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의 현장 그리고 탐욕이 낳은 폐허를 찾다
용산 참사의 현장 그리고 탐욕이 낳은 폐허를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2009년 1월 20일. 서울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핫 Hot 했던 용산 한강로 남일당 건물에서 진짜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흔히들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서 5년이나 지났다.
이 지역은 서울시가 용산4구역이란 이름으로 재개발 사업지구로 지정하고, 삼성물산, 대림산업, 포스코건설 등 쟁쟁한 건설사를 시공업체로 삼아 (대표업체는 삼성물산) 강제철거 등의 작업과 계획을 관리하도록 승인한 곳이었다. 용산4구역의 면적은 한강로3가 63∼70번지 일대 5만 3442m² 였고, 이 사업으로 40층 규모 주상복합 아파트 6개동(493가구, 평형은 164∼312㎡)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 참사의 현장은 어이없게도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차라리 번듯한 건물이라도 들어섰으면 이렇게 허망하진 않을 겁니다. 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허허벌판입니다. 공터가 된 남일당 터를 보는 것 자체가 유가족에게 고문입니다" 용산참사 유족 정영신 씨는 작년 4주기에 아직도 빈 공터로 남아있는 현장을 보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 년이 또 지났지만 현장은 그대로다.
철거민들이 농성을 벌였던 남일당 건물을 비롯해 정씨 가족이 운영하던 레아호프 등 일대에 있던 가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빈 터에는 한국 전체의 이목이 집중될 정도로 긴박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적막함만 감돌았다. 정말 누가보아도 참사가 일어났던 곳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다.
2012년 초, 남일당 건물은 철거됐지만, 추가 분담금 문제로 사업추진이 지연되었고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은 완전히 멈춰서 있다. 조합과 시공사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시공사들과 계약을 해지했다가 다시 추진하는 등 용산참사 진상규명처럼 문제는 전혀 풀리고 있지 않다.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남일당 건물 공터는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철거민들과 대치했던 철거용역 직원들이 주차장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차비를 받아 푼돈이라도 건지려는 심산이리라. 단군 이래 최대 개발사업이라는 용산개발이 좌초된 후 텅 비어 있는 옛 집창촌 터가 바로 건너편인데 그곳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이고 역시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포장마차들이 들어서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당 억을 호가하는 땅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럼에도 인근 주유소 이름이 <용산 뉴타운 주유소>일 정도이니 개발에 대한 미련은 여전해 보였다.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산참사현장. 고층건물은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던 시티파크이다.
진압작전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독립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강렬하고 설득력 있게 문제를 제기했다, 심지어 영화를 본 경찰조차 고개를 끄덕거렸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보상금이 적정했었느냐, 철거민들이 ‘폭력적’이었느냐, 진압 작전은 제대로 짜서 진입했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치고 최소한 그렇게 빠르게 진압에 나서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5주년이 된 지금은 책임 있는 답변이 나와야 할 때이다.
철거민들이 인화물질을 가지고 남일당 건물에 진입한 때는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반이었고, 진압작전이 시작된 때는 다음 날 오전 6시 45분이었다. 불과 하루 만에 작전이 결행되었고 결과는 누구나 알다시피 비극으로 끝났다. 결국, 그렇게 빨리 시작할 작전도 아니었고 그렇게 빨리 헐 건물도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건 당사자였던 이명박 정권은 물러나고 박근혜 정권이 출범했지만, 작년 작전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공항공사 사장으로 영전했으니 책임 있는 답변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러면 여기서 한때는 황금알을 낳는다는 재개발 사업이 가장 알짜배기라는 용산에서도 지지부진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사실 재개발은 한국 자본주의와 개발지상주의가 낳은 산물이었다. 많은 한국인은 자신의 투자 없이 용적률을 올려 얻은 개발 차익으로 기존의 토지와 건물, 아파트 단지를 재개발하거나 재건축하여 큰 소득을 얻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개발 이득 쟁탈전’에 기꺼이 참전하였다. 하지만 이제 개발시대는 저물어 가고 분양 가능성도 사업성도 크게 악화하였다. 즉 재개발해 아파트나 상가를 손에 쥐려면 땅이나 건물만이 아닌 자신의 투자 즉 추가분담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6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번듯한 건물은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물론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대해 관청이건 조합이건 경찰이건 건설사건 책임을 지거나 유감조차 표명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용산참사 희생자 즉 고 이상림, 한대성, 윤용헌, 양회성, 이성수 다섯 분은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나서야 수많은 민주열사가 묻혀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영면할 수 있었다. 앞으로 개발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이런 ‘21세기형 열사’는 안타깝지만 더 나올 확률이 높다. 비록 용산참사는 공간적인 흔적은 남기지 못했지만 재개발 현장 곳곳에 ‘제2의 용산참사’를 경고하는 현수막에서 보듯이 정신적으로는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사실 작은 용산은 서울에 널려 있다. 두 번의 선거를 지배했던 뉴타운의 광풍은 이미 흔적도 없다. 이미 대부분의 재개발 지역은 사업성을 상실하여 이미 써버린 매몰 비용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가 나올 것이고 그 문제에 대해 책임질 자도 용산처럼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용산참사 현장은 말 그대로 지금은 야외 주차장에 불과하지만 주위 환경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참사현장과 좌초된 용산 개발 현장은 거대한 용산역과 10년 전 아파트와 오피스텔 모두 수백 대 1이라는 기록적인 경쟁률을 남겼으며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는 시티파크와 엄청난 부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영화에서 보는 디스토피아 같기도 하다. 정말 어쩌면 미래에 다가올 무서운 파국을 미리 보여주는 장면은 아닐지? 라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40년 이상 한국을 지배했던 부동산 불패 신화와 아파트 불패 신화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세월이 더 지나면 불패 신화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용산참사가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여섯을 죽이고 건물을 헐고 만든 땅을 주차장으로 썼다는 믿겨지지 않는 사실도 말이다.
경제 민주화가 대세가 되었다가 요즘에는 잠잠하다. 거창한 경제 민주화보다 재개발 민주화 아니 투명화와 정상화부터 먼저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