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택시 노동자들의 형님, 이동섭
민주택시 노동자들의 형님, 이동섭
글·유경순 youkslifehanmail.net
1970년대 학내 시위를 주도하거나 그 이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이들은 보통 학생운동가들이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간혹 있었다. 유신체제의 폭압성과 학생운동가들의 저항에 영향 받아, 학생운동세력과 관련 없이 자발적으로 항의 선전물을 배포하거나 시위를 시도한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예가 민주택시노조 활동을 했던 이동섭이다.
인생을 바꾼 두 사건- 시위 기도 무산과 강제징집
1975년 어느 날, 강원대학교 곳곳에 선전물이 배포되었다. 학교당국과 경찰은 바짝 긴장했는데, 이들보다 던 긴장한 몇몇의 학생들이 학교건물 뒤에 숨어서 학생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물을 보고 모일 것으로 기대했던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이들은 선전물 배포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선전물 배포를 주도한 이동섭은 학생운동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생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동섭은 선전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벌이려 했을까.
72년 때 대학 들어가서... 써클은 안했고... 오히려 75년까지도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인데... 보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지 않습니까? 뭐 ‘대학 나와서 나중에 직장생활 편안하게 다니면 될 텐데 쟤네들은 왜 데모를 하는지’ 그 까닭에 대해서 의문을 안 갖는 거죠. 저도 그랬는데 김상진 열사라던가 뭐 여러 가지 일들이 저로서도 ‘왜?’ 라는 의문을 계속 갖게 됐어요. ‘왜 저럴까.’ 그래서 유신, 긴급조치 뭐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을 했고. 사실 큰 의식은 없이 시작을 한 거예요. 75년에 “야! 이건 정말 부도덕한 것 같다. 우리라도 뭔가 알리는 일 좀 해보자.” 그래 후배들 불러다가 저희 집에 가리방이라고 하죠? 등사기... 펜하고 몇 가지 도구 사다가, 그때 제가 『논어』니 뭐 이런 책들 많이 봤는데 그런데서 문구를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리려면...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고...’ 뭐 이런 얘기를 써서 성명서 만들어서 배포했는데, 선전물 배포하고 시위하려던 날, 학생들이 모이지 않고. 그러다가 잡혀갔죠...
이 사건으로 이동섭은 구류 3일을 살다가 강제징집 당했다. 그러나 이 시기 강제징집당한 학생운동가들이 13명이나 있었고, 군대에서 이들을 만나면서 이동섭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유신체제에 저항하려는 마음을 먹은, 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이미 달라졌으리라. 1978년 3월 제대한 이동섭은 서울에서 강제징집당한 이들과 만나서 학습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노동현장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다.
제대하고 ‘짤 린 놈들 모여보자’ 해서 50명 정도 모여서 난상토론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 고민도 했었죠. 그러다 나중에는 10명 정도 중국집에서 만나 사회에 대해서 고민도 하고 학습도,『역사란 무엇인가』, 『노동운동사』뭐 다양하게 보는데 노동 쪽을 3분의 2쯤 더 집중하고... 그런데 참여자 중 제일 막내가 74학번 김삼수인데 굉장히 똘똘한 친구예요, 그 친구가 나를 교화시켰어요. 하하. 나이는 어린데 ‘형, 현장 들어가야 된다’, ‘노동자, 농민들을 변화해서 사회혁명을 해야 된다’라는 선진적인 주장을 끊임없이 하면서 나하고 몇 사람을 꼬셨어요... 그래 79년에 현장에 가죠... 그땐 다 독고 다이로 갔죠... 어디 가있어도 자기 간 출처를 밝히질 않아요... 연락할 전화번호는 다 머릿속에 있지, 메모 안하고 살던 시절이니까...
