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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광대들이 풀어 놓는 오월정신 극단 토박이

 
 
산이며 들이며 지천에 꽃무더기가 마음을 흩뜨린다. 사람들이 이 화창한 봄날에 꽃놀이를 즐기는 이유를 알겠다. 기후 변화로 매년 남도부터 올라오는 꽃소식이 5월이란 달의 상징을 희미하게 하지만 그래도 5월은 꽃의 계절이다. 광주에도 배꽃이며 유채꽃, 벚꽃이 한창이다.
햇볕에 등이 따가워 게슴츠레 눈을 뜨고 보니 사진 속에 자주 등장하는 구 전남도청 앞 분수대가 보인다. 5월의 광주, 광주의 5월, 그 오월정신을 지키고 있는 극단이 있다. 극단이 있는 광주 시내 예술의 거리는 서울 인사동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서울 청계천 르미에르 거리를 본 딴 듯 한 장식은 눈에 거슬린다. 오히려 어색하단 생각에 차라리 없었으면 더 낫겠다 싶다.
 
박효선을 기억하다
“극단은 돌아가신 박효선 선배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저희는 그저 그분이 하시던 대로 아니 그분이 하시던 거 다 못 따라 가지만 그래도 정신만은 놓치지 않으려는 겁니다.” 지난 1987년, <토박이>에 들어 온 이후 줄곧 극단을 지키며 연극인으로서 활동하는 임해정(43) 대표는 전남대 연극 동아리 선배였던 박효선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그 대를 이어 오고 있다. 박효선이란 인물을 어찌 부를까, 연극인? 문예 활동가? 연극연출가? 극작가? 아니다.
 

 
그를 가장 적절히 표현한 단어는‘오월광대’였다. “박효선 선배는 학교 때부터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하다 졸업 후에는 <광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한씨연대기> 공연을 준비하는 중이었어요. 그런 중에 5월항쟁이 일어났고 당시 대책위원회 홍보부장을 했으니까 현장에서 겪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연극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죠.”
임해정 대표는 그런 선배가 만든 <금희의 오월>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주저하지 않고 연극을 하겠노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을 만큼 커 버린 지금까지.
<금희의 오월>은 항쟁 당시 계엄군 총에 맞아 사망한 전남대 재학생 이정연의 여동생 금희의 눈을 통해 본 광주의 실상을 그렸다. 이것은 5?18항쟁이 연극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금희의 오월>은 각 대학에 공연이 되었고 많은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오월광대 박효선이 만들어 놓은 극단 <토박이>가 또다시 5월을 맞았다.
“28년이란 시간이 새삼스럽진 않지만 늘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번 5월에 올리는 연극은 <상중>이란 작품이에요. 1980년 당시 행방불명이 된 사람의 가족 이야기인데 묘역에 가도 행방불명자 묘역이 따로 되어 있잖아요. 지금 까지도 3~40명 정도가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어 있어서 아무런 보상이나 혜택도 못 받았죠. 보상이나 혜택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가족이 이후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중과 소통하는 연극
 
 
대도시에 있는 극단도 형편이 어려워 문을 닫는 판에 지역에서 이리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는‘광주’라는 지역이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어 보이지만자칫‘5월’에 갇혀 지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토박이>는 대중과의 소통을 연극이란 매체로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 전달이 가장 중요 하다고 보는 거예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연극도 가르치고 관객들과 함께하는 가족극 같은 것을 해요. 예를 들어‘환경’이란 주제를 놓고 연극을 하면 다양한 공감대가 형성되거든요. 공해, 음식물 쓰레기, 자연을 무너뜨리는 무분별한 파괴, 이런 소재들은 아이와 부모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어요.
뿌리를 찾자면 결국 저희가 하는 연극의 근간은 오월정신이죠. 지금 시대에 벌어지는 문제들이 결코 오월과 무관한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려고 직접 대본도 쓰고 관객들을 찾아가는 공연을 하고 그러는 거죠.”
임해정 대표, 단원 송은정 씨, 박정운 씨 모두 직접 대본을 쓰고 출연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극단 1기 공채이기도 한 송은정(43살) 씨는 임해정 대표와 함께 1987년부터 꾸준히 극단을 지키고 있다. 그는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대학생활 내내 쉽사리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없어 방황을 했고 그런 모습을 본 친언니가 연극을 소개하면서 극단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횟수로 21년이죠. 한 직장을 다니거나 한 가지에 빠져 무슨 일을 해도 20년이라는 숫자가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연극을 그만두려고 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대학 졸업하고 한 1년 정도는 돈만 벌겠다고 직장을 다니기도 했죠. 그런데 다시 이 무대로 돌아오게 되더라구요. 객관적으로 제 자신을 봤을 때 재능이 있거나 예술적인 끼가 있다거나 하진 않아요. 원래 글을 쓰고 싶었 고 내가 겪은 5월이 전부가 아니구나, 뭐 그런 마음인 거죠. 물론 저도 박효선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오월광대들의 오월정신
 

임해정(왼쪽) 대표와 송은정(오른쪽) 씨는 무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토박이>만을 위한 독립적 공간의 극장이 있었으면 소원이라고, 그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니, 가장 큰 소원은 <토박이>를 이어 갈 후배들 이 생겨 계속 지역에서 극단을 유지해주는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28년이란 시간이 새삼스럽진 않지만 늘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번 5월에 올리는 연극은 <상중>이란 작품이에요. 1980년 당시 행방불명이 된 사람의 가족 이야기인데 묘역에 가도 행방불명자 묘역이 따로 되어 있잖아요. 지금까지도 3~40명 정도가 행방불명자로 처리되어 있어서 아무런 보상이나 혜택도 못 받았죠. 보상이나 혜택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가족이 이후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년에 2~3편 이들은 이제까지 <금희의 오월>, <청실홍실>, <모란꽃>, <잠행>,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토박이>는 창작 작품만을 무대에 올리는 극단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단원들 모두가 대본을 창작하는 작가들이라니, 작가주의 감독은 들어봤
어도 작가주의 배우는 못 들어봤으니 지금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공연을하는민들레소극장은<토박이>의독립적공간은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쓸 수 있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 한때는 형편이어려워지역의문을닫아야했던 적이있었기때문이다. 민들레소극장은 여느 소극장처럼 연극에 사용되는 간단한배경과음향장비, 조명, 빽빽이앉으면 5~6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의 객석이 보인다. 한쪽에는 지난번 무대에 사용했을법한 소품인 곰방대와 장구가 가지런히놓여있다.
임해정 대표와 송은정 씨는 무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토박이>만을 위한 독립적 공간의 극장이 있었으면 소원이라고, 그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아니, 가장 큰 소원은 <토박이>를 이어 갈 후배들이 생겨 계속 지역에서 극단을 유지해주는 것이라고 말을 바꿨다. 후배들이
극단을 이어가는 일은 희망이고 오월광대들의 오월정신 아니겠냐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광주는 온 도시가 1980년의 기억들을 토해낼 것이다. 그 중에 오월광대들의 한판 무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간 오월광대 박효선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으니 말이다.

 

 

 글·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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