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코스모스를 노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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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재자의 핍박 속에서 자유를 외쳤으며, 분단의 극점에서 통일을 노래했다. 그는 세상의 어떤 광포한왕 앞에서도 담대했으며, 동시에 들에 핀 이름모를 풀 꽃 앞에서도 옷깃을 여미며 생명에의 한없는 외경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순정한 사람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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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회에는 박용길 장로 가 지난 2002년도에 기증한 2,500여 건의 사료가 있다. 엄청난 양이다. 그중 엔 위에 인용한 글에도 등장하는 보라색 원피스와 부채, 손수건 등 구속자 석방투쟁 당시 사용했던 박물류도 있다. 시인 김형수는『문익환 평전』에서, “박용길은 폐결핵 청년을 반대하는 친정 부모에게,‘ 6개월만 살더라도 시집을 가겠노라’고 떼를 썼다. 그리고는 여든 살의 나이를 넘길 때까지 문익환 목사가 갔던 모든 길을 뒤따라갔다. 민족사에 바쳐진 이 불멸의 사랑은 남과 북의 인민에게 동시에 존경을 받았다. 분단 50년 동안 단 한 쌍밖에 누리지 못한 축복이었다.”고 상찬한 바 있다. 이들의 삶이 정녕 부럽지 아니한가? 그리고 나의 삶이 조금은 부끄럽지 아니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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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료 어수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