 문제는 노동자 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개항 이후 인천은 일제의 군수품 조달 기지이자 수탈항으로서 근대적 자본과 노동자의 대립이 격심한 곳이었다. 서울과 가깝고 국제항까지 갖춘 덕에 대규모 공장들도 많았다. 1960~70년대, 한국경제의 폭발적인 성장은‘공순이’,‘ 공돌이’라는 멸시 속에서 죽음 같은 노동을 감당했던 무수한 산업역군들을 거대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인천에는 신철과 첫째, 선비처럼‘인간 문제’를 끌어안고 고뇌하고 투쟁하는 이들이 몰려들었고 충돌은 불가피 했다.
방현석의『새벽출정』, 정화진의『쇳물처럼』같은 노동소설의 주된 배경이 었던 노동자 도시한때‘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리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을 불사른 도시, 민주화운동 세력이 1980년 5월항쟁의 좌절을 극복하고 최초로 봉기했던 5·3항쟁의 도시…….인천에는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가 있었고 그들 곁에는 인천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다.
 
화수동 183번지
 
인천시 동구 화수동 183번지. 미국의 선교사 조지 오글(79세)이 인천에 정착한 1961년 이 후 40여 년 동안 이 지역 주민들과 고락을 같이 해 온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 산선)의 주소다. 최근에 살구색으로 깔끔하게 리모델링했지만, 지하 1층 지상 2층의 육중한 몸체는 1970년대 건축된 그대로다. 1층 벽면 게시판에 붙은 사진에서 인천 산선의 반세기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1960년대 초반의 초가집 시절부터 70년대 초반까지의 단층 슬라브 건물 시절, 상근 활동가 5명에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일하는 큰 조직으로 성장한 1970년대 이후의 현대식 벽돌건물 시절…….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화수동 일대는 인천을 대표하는 구 도심권이었다. 인천 산선을 끼고 쭉 뻗은 도로를 따라가면 화수부두가 나온다. 80년대 초만 해도 이곳은 50여 톤 이상의 어선이 드나드는 인천시 제 2의 어항이었다. 주변에 인천중공업 등 대규모 공장들도 많아서 당시 이곳은 지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신학생 시절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이 지역주민 대부분이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이 앞 골목길은 화수부두와 서울을 잇는 중요한 도로였어요. 행인이 얼마나 많은지 길을 걷다 어깨가 막 부딪칠 정도였어요. 그땐 참 이게 큰길로 기억됐는데…….”
인천 산선 8대 총무 김도진 목사(50세)의 말이다. 조지 오글이 이런 곳을 산업선교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은‘노동목회’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곳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인천 지역 목사들을 만났다. 전쟁 이후 외국 선교단체의 물질적 후원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던 한국 목사들은 그가‘노동목회’를 위해 자금을 모아달라고 요청하자 몹시 놀랐다. 그는 부지런히 노동자들을 찾아다녔고 얼마 뒤 인천에 도시산업선교회가 탄생했다.
한국에‘산업전도’가 시작된 것은 1957년 예수교장로회(통합)가 전도부에 산업전도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다. 친족관계로 얽힌 농촌사회 전도에 어려움을 느끼던 개신교 각 교단은 급증하는 산업 인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해 초기 개신교의‘산업전도’란 이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새로운 선교 영역이었으며, 개인 구원에 역점을 두는‘복음전도’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감리교의 인천 산선은 처음부터 노동목회를 목표로 삼았다. 노동목회를 할 목사는 기본적으로 남자는 1년, 여자는 6개월의 공장생활을 거쳐야 했다. 초대 총무 조승혁 목사(73세)는 대성제재소에 들어가 나무를 나르고 무거운 합판을 트럭과 유개차에 실었다, 2대 총무 조화순 목사(74세)도 동일방직에서 소녀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멸시받고 천대받으면서 지옥 같은 노동을 감당했다.
 
 
흩어지는 교회
 
 
“조지 오글 목사는‘교회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디아스포라. 흩어지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거야. 예수께서 이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듯이 지금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현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거였어. 그게 교회라는 거야.”
2대 총무 조화순 목사의 말이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들의 신념은 1969년 9월, 조승혁 목사가 월간『기독교사상』에 기고한 글에서도 발견된다.
 
‘교회는 건물 중심에서 벗어나 일하는 세계와 근로자를 교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인천 산선 실무자들은 지역주민과 노동자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지 않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1962년 한국 최초의 공부방인 민들레공부방을 만들었고, 지역민의 경제적 자립과 자조를 위해‘신용협동조합’을 운영하였으며, 무료진료사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일련의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그것은‘무지한 노동자’들을 강의실에 앉혀놓고 지식을 주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평적인 토론과 학습이었다. 이를 위해 평신도 중에서 제강·기계·전기제품제조·유리·철도·통신·교통·방직공장에서 각각 1명씩 총 12명이 선발되었다. 이‘12사도’는 주말마다 함께 숙식하면서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공장에 부당해고나 부당노동행위가 횡행하는데‘왜 노조는 이들을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에는 노조가 있었지만 노조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다.
 
