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프랑스혁명이 근대의 여명기에 일어난 어느 시민혁명보다도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랑스혁명이 근대의 길목에서 일어난 그 어떤 혁명들 보다도 자유,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은 오늘날의 근대 민주주의가 비로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다수의 참여를 통한 다수의 판단이 소수 귀족이나 절대군주에 의한 판단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증하게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낡은 지배의 전통은 깨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혁명에 참가한 하층계급들의 모습이 미화될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때로 무분별하고 잔인한 폭력의 행사, 종교와 도덕을 차갑게 멸시하는 반인륜적 범죄 집단과도 같이 보이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세력들에게 항상 극도의 경계대상이었고 가혹한 징벌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혁명과정에서 반동의 물결의 흐름을 결정한 것도 다름 아닌 민중의 무리였다. 그랬기 때문에 지배세력들도 이제는 민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으며 지배 원리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만 했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는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이라 불리는 특권적 지배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왕정과 소수의 성직자 그리고 귀족이 거대한 특권을 매개로 결탁한 체제였다. 절대왕정은 한 때 유럽에서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전쟁의 수행과 궁중 사치 그리고 특권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민생고와 재정 위기, 사회 불평등 심화라는 현상을 점차 고착화시켰다.
프랑스혁명은 루이 14세 이래 각종 전쟁의 수행으로 깊어지기 시작한 재정난을 타개하고 새로운 조세 수입원을 찾기 위해 1789년 5월 국왕이 소집한 삼부회가 발단이 되었다. 삼부회의 소집은 당시 불만이 팽배해 있던 부르주아지계급으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도록 물꼬를 터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삼부회 의원들은 의회에서 신분적 특권을 없앤 개인별 투표 방식 채택을 요구하고 그 외에도 성직자와 귀족의 면세특권 철폐, 명문헌법의 제정에 의dd한 자의적 체포 금지,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국왕과 귀족들에 맞서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에 국왕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하층계급의 봉기가 없었다면 혁명은 아마 여기에서 중단되었을 것이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여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중심으로 부르주아지들이 주도하던 혁명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저항이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문제와 같은 민중들의 사회적요구가 개진되기 시작하였다. 부르주아지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했지만 왕정 음모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동원을 불가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은 여기서그치지 않고 농민혁명으로 확산되었다. 흉작과 무거운 세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영주의저택을 습격하여 봉건문서를 불태우고 고리대 상인들과 관리들을 습격하기도 했다.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선언했고 이어‘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 입각하여 국민의회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국민의회는 교회재산 몰수, 길드 폐지, 행정과 사법제도 정비 등을 단행했고 1791년 9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791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국민의회 내부에는 귀족의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는 파에서부터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급진적 공화정을 주장하는 미라보,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등의 다양한 정치적 색조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791년헌법은 권력분립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규정했다. 여기에서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시민들에게 만참정권을부여했고새롭게구성할입법의회를간접선거로구성하기로결정했다.
자국으로 혁명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 한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군주는 1791년 말 혁명을 분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패전을 거듭했다. 파리는 반혁명군의 일촉즉발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의 혁명적 열정이 폭발했다. 7월 11일에는‘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발표를 듣고 전국 각지에서 의용군이 몰려들었다.
마침내 민중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힘입어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혁명적 열정의 폭발은 급진파의 득세를 가져왔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과 같은 자코뱅파 인사들이 부상했다. 8월 10일 파리 민중들은 왕궁을 습격했고 의회는 왕권의 행사를 정지시키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로운 의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입법의회를 대신하여 국민공회가 출범하였다. 민중들의 정치적 동원이 시작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제 1공화정이 시작되었다.
로베스 피에르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국이 안정되면서 공포정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국내외 정세의 안정은 공포정치의 정당성을 약화시켰고 공포정치의 지속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정부 주도자들과 민중운동의 유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틈을 타서 1794년 7월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을 체포하여 처형시켰다.
부르주아지공화정 수립과 좌우로부터의 도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총재정부는 혁명파와 반혁명파 양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식량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민중의 저항운동이 재개되고 이와 결합한 산악파 잔여세력이 국민공회 의사당에 침입하여 국민공회가 이들을 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속적인 대외전쟁으로 인해 경제난과 재정난이 가중되고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 사회불안은 계속되었다.
1797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전쟁의 지속은 프랑스 사회에서 군대의 지위를 크게 강화시켰다. 전쟁이 체제를 먹여 살렸고 그와 함께 군대는 공민정신에 투철한 혁명군에서 장군을 추종하는 정복군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보나파르트 독재와 프랑스혁명의 전파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보나파르트는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집정정부를 수립했다. 보나파르트는 비록 보수파 세력과 협력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한 후 프랑스혁명의 성과들을 제도화하는 여러 조치들을 단행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하고 경제적으로도 프랑스은행을 설립, 관세제도를 개혁하였다. 또 나폴레옹법전을 편찬하여 사유재산권 보장, 신앙의 자유, 노동과 계약의 자유 등을 명시한 새로운 시민 사회의 원리를 법적으로 성문화함으로써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고자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정신을 전 유럽에 전파하였으며 당시 싹트고 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더욱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1802년 종신집정으로 취임하고 1804년에는 국민투표로 제정을 수립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황제 즉위 후에도 그는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계속하였으며 한 때는 7왕국, 30공국을 지배하는 유럽의 제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들에 대한 대륙봉쇄령의 무리한 강요와 프랑스 압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각 나라에서 일어나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주의혁명의 가장 철저한 수준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이라고 불리는‘자유, 평등, 우애’라는 슬로건에서도 나타나듯이 프랑스혁명은 경제적 개인주의에 주로 편중되어 있던 종래의 자유 이념을 평등, 우애의 이념과 결합시켜 훨씬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만들어 내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은‘인권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신체, 의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인민주권의 원칙(선언 제3조), 모든 공직의 선거(선언 제6조), 권력분립에 입각한 대의제(선언 제16조)와 같은 폭넓은 정치적 권리를 천명하였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은 평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인권선언은 제 1조에서“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인간의 자유는 개인적 자유와 함께 평등에 의해서 보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글/고원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