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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의 위기- 1차 세계대전 이후

 
1차 세계대전 이후
 
 

왜 민주주의의 위기가 일어났는가?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민주주의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마치 18세기 말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하자 전 유럽에 민족주의가 확산된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민주주의의 물결이 전 유럽을 흔들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토만 제국은 전쟁에서 패배 하자 완전히 해체되었다. 핀란드, 스웨덴에서도 권위주의적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등장하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격랑 속에서 거센 혁명운동이 전제의 지배에 맞서 싸웠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의 차르 체제가 타도되고 1918년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나 독일제국이 무너졌다.
전후 유럽의 민주주의는 1919년 승전국들이 주도하여 만든 베르사유 조약을 그대로 따랐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민족자결’의 원칙은 새로운 국가의 경계를 설정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자 시민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권이 확산되었다. 재산을 가진 남자만 가질 수 있는 투표권은 모든 나라의 여성과 빈곤층에게도 확산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유럽 모든 국가에서‘국민주권’과‘인민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잇달아 출현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유럽에서 완전하게 승리를 거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을 보면 유럽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민주정부가 차례로 붕괴되면서 영국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의 민주정부가 독재정부와 군사정부로 교체되었다. 민주정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의 경멸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중부 유럽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함께 지중해 연안 국가인 그리스, 이탈리아, 에스파냐, 헝가리에서 민주정부는 모두 권위주의 정부로 교체되었다.
왜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정부가 국민적 주권을 가진 국가를 수립하고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수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급속하게 약화되었는가? 1919~39년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유럽에서 매우 복잡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다양한 구조적 조건과 우연한 계기의 결합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민주정부의 위기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로 주로 전후 처리의 후유증, 경제위기의 충격, 사회계급의 분열을 지적할 수 있다.

 
전후 처리의 후유증
 

11차 세계대전은 매우 모순적인 정치적 유산을 물려주었다. 낡은 왕조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 반면에, 미성숙한 민주정부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으로서 엄청난 배상금의 부담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심각한 정치적 어려움이 되었다.
전후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1919~33)이라 불리는 민주적 정부를 수립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비용에 불만을 가졌다. 더 큰 문제는 전쟁 후유증으로 수백만 명의 미망인, 고아, 부상자들이 생겨나 이들을 돌봐야 하는 재정 부담이 급증한 점이었다.
더욱이 정부의 지원을 받은 대다수의 미망인, 군인, 부상자들은 충분하지 못한 보상으로 불만을 가졌다.
그러자 좌파와 우파의 선동이 거세지면서 수많은 대중은 공산당과 나치당(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을 선택했다. 민주정부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이탈리아는 전승국이었지만, 전후 처리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전쟁이 끝난 후 퇴역한 군인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왜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정부가 국민적 주권을 가진 국가를 수립하고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수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급속하게 약화되었는가?
1919~39년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유럽에서 매우 복잡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다양한 구조적 조건과 우연한 계기의 결합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민주정부의 위기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로 주로 전후 처리의 후유증, 경제위기의 충격, 사회계급의 분열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에 복귀하여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일부는 제대를 거부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탈리아의 극우 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퇴역군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전쟁의 참호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가슴 속에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득차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기만 원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파괴이었다. 공장과 주택은 무너지고 식량 공급도 매우 어려웠던 전쟁 시기의 상황이 계속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제 막 출범한 민주정부가 해결하기에는 힘든 문제였다.
 
경제위기의 충격
 
경제위기는 민주정부의 심각한 위기를 만들 수 있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전후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는 특히 심각했다. 1914년 미국 달러 대 독일 마르크화의 비율은 1:4.2이었으나 1923년 1:4,200,000,000,000까지 폭등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커다란 가방이나 빨래 바구니에 돈을 담아가야만 했다. 가공할 인플레이션 때문에 독일은 심각한 불안에 빠졌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식량 폭동, 반유대인 감정의 폭발, 유대인 상점에 대한 공격, 정치적 폭력, 범죄의 엄청난 증가가 일어났다. 이는 문명사회가 퇴조한 명백한 징후의 모습이었다.
독일 민주주의에 결정적인 강타를 가한 것은 1929년 미국 주식시장의 폭락 이후 일어난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이었다. 그러면 왜 1920년대에는 경제위기에 직면하면서도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지되었던데 비해, 1930년대의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독일 민주주의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는가? 이는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20년대 독일 중간계급의 지지를 받는 정당들과 보수적 정당(독일국민당)이 분열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사회민주당 등 좌파 정당들과 바이마르 공화국에 참여한 정당들도 대개 인기가 없었다. 그러자 원래 주변에 고립되었던 우익세력 나치당이 점점 지지층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나치당의 급속한 성장은 독일 민주주의의 결정적 위협이 되었다.
독일의 사례를 보면 경제위기가 민주정부의 위기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경제위기가 반드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고 민주정부를 약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경제위기가 반드시 민주정부를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미국과 영국의 사례에서 잘 나타난다.
에스파냐의 경우에서는 오히려 경제위기 이후 1931년‘2공화국’이 수립되어 처음으로 민주정부가 등장하였다. 이후 1936년 에스파냐 내전이 발생하면서 에스파냐 민주주의는 결국 붕괴했지만, 경제위기가 곧 바로 민주정부를 붕괴시킨 것은 아니었다.
 