 
“‘카플링(동력을 전달하는 기계장치) 모임이라고 했어. 서로 연결된다는 뜻이에요. 6개월 동안 교수, 학자, 신학자들을 초청해서 각각의 공장 사례도 발표하고 밤새 토론하며 공부를 해. 6개월 과정을 끝내면 감리교 감독이 와서 안수를 하고 각자의 공장에 파송을 했어. 똑같은 공장이라도 돈 벌러 다니던 6개월 전과는 완전히 의미가 다른 거야. 이 12사도들이 뭘 했는지 알아· 공장 노조를 바꾸거나 스스로 지부장이 된 거야.”(조화순)
12사도가 노조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노조를 위한 노동교육프로그램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인천 산선은 금속·방직·군속(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철도 및 운송·전기·항만·자동차 관련 노조와 함께 정기 노동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이 프로그램의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강대·고려대 같은 대학들도 노동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지 오글과 두‘조 목사’의 참여를 요청했다.
“노동자 교육은 여기 따라올 데가 없었어. 공장 경영을 분석할 정도로 전문적으로 했으니까. 인천에 안 오면 노동운동 하는 축에 끼지 못할 정도로 여기가 노동운동의 중심지였어. 동일방직 사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았다고, 김근태, 최영희 뭐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잖아. 하여간 인천 노동자들이 제일 셌어요.”(조화순)
 
‘어두운 시대,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70~80년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의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한 치열한 대답처럼 보인다. 유신 선포 이후 한국노총은 어용화되었고 노조의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산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던 노조들은 더 이상 경찰의 감시와 협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인천 산선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한 소모임 활동이었다. ‘소수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종래의 교육은 기층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의식화 활동으로 변모하였다. 그 중 조화순 목사가 관여한 동일방직 소모임 활동은 눈부신 성과를 가져왔다.
1972년 동일방직 대의원 40명 가운데 25명이 산선 회원이었고 이들은‘최초의 여성지 부장 탄생’,‘ 집행부 18명 전원 여성’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만들어냈다. 인천 산선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1972년 7월 조승혁 목사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고 1974년엔 조화순 목사가 구속되었다. 그리고 1974년 말, 조지 오글이 마침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인천 산선은 동일방직·삼성산업·반도상사·태양공업·삼원섬유·신한일전기 등의 노동자들에게 내민 연대와 지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산선을 용공불순세력으로 매도하는‘반산선 공세’가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산업선교 는 무엇을 노리나』같은 책자가 대량 배포되었고‘도산이 침투하면 회사가 도산한다.’, ‘때려잡자, 조화순’같은 원색적인 구호가 난무했다. 1978년에 벌어진‘똥물사건’은 정부·중앙정보부·회사·섬유노조가 공동으로 일으킨 것으로‘반산선 공세’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전두환 신군부는 산선에 대한 매도와 탄압에서 박정희 정권을 능가했다. 1980년 5월 17일 새벽, 조화순 목사는 안기부에 끌려간 지 75일 만에 겨우 햇빛을 보게 됐다. 인천 산선은‘제 3자 개입금지’라는 세계 입법사상 유례없는 노동관계법 개악을 강행했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지역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에게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재개발에 몰린 노동선교 현장
 

1980년대 중후반부터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인천 산선은 자신의 역할을 노조와 다른 노동단체에 내주게 되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인천 산선은 초기의 직접적인 노동운동 지원에서 일꾼역사교실 같은 노동자 문화사업으로 그리고 현재의 지역사회 복지사업으로 세 번의 변화를 거칩니다. 그러나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봅니다.”(김도진)
인천 산선은 1995년 감리교 사회복지선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옛날‘빨갱이교회’로 유명했던‘일꾼교회’도 이제‘미문의 일꾼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출석 성도의 80%가 장애우인 일꾼교회는 먹거리 나눔운동인 푸드뱅크사업 등 소외된 지역민과 장애우를 위한 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가 그 옛날 노동자들이 3~40명씩 먹고 자고 했다는 곳입니다.” 산업선교회 건물 이곳저곳을 보여주던 김도진 목사가 취재진을 지하실로 이끌었다. 주방시설을 갖춘 확 트인 지하공간은 한 50명은 너끈히 잘 수 있을 것처럼 넓어보였다.
동일방직의 해고자들도, 카플링 모임의 12사도들도 이곳에서 울고 웃고 했을 것이다.
“참 아쉬운 것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인 이 유서 깊은 건물이 재개발로 헐릴 위기에 놓였다는 겁니다.”(김도진)
화수부두가 포구 기능을 상실하고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낡은 집과 노인들만 남은 화수동은 이제 택시 기사도 모르는 곳으로 전락하여 재개발을 기다리는 쓸쓸한 처지가 됐다. 반세기 동안 화수동 187번지를 지켜온 인천 산선도 세태를 따라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인지, 김도진 목사의 고민이 깊다.
“산선 인천지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라 할 이 교회 건물이 민주화 기념지로 남겨져 학생들의 방문교육 현장으로 쓰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글.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 저서로는『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 『김진수』, 『최종길』, 『한일회담 반대운동』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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