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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과 트라우마

국가폭력과 트라우마

 
 
역사의 경험을 다루는 데는 기억의 해법과 망각의 해법이 있다. 기억의 해법은 그 사건을 촉발시킨 상황과 그 정 신을 철저히 기억함으로써 이 같은 비극의 재발을 막자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망각의 해법은 과거는 단지 과거지사이므로 잊어버리고 미래에 매진하자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해법은 망각의 해법이 아니라 기억의 해법이어야 한다. 인간이역사를발전시킬수있는능력은역사를기 하고성찰하여교훈을얻는능력에달려있다. 망각의 해법이 아닌 기억의 해법만이그존재의미가있는것이다.
현대사에 묻힌 국가폭력

우리 근현대사는 식민지 지배, 전쟁, 분단 그리고 독재라는 뼈아픈 상처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시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몇 번의 시도조차 실패로 끝났다. 지난날의 과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으며, 실수는 바로 잡으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이를 은폐 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에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과거란 덮어 버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청산할 수 없다. 미래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현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잘못된 과거가 만들어 놓은 뒤틀린 매듭을 올바로 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앞을 향해 나가려고 해도 매듭은 욱 꼬이 게 마련이다.한국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은 한국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군사정권에서도 이루어 졌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로 두드러졌던 국가폭력은 4월혁명, 5·18민중항쟁, 6월항쟁 등 역사 변동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독재권력 하에서는 법제적 장치를 통해 국민의 인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였다. 한국에
서의 국가폭력은 개인의 광폭한 성격이나 돌발행위에서 기인한 것이기 보다는 경찰, 군대, 정보기관 등에 자행된 국가행위였다.
 
지배 권력은 수십 년 동안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좌익 불순분자로 몰아 민간인 학살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이 문제를 망각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한을 그들의 가슴속에 쌓아 놓고 살았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삼촌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도 모른 채 이 사회에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국외자로서 살아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국가폭력은 전후 30여년 이상 지속되었던 독재정권에 의한 것이었기에 더욱 강력했다. 이러한 수십 년간의 국가폭력의 일상화는 폭력에 대한 무감각과 저항 세력을 폭력으로 억누를 수 있다는 사고를 국민 일반에게 내면화 시켰다. 우리사회에서 국가폭력은 너무나 일상화 되고, 관행화되었다.
국가폭력은 폭력으로 규정되지 않고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어 우리사회를 전도된 가치로 지배하였다.
그 후 일반 국민들의 침묵과 방관의 심리가 망각의 사회화로 이어지면서 많은 역사적 희생이 반복하여 나타났다.
역사적 희생이란, 국가폭력에 의해 발생한 직·간접적인 희생을 의미한다. 직접적인 역사적 희생에는 학살, 의문사, 연행, 폭행, 구속, 고문 등이다. 이로 인해 정신장애 등 상당한 후유증을 나타내기도 한다. 간접적인 역사적 희생은 감시, 연좌제, 가족해체 등이다. 이로 인해 심리적 긴장과 불안이 누적되어 다양한 스트레스로 나타난다.
 
개인이 겪는 스트레스 장애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나 천재지변, 교통사고, 범죄 피해 등을 겪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지속되는 불안 증상 등으로 이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전쟁이나 민간인 학살,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의 가족들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국내의 예를 들면 5·18 유공자와 그 가족들은 오랜 세월이 지 났는데도 당시의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까지도 만성적 외상후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고 있다. 상당수가 우울증과 불안감 그리고 신체화 증세를 보이고 있고, 일부에서는 정신분열증 같은 심각한 정신장애로 악화된 경우도 있다.
 
 
한 개인의 개인사는 역사의 진행 논리와 유사하다. 개개인의 특수한 경험에 따라 성격이 형성되고 바로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이 된다. 급격한 환경적 변화, 신체적· 정신적 위해는 개개인에게 심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후의 삶에도 지장을 준다.
국가기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간 경험, 고문을 당한경험, 체포되어 사건 조작으로 수감된 경험 그리고 그 후 에도 계속 감시를 받았던 경험 등은 개인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사건에 대해 고통스러운 회상을 하며 반복적으로 악몽에 시달리며,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죽음이나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초래할 수 있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후에 1개월 이상 당시 상황을 재경험하고 회피와 정서적 마비, 과도한 각성 등의 심각한 불안 증세를 나타내는 경우이다.
트라우마는 외적인 심리적 요인으로 일어나는 심리적 충격을 말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은 전쟁, 학살, 고문, 폭행, 유괴, 범죄행위, 대형사고, 자연재해 등 다양하다.
특히, 정치적 학살 및 고문 같은 트라우마의 경우 가까운 친척 및 친구들을 잃었다는 상실감, 사회적 지위가 박탈되고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인간적 배신감, 나만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다양한 정신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주변에서의 위로와 격려 같은 사회적 지지가 높은 경우에는 장애가 다소 완화 되지만 대인관계에서는 계속 어려움을 나타낸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공받는 사회적 지지가 이후 생활에 대한 그들의 적응과 정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들 중 사회적 지지 수준이 높거나 사회적 지지망이 긴밀한 경우에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이 유의하게 낮았다.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한국에서의 오랜 이념 대치로 인해, 가족들은 좌익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낙인, 연좌제의 고통 등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지 못한 채 혼자만 가슴속에 간직한 채 살아왔다. 주변 사람이나 공동체로부터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 한 채 그 자체가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였다.
이제 피해자나 가족들은 진실규명과 함께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명예회복은 진실규명을 통해 그들에게 덧씌웠던 이데올로기적인 낙인을 벗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예회복은 소극적인 명예회복이다.
보다 적극적인 명예회복은 과거의 제도적 장치를 모두를무효화시키고, 사건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정치·사회적 복권, 명예회복 그리고 더 넓게는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자연재해나 대형사고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 보다 심리적 고통 이 더욱 심각하다. 따라서 국가차원의 여러 가지 화해 방안이 이루어졌을 때 이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이 감소될 수 있을 것이다.
화해 방안들은 사건 유형에 따라 그 중요성이나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사건 유형에 따라 적합한 화해 절차나 방향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건 유형에 따른 가해자와 피해 양상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이 선행되고, 그 토대 위에서 용서 및 화해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화해의 선행 조건으로 중요한 것이 용서이다. 용서는 피해자를 내적으로 억압된 것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반면, 화해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행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으나, 화해는 상대방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가해행위 이후에 가해자가 가해행위에 대한 후회를 표현할 때 그리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사과했을 때 용서가 더 잘 일어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화해를 위해서는 진실규명을 통해 가해자를 정확하게 밝히고, 가해자로 하여금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가폭력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여건상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적절한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함으로써 만성화되어 2차적인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맞는 적합한 치유 프로그램을개발할필요가있다. 또한심리적피해를입은사람들은 일반 치료기관을 찾아가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전문 치유센터의 설치가 시급하다.
 
외국의 경우에도 고문이나 집단학살 피해자들을 위해국가에서전문치유센터를설치하여운영하고있다.트라우마가 심각하여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대인관계 문제 등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심하게 겪는 사람들이있으므로 이들을 위한 사회 재적응을 도와줄 수 있는 재활 치료가 필요하다. 개별적인 치료뿐 아니라 공통의 아픔을 가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적인 치유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지지와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기회를 제공 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전문 치유센터가 필요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을 실시하여야 한다. 또한 가족들도 당사자 못지않게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으므로 가족을 위한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국가폭력이 얼마나 잔인하며 개인에게 얼마나 심각한 위험을 초래 할 수 있는 지를 깨닫게 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이땅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글 오수성 전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자료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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