사회계급의 분열
 
 
경제상황의 악화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킨 것처럼 사회경제적 분열도 민주정부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양차 대전 사이 시기에 유럽의 사회, 정치적 분열은 극도의 상황에 달했다. 노동조합가입률은 급속도로 높아졌고, 노사간 단체협상의 숫자도 증가했고, 파업이 발생한 수도 늘어났다. 하지만 전후 좌파세력의 전투성이 강화되고 노사분규가 많아졌다고 해서 민주정부가 반드시 약화될만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20년 전투적인 좌파의 공세 속에서도 유지되었다. 오히려 경제 불황으로 40퍼센트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고 10퍼센트의 노동자들이 시간제 노동자가 되어 사실상 노동자 조직이 거의 파괴되었던 시기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졌다.
 
1932년 총선에서 독일공산당은 거의 6백만 명의 유권자 지지를 받자 많은 중간계급들이 놀랐다. 그러나 극단적인 좌파세력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폭력으로 전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계급정치가 격화되면 민주정부가 약화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양차 대전사이 시기에는 오히려 계급정치가 없어서 민주정부가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 후 노동조합의 전투성이 격화되고 계급갈등이 심각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대중운동은 계급의 분열을 일절 부정하는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민족사회주의(나치즘)이었다. 파시스트와 나치 체제는 계급 분열을 초월한‘국민’이라는 공동체를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적 정치세력은 그들의 계급적 토대를 초월하지 못했고 파시즘과 나치즘의 등장에 맞서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제대로 규합하지도 못했다
 
민주주의를 계속 유지한 나라들
 
1919~39년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시기에 민주정부의 붕괴가 잇달아 발생했지만, 반드시 모든 나라에서 똑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국가(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스칸디나비아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와 함께 미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이 모두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과 미국의 지배계급과 정치체제의 정당성은 강화되었다. 스웨덴은 양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켜 전쟁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
또한 영국과 미국이 놀라울 정도로 오랫동안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영국과 미국에서 의회와 민주적 정치제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수십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정치는 당연히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고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체제를 없애버린 데 비해, 영국과 미국에서 의회와 헌법을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행동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영국과 미국의 주요 정당들은 각각 유권자의 지지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유권자를 의회와 민주정치의 틀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프랑스도 오랫동안 공화주의 정부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독일보다 훨씬 큰 대중적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민주정부의 지도자들은 경제위기와 계급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통합을 호소했다.
1933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금융 중개인들은 우리 문명이 만든 사원의 높은 자리로 피신했다. 우리의 문명을 복구하기 위해서 금전적 이윤보다 더 고귀한 사회적 가치를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뉴딜’정책을 통해 경제정책에 개입하고 빈곤층을 위한 복지제도를 확대하면서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했다. 스웨덴에서도 의회 민주주의는 사회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38년 스웨덴 사회민주당은‘살트세바덴 협약’을 체결하여 노사간의 역사적인 타협을 주도했다. 노동조합은 경제성장 을 위해 기업이 요구하는 생산 합리화를 수용하고, 기업은 사회복지를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기로 했다.
1930년대 다양한 나라의 경험을 살펴보면, 민주적 정치제제를 유지할 가능성은 국가기구와 정치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 경제성장과 안정,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능력, 다양한 사회세력의 균형을 통한 정치적 안정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가 붕괴한 이유로는 패전, 경제위기, 사회적 분열, 민족적 갈등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위에서 지적한 모든 요소들의 복잡한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민주정부의 정당성을 약화시켰지만, 이러한 변화는 국가들마다 다양한 경로를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민주정부가 붕괴한 후유증은 너무 심각했다. 그 후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한 판 승부가 필요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글 김윤태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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