그는 구로공단의 소규모 사업장에 입사했으나 기술이 없는데다가 노동을 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노동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어서 3개월 만에 포기하고 나온다. 그 뒤 그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1980년 민주화의 봄 시기, 열린 국면을 활용해 복학을 했으나 5·17계엄확대로 수배가 떨어지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소식을 들은 그는 분노로 치를 떨며 복학생 모임과 한빛교회 사람들과 같이 시위를 기획한다. 일명 ‘한빛교회사건’으로도 알려진 시위기획은 실패하고 그는 포고령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5·17계엄확대로 수배되면서 서울로 도망 왔죠...그때 광주에 대해 ‘임산부 배를 갈라서’ 그런 얘기를 쭉 들으니까, ‘서울에 알려야 된다’, ‘서울에서 피를 봐야 국민들이 분노하지 않겠냐?’, ‘그 앞자리를 우리가 하겠다’ 하고서 한빛교회 청년부하고 몇 군데 팀에서... 5월 24일 단성사 앞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죠. ... 사실 저는 그때 죽을까도 생각을 했었어요. ‘죽어, 정말 내 하나의 희생으로.’ 그런 생각 하니깐 하루 전날부터 밥이 안 넘어가는 거야 긴장해서... 5월 24일에 여자들한테 ‘화염병 가져오라’ 하고 단성사 앞에 갔는데, 처음에 샤우팅으로 한 친구가 신호를 하면 내가 화염병을 날리는 계획을 정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어요. 50명 왔나? 극장에서 사람이 나올 때를 잘 맞춰서 ‘왁~’ 하기로 했는데 그 친구도 타이밍을 못 맞추고...
택시노조 활동
그는 1981년 석방되자 풀무원에서 3년 일하면서 노동현장에 갈 후배들을 지도하다가 1984년 9월 강원도 사북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그 뒤 장기적으로 노동운동을 할 결심을 굳힌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부광택시에 입사했다가, 1985년에 동양콜택시에 입사한다. 이 시기 동양택시에는 어용노조가 있었는데, 그는 일부 민주파들과 같이 노조민주화를 위한 준비와 동시에 버스 운전사들과 취업카드 철폐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택시하게 된 거는, 광주항쟁 때 택시 노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잖아요? 그래서 택시를 들어가죠... 처음에는 부광실업 갔다가... 85년도에 동양콜택시에 들어가요. 그때 노조가 있었는데... 해마다 집행부가 바뀌어요. 그니까 싸움 시작하다가... 교섭위원들이 돈 먹고 도망가든가 해서 접어버리니까 집행부가 바뀌죠. 다음 사람이 되면 또 1년 열심히 준비했다가 반복하고... 민주파가 있지만 집행부를 장악할 힘은 모자란 거죠. 전체에서 2~30%밖에 안 되었으니까... 저는 처음 1년은 그냥 일만하다가 자연스럽게 쟁의부장에서 시작해 교선부장을 하죠. 나중에 부위원장하고... 그러다 취업카드문제로... 택시·버스 연합체의 성격을 띤 모임을 하면서...취업카드철폐운동을 종로 5가에서 했죠. 150명 정도 모였나? 거기서 내가 연설을 했고...
한편 1987년 6월 ‘직선제 쟁취’를 외치는 시민들이 서울 곳곳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이때 택시 노동자들도 지지와 참여의 표시로 소음기를 터트리거나 시위대오 앞을 지날 때면 경적을 울리며 동참을 표시했다.
87년도 6월 항쟁 때... 택시가 가서 라이트 켜주고, 그땐 마후라[소음기] 터트리는 게 있어요. 그니깐 운전하면서 개스 차인데...시동을 켰다가 다시 시동 끄면 가스가 ‘팍~’ 이렇게 몰려 있다가 다시 시동 켜면서 엑셀레터를 팍 밟으면 ‘뻥~’ 소리가 난다구. 그니깐 우리는 시위대오 앞으로 지나가면서 ‘우리 응원한다! 지지한다!’ 그런 표시로 ‘팡팡팡팡~’ 터뜨리고 다니고. 그래서 우리가 호응을 굉장히 많이 받았죠.
어용집행부가 장악하던 서울 택시노조에 1989년 민주집행부가 등장한다. 이동섭도 동양택시를 나와 서울노조 지부에서 쟁의차장으로 상근을 했고 민주택시노조는 본격적인 투쟁활동을 벌였다.
