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진원지 마산
혁명의 진원지 마산
글·이은진 ejlee@kyungnam.ac.kr
1960년 마산에서는 사상자 면에서 본다면, 크게 세 차례 시위가 발생하였다. 즉 선거와 개표 당일인 3월 15일,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른 4월 11일에서 3일간, 혁명이 완성될 무렵인 4월 25~26일 시위 등이 그것이다. 이들 시위에 의해 경찰서, 파출소, 그리고 시청이 파괴되었고,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15여 명이 사살되었다. 3월 15일 마산시위는 산발적이었던 전국 시위에 불을 붙였다. 이를 이어 받아,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시위가 마산의거의 진상규명, 발포 경찰 체포, 구속된 시민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의 물결이 파도쳤다. 다시 4월 11일 마산의 부둣가에서 발견된 김주열군(당시 마산상고 합격증을 받아 놓은 상태)의 참혹한 모습에 충격을 받아 마산시민들이 대거 폭발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이를 이어받아 경찰의 무자비함을 규탄하고, 부정선거 무효, 구속학생 석방 등을 외치며, 본격적으로 전국에 시위가 전파된다. 이에 서울에서 발생한 4월 18일~19일의 도심지 및 경무대(현재 청와대 앞)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많은 군중이 사상당함으로써 혁명의 고조기에서 마무리로 접어들게 된다. 마무리 과정에서 계엄군으로 출동한 군인들이 시위군중의 의사표시를 보호하고, 대통령과 집권층은 이제 무력에 기댈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승리를 구가하는 가운데 마산에서도 어린 학생들의 희생과 고문과 가택수색 등에 시달린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시위를 감행한다. 이상의 줄거리가 1960년 3월과 4월 중에 발생한 의거의 내용이다.
마산은 일제가 만든 신마산과 1760년경에 창동을 중심으로 세곡창, 어시장, 포구 등이 모여 있던 구마산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분리는 신마산에는 주로 정부 기관들, 학교가 몰려 있게 되고, 구마산은 주로 시장과 시민들이 모이는 곳으로 지리적으로 구성되게 된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주로 교사와 학생들이 시위를 주동하였고, 1946년의 10월 시위에서도 무산자 계급이 주도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일본에서 귀환동포들이 몰려오고,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북한에서 피난 온 동포들의 정착이 신마산의 적산가옥과 변두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이들은 구마산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한 경제활동을 영위하게 된다. 따라서 1960년의 마산은 도시구조면에서는 이중적인 구조가 유지되면서, 인구구성면에서는 새로이 유입된 인구가 상당수에 달하게 된다. 신규로 유입된 인구는 근대적인 교육과 아이디어를 지닌 인구층이었고 이들은 경제생활은 어려워도, 세계관은 매우 좁은 세계를 벗어나, 넓은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정의감을 쉽게 발로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민주당은 전통적인 유산자 계층이 주도하는 정당이었고, 자유당 세력은 신규 관료세력과 이승만의 등장이후에 형성된 부르주아지로 나눌 수 있다. 기층 민중의 측면에서는 한국전쟁시기에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다양한 사상이 유통될 수 있는 유리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또한 바다와 면접한 마산은 외부세계와의 교류와 소통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항구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주당의 인사들이 불을 붙이면, 곧 이어서 민중들이 따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3~4월의 마산의거 이후에도, 혁신운동, 교원노조, 통일운동, 반혁명분자들의 재등장 저지,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등의 운동에서 전국적으로도 선도적이고, 높은 참여를 보인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단지 혁명을 일으킨 수준을 넘어서서, 혁명을 지속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 마산의 시민들이 노력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측면에서 보면, 3.15, 4.11~13, 4.25~26일의 마산의거들은 좁은 봉건적 공동체성을 벗어나서, 근대적인 보편적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트는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편협한 사회관계의 틀을 넘어 익명의 개인들이 근대적 민족국가의 틀내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이해한다면, 마산의거는 이를 만천하에 드러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15의거는 2월 28일 이후에 간간히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시위나 충돌사건들이 마산이라는 지역, 그리고 선거 당일에 가장 최초로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이어서 시위에 나선 사건이다. 애초에는 민주당의 임원들이 주가 되어 시위를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곧 체포되어 거의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나 당일 오후 6시 경부터 선거가 끝나고, 시청에서 개표가 진행된다는 말을 듣고, 시민들이 시청 앞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것이 시발이 되어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이때 경찰이 시위 군중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사망자가 발생하게 된다. 즉 정치인들이 촉발하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위가 종료되어가는 듯이 보이던 오후 5시와 시청 앞에 대규모의 시위군중이 밀집하는 6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상당수의 증언에 따르면,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가고, 아니면 휴식을 취하면서 도시의 곳곳에 보이지 않게 널리 퍼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한 가옥에 여러 세대가 공유하는 가옥구조 속에서 서로간에 낮에 일어난 일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고, 분노하고, 서로 용기를 주면서 행동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것으로 분석된다. 가족애를 넘어서 동료애, 민족애, 부정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는 데 암묵적으로, 투영적으로 사회 공동체적으로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3월 15일 이후에 정부는 시위를 좌익분자들의 소행으로 몰고가면서 가가호호 수색을 하고, 젊은 청년을 잡아가고, 고문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안으로 안으로 누적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4월 11일 김주열의 시체가 눈에 터지지 않은 최류탄을 박은 채 바다에서 발견되어, 그 동안 경찰이 무자비하게 시위자들을 탄압하였다는 증거가 눈앞에 나타나자 시민들의 잠재된 분노는 폭발되게 된다. 이때는 시민들이 시작하고, 4월 12일에는 고교생들의 시위, 4월 13일에는 해인대학생들의 데모로 일단 시위가 마무리되고, 이를 이어받아 전국적으로 시위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4월 18~19일의 서울에서의 경무대 앞에서의 데모를 통해 정국은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 미국 대사, 미군사령관 등을 통한 미국 측의 지원 철회로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각료들이 사표를 내고, 부통령 이기봉 일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국회는 허정 과도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박정희는 1960년 3~4월 의거시에 부산경남지구의 계엄사령관을 맡아서, 호의적으로 처리하였다고, 본인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자신이 1961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후에는 마산의 경우에도 4월혁명 이후에 새로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 정부 시절에 나타났던, 진보적인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탄압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조치를 취했다. 다만, 자신의 불법적인 쿠데타와 사회주의적 경력을 보상하기 위해서 적어도 선거 이전, 민간정부로의 이양이라는 과제 이전에는 3·15의거를 찬양하고, 1962년에 3·15의거탑을 세우게 되고, 회관을 설립한다. 일단 1963년이 지나고 군부 독재의 억압정치로 나아가면서, 박정희 정부는 3·15의거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 정신을 두려워 하게 되어, 가능하면, 저항정신보다는 학교에서의 학업을 통한 미래의 준비가 바로 4월혁명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급기야는 3·15의거 당시에 이승만 정부에서 관료를 지내고, 부정선거에 개입했던 사람들이 3·15의거의 치사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유신체제와 지속된 군부통치체제를 지나, 김영삼 문민 정부에 들어서서야, 겨우 3·15의거를 기념할 수 있는 숨통이 트이게 된다.
마산에서 발생한 3·15의거는 발로 불의에 저항한 사건이다. 선거와 개표 부정, 선거권 박탈, 민중에 대한 불법적 탄압에 저항한 사건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저항은 개방과 창의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보다 진취적이고 풍요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에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글 이은진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