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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회적 대화 발전과 민주주의

세계의 민주주의

프랑스의 사회적 대화 발전과 민주주의

  손영우 서울시립대학교 EU센터 연구원 / son2000@daum.net

사회적 대화는 민주주의의 일부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대표는 지역대표와 직업직능대표로 구성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정책결정 과정에 지역대표를 중심에 두고 직업직능대표들이 정책에 대한 자문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비례대표 같은 방식을 통해 직업직능대표들이 직접 결정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직업직능대표가 소홀히 다뤄져 왔고 지역대표가 강조되어 지역감정이 증폭되었다는 진단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제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평가도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한 국가에서 집단적 교섭제도의 발전 여부는 그 사회의 불평등 정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계약관계는 고용주는 높은 수익, 노동자는 생존 임금을 위해 협상한다는 속성상 평등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노동자의 권익보장을 위해 그들의 단체 활동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노동법을 통해 제도화해왔다. 하지만 여러 특수한 사정과 역사적 조건으로 집단적 교섭제도가 발달하지 않아 직업관계가 온전히 개인들 간의 관계, 즉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계약관계에만 맡겨져 있으면 불평등 정도가 심화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는 노사정 간의 전국 혹은 지역의 집단적 교섭을 포함한 다양한 토론을 일컫는 말이자, 직업직능대표들이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민주주의가 시민들 스스로의 통치라고 한다면, 사회적 대화의 민주적 성격은 직업세계의 문제점에 대해 당사자들이 대표되어 그 개선에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 위 프랑스 국기
아래 노동법 개정 반대 시위 때문에 문 닫은 에펠탑 ©연합뉴스

사회적 대화의 불모지에서 새로운 모델 국가로
프랑스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유럽에서 사회적 대화의 불모지였다. 무엇보다 조건이 어려웠다. 노조가입률이 10% 안팎으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주체의 대표성이 낮았으며, 이 또한 5개의 전국노조연맹으로 파편화된 상황이었다. 더욱이 사회적 대화 자체에 원칙적으로 소극적이었던 공산주의적 성향의 노동총연맹이 가장 큰 노조연맹이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사회적 대화 시도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 퇴직연금제도 개정, 2005년 청년고용제도 개정 등 경제적 어려움이나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시도가 노조와 시민사회의 완강한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면서, 정부는 사회적 대화 없이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적 대화 발전과 제도 개선에 나선다.

먼저 대통령이 나섰다. 2006년 10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경제사회위원회 연설을 통해, “노동법에 관한 모든 입법계획안은 사회적 파트너의 자문을 거친 후 의회에 제출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2008년 1월 프랑스의 노동법 제1조에 “정부가 진행 중인 집단적 개인적 노동관계, 고용, 직업훈련에 관한 모든 개정 계획은 노·사 단체와 사전 협의의 대상이다.”라는 문구가 명시됐다. 이제 정부는 노동에 관한 법률 개정 사안에서 의회 논의 이전에 반드시 노사 간의 협의를 사전에 거칠 것을 의무화했다. 사회적 대화가 민주주의 입법과정에서 하나의 정치과정으로 제도화됐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낮은 노·사의 대표성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08년엔 노사협의회 선거결과를 핵심기준으로 하는 노조 대표성 제도를 개혁하고, 2014년엔 단체 가입 기업 수와 단체 가입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 수를 주요 기준으로 하는 사용자단체 대표성 제도를 정비했다.


✽ 위 노동법 개정안 저지 시위
아래 49.3스캔들-프랑스 헌법 제49 조 3항을 적용해 ‘쉬운 해고법’을
의회 표결 없이 통과시킨 것에 대한 반대 시위 ©연합뉴스

사회적 대화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과정이어야
뒤이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2012년 6월 경제사회환경위원회 연설에서 “사회적 대화는 예외적 순간을 위한 것도, 시위가 있을 때 하는 대응도, 특정 환경에서 소집된 노사대표를 위한 것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과정이어야 한다.”며 사회적 대화를 헌법에 명시할 것을 제안한다. 이처럼 사회적 대화 발전을 위한 노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지난 10년간 프랑스에서 꾸준하고도 과감하게 이루어졌다.

2017년 5월 정치적 격변 속에 많은 주목을 받으며 당선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선거기간에 공약했던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임명된 지 7일 만에 직접 나서서 노조대표들을 엘리제궁으로 초청하여 노동법에 대해 협의했다. 이후 주제별로 수십 차례에 걸친 3개월 동안의 사회적 대화 결과, 노동법 개정안에 3개의 모든 사용자단체 대표들이 찬성했으며, 5개 중 4개의 노조연맹이 ‘반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18년에도 건강보험, 실업보험, 연금제도 등 여러 사회보장제도 변경과 관련해서 사회적 대화가 예정돼 있다. 물론 사회적 대화의 모든 내용이 사회적 파트너들을 만족시킨 것은 아니며, 현재도 일부 노조에선 노동법 개정 반대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프랑스 정부의 노력을 통해 두 가지는 분명해졌다. 하나는 민주적 과정으로서 사회적 대화의 제도적 정착이다. 일부 정치세력이나 정부의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차용되는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 노동 입법과정의 일부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방법으로서 사회적 대화의 민주적 유효성이다. 물론 여러 사회적 주체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큰 범위의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상당히 한계가 있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논의과정 속에서 사회적 제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는 점(개방성)과 그 과정에서 주체들이 변화의 내용을 인식함으로써 향후 집행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장점을 지닌다.


✽ 노사대표를 엘리제궁에 초대한 마크롱 대통령 ©연합뉴스

노동존중사회 실현은 사회적 대화를 필요로 해
87년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항상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연구가 있다. 1998년 노사정 합의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일부에선 합의의 최대 수혜자는 정부, 최대 피해자는 노동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후 파견·하청근로가 확대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이 확산되고 양극화가 심각해진 상황과 그에 따라 계약관계 내 부당행위, 이른바 ‘갑질’이 근절되지 않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정부는 노동존중사회 실현을 자신의 기치로 내걸었다. 그리고 그 실현 방법으로 노동계가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그간 소외되었던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청년노동자, 그리고 불공정한 공급사슬에서 힘들어했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대화를 위한 토대는 매우 빈약하다. 90%에 달하는 사업장에는 여전히 노조가 없으며, 산별수준에서도 다수의 산업에서 사용자단체가 결성되지 않아 실질적인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도 없는 상황이다. 사업장에서, 산업에서, 전국·전 산업에 걸친 장기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계획되고 전개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을 위한 한시적 도구나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목적이 되어가고 있듯이, 프랑스의 사례는 사회적 대화 역시 하나의 민주주의 과정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직업직능대표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가 특정세력의 한시적 전략이나 입법통과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민주주의의 확대 과정으로서, 하나의 정책결정과정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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