89년에 민주집행부니까 조합원들의 기대가 컸죠... 90년 교섭할 때 굉장히 열심히 싸워요... 보름동안 파업을 했는데, 5월부터 12월까지 파업한 곳도 있어요. 그런데 260개 중에 파업 한 조합은 50군데 정도고, 나머지는 중간에 다 개별로 체결을 하니까, 우리 스스로 힘이 빠지고 지쳤어요... 결국 ‘전술을 잘 세워야 된다’는 걸 알게 되죠. 그래서 91년에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어요. 제가 아이디어를 많이 내서, 예로 신호등에 빨강, 파랑, 노랑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파란깃발 ‘척~’ 달고 다니고. 그 다음에는 노랑깃발 ‘척~’ 달게 하고. 이건 서울시에 경고 하는 걸로 해서, ‘우리가 빨간 깃발 달면 진짜 차량시위 할 꺼다’고 하면서... 그리고 집회도 한양대에서 가족도 참여해 한 2만 명이상 모여서 했어요... 그땐 차량시위도 신나게 했어요.... 어떤 식이냐면 삼일고가가 있잖아요? 그 위로 택시 30대를 먼저 보내요. 그래서 청계천 쪽에 가면 ‘키만 빼서 그냥 튀어라. 차가 부서지던 말든.’ 그러고 나중에 또 여기 3~40대 가게 해서 ‘고가 올라가는데다가 차 놓고 빠져라’ 그게 차량 시위에요.
이렇게 택시노조에서 활동하던 그는 1991년 10월 경 구속되었는데, 그의 죄목은 불법감금죄에서부터, 차량시위, 경찰차량 파괴, 특별공무집행 방해 등등 10여 가지가 넘었다.
노동운동의 정리와 연탄 나눔 운동
이동섭은 1992년 2월 즈음 출감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노조에서는 그보다 젊은 후배들이 열심히 활동을 하기 시작하자, 그는 후배들의 성장과 진출에 자신이 방해가 될까 우려가 됐다. 거기에 1991년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그는 운동의 지향을 상실한 듯 혼란스러웠다. 결국 그는 새로운 일을 찾기로 결심을 하고 택시 노조활동을 정리했다.
91년도 10월 달인가 들어가서 92년도 2월 달에 나왔지요. 그 때가 사회적 변화가 가장 심했던 시기 같고....서울택시 쪽에 3~4개월 더 있었어요. 그러다 후배들을 위해서 나는 은퇴하자’ 는 생각도 있고, 그 때 사회주의권의 변화도 나도 좀 굉장히 컸던 것 같고, 말하자면 목표, 지향점에 대해서 상실감이랄까? 이런 게 좀 컸던 것 같애요...거의 한 8년 가까이 있었던 셈이니까. 하여간 나의 역할에 대해서도 좀 의문점이 생기고... ‘이제 좀 새로운 다른 일을 찾아보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고...그래서 92년도 7월인가? 이때 정리를 했어요.
그 뒤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슈퍼마켓, 기획사, 폐-타이어 재생사업을 했다. 그 과정에 1998년도 국회의원을 하는 선배의 요청으로 보좌관을 하다가 노무현 정권 등장 이후 석탄공사 감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연탄 나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사를 그만둔 뒤 그는 지금까지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 연탄 나눔 운동’을 한다.
구술이 끝날 즈음 그에게 ‘그동안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냐’는 질문을 했다. 그는 그 질문에 무척 신중했다. 답은 소박했다. 시대 상황에 성실하게 살았고, 그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은 이들보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삶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이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데, 허허, 순간순간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농담 삼아 ‘그런 시기가 다시 도래하면 나는 또 현장에 몸담았을 거’라고 하는데. 그리고 제가 한편으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거는 ‘나름대로 그 시대에 열심히 산 것 아니냐,’ 그러고 ‘어떤 누구보다도 우리가 더 열심히 산 것 같다’고...
그와의 구술을 마치고 돌아 나오면서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져 왔다. 그러다 문득 구술을 부탁하느라 처음 통화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정보가 적어 민주택시에 관한 내용을 조사한 뒤 구술요청을 했는데,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겨울이라 연탄배달 하느라 바쁜데...”였다. 간신히 일정을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을 한 이가 지금도 힘든 연탄배달을 하다니, 삶이 많이 고단한가 하는 생각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웠었다. 마치 해방이후 잘못 세워진 나라 탓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고달팠던 것처럼... 그런데 이런 마음은 그를 만나면서 바로 날라 갔다. 그는 어려운 이들의 추운 방을 따뜻하게 해 줄 연탄배달을 천직처럼, 정말 즐겁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요즘 세태에, 어쩌면 ‘한 장의 연탄’으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온기를 지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유경순 역사학 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