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다른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글·최현정 chhjung@paran.com
역사가 숨긴 고통이 당사자의 개인사가 아닌 모두의 아픔이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역사의 트라우마라고 부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는 실체에 반대하며, 앞으로 있을 고통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박하게 그 체험을 바람에도, 그런 순간들을 탄생시키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때로 우리는 무언가를 희망할 수 없을 만큼 슬프고, 무력하고, 냉담합니다. 어떻게 희망하고 또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 것인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신년 초, 어느 방송사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희망’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방송에서는 끊임없이 희망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몹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나라 경제의 기반을 다지는 일꾼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일을 하고, 그들이 곧 우리의 희망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방송에 출연한 사람들은 “힘들어도 즐겁게 일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전혀 희망찬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노동 환경은 건강을 해칠 만큼 열악해 보였는데, 이들이 아프고 병들면 과연 쉴 수는 있는지 혹은 어떤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고되게 일을 하는 이분들의 일상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일하면 어느 훗날에는 안정된 생활을 보장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요. 그러나 방송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어찌 누군가의 고됨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입니까.
희망의 조증
지나치게 자신감에 부풀어있고 에너지가 과도하게 넘쳐나는 일련의 심리적 상태를 ‘조증(躁症)’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조증을 보이는 분들의 내면에는 이러한 겉모습과 달리 참으로 깊은 우울감과 무력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그 우울함이 너무도 지독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고 보상받기 위해 조증이 발현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마치 모두가 희망에 차있고, 모두가 부자가 될 수가 있으며, 모두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가능하지만은 마치 가능한 것처럼 여기게 합니다. 그 안의 엄연한 고통은 누군가의 몫이긴 하지만 때로는 그것조차 우리 모두의 ‘희망’인 듯 포장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희망인지 알 수 없는 피상적인 희망을 꿈꾸는 한국 사회는 에너지 과잉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살기 마땅한 집을 마련할 수 없고, 공부하고 싶어도 교육받을 수 없으며, 아마도 평생토록 그렇게 일해야만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살아간다’가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구성원의 고뇌를 희망으로 먹고 사는 사회는 참으로 불행합니다. 오히려, 이 사회의 희망 없음을 인식하는 데에서 우리의 희망함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가 그 암울한 측면을 희망의 조증으로 가리듯이, 역사의 트라우마는 그렇게 우리 스스로가 우리 눈을 가리게 합니다. 그러나 조증을 앓는 사람이 동시에 지독하게 우울하듯, 우리의 역사적 자아도 슬픔, 무력감, 상실감의 사그러지지 않는 고통의 회귀를 애써 억누르고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진실에서부터 시작
그것은 때로 집단적 정서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촛불로 일렁이는 뜨겁고도 열정적인 불길 속에서 몹시도 강렬하고 다부진 감정들이 타올랐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파도 속에서는 그것의 폭발적 분출을 목격하기도 했지요. 이것은 시민의 자기의사 표현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역사적 자아가 품고 있었던 뿌리 깊은 감정을 목격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집단적 정서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정서의 힘이 두려움의 대상인 듯, 그것은 부인되고 평가 절하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분명했던 것은, 우리가 이토록 슬퍼하고 분노하며 또 체념하고 있었다는 마음의 진실, 그리고 이 집단적 정서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평범하거나 합리적인 줄 알았던 우리네 오늘날의 일상이 결코 평화롭지도 정의롭지도 않음을 알리는 소중한 신호였으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일러주는 지표였습니다. 우리는 문득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우리가 무언가를 잊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지요. 삶을 바로 잡고 싶은 욕구, 권력에 의해 삶을 침해당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 서로서로 단절되어 버린 틀에서 벗어나 공동의 광장에서 함께 만나고 싶은 마음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 동안 이 마음들은 적시에 해소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음 안에 응어리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에 광장에서의 만남은 일종의 카타르시스 체험과도 같았습니다. 거침없이 즐거워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또 하염없이 슬퍼하고 통곡하기도 하면서 한국 사회는 어떤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겪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카타르시스에서 체험되는 감정은 그 실체가 사실 모호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감정이 어떠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고, 또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한다는 것
피상적인 희망을 외치는 사회에서 슬픔, 분노, 체념, 모순, 갈등과 같은 인간의 정서는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희망을 떠드는 사회에서 부조리함을 느끼는 것은 왠지 나만 부적절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실제 느껴지는 나의 감정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순 안에서 우리는 갈등합니다.
학교 선생님, 선배, 직장 상사, 고용자, 양육자, 혹은 나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감정은 부정당합니다. 피폐한 자본주의, 성장제일주의, 그리고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환경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분노, 갈등, 불안, 좌절과 같은 인간의 감정들은 억압됩니다.
부정의 순간들은 나 자신과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극명합니다. 사회의 조건과 압력들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며, 따라서 나는 스스로의 정서 체험을 부인하고 사회의 그것에 따르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느끼는데 이 사회에서는 그렇게 느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것 조차 부정해야 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이 그렇다면 피하고 덮어두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 번의 부정이 지금 내 삶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나를 향한 부정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순간 나는 곧 나에게 타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만은 영원히 타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패배와 낙오는 타자의 몫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 순간 패배와 낙오에 대한 두려움과 부조리를 직접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인 셈입니다. 나의 체험을 부정하면서 안심을 구할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타자가 되어버린 내가 남을 뿐 입니다.
부정당한 인간성을 위한 슬픔
물론, 사람들은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이 모이기에는 광장이란 너무 무섭거나 또는 너무 즐거운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광장에 더 이상 사람이 모이지 않자 절망하는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왜 용산에는 촛불이 타오르지 못했는가 하는 자조도 있었습니다.
카타르시스 이후 또 다시 단절되고 억압되었다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자기 비난입니다. 나의 감정은 결국 그릇된 것이었구나 하는 자기 비난 말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그릇된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명명하고 표현하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소중한 자각이 자조와 자기비난으로 쇠퇴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다시 돌볼 차례입니다.
이후, 다행히도 사람들은 많은 생각들을 이어갔습니다. 우리가 왜 이토록 슬퍼하고 분노하는가에 관한 대화들을 주고받았지요. 그것은 아주 의미 있는 사회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감정이 과연 무엇이었던가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강자의 뜻에 따라 우리의 자아를 변형시키지 않고, 힘이 없는 자, 죽은 자, 슬퍼하는 자에게 동일시하면서 바로 우리의 역사적 자아에 대해 고민할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헛된 희망을 쫓느라 부정당한 우리의 인간성을 위해 슬퍼합시다. 자아의 자각은 우리 삶을 어떠한 양상으로든 진전시켰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중의 누군가는 용산에서 미사에 참석하여 함께 슬퍼해주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바로 자신의 일상과 일터에서 용감한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많은 사람들은 몹시도 고민한 끝에 예전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용기 있는 선택을 내렸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인간성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 아닐까요.
글 최현정 평화로운 공동체 만들기에 관심이 많은 임상심리학자. 역서에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피터 엘사스의 『고문 폭력 생존자 심리치료』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