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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야기] 구가협의 막내 이야기

 

<구가협의 막내 이야기>

어디에나 일 잘하는 막내들이 있다. 

 

글 이경은 / kayklee@empas.com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구가협(구속자가족협의회)의 탄생

민청학련사건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가족들

1974년 4월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인혁당재건위(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만으로 1,034명이 검거되어 183명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서 변호사 강신옥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요지로 변론을 하다가 세계 사법사상 처음으로 변론 중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구속되는 사례를 남겼다.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밤 10시를 기해 공포한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말도 꺼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즉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에 대해서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처분할 수 있음”이라는 살벌한 내용은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옆자리의 눈치를 봐야만 할 정도로 끔찍하게 소름 돋는 공포 그 자체였다.

민청학련 구속자들 중에는 안재웅 총무를 비롯하여 KSCF(한국기독학생연맹) 소속이 제일 많았고 구속자 가족들이 딱히 갈 곳도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몇 사람만 모여도 사복 경찰이 따라붙어 마음 놓고 만나서 떠들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종교단체가 울타리가 되어주는 곳뿐이었다.
구속자가 워낙 많다보니 그렇게 자연스레 조직이 이루어져 공덕귀 여사가 회장을 맡고 서강대 김윤 학생의 어머니 김한림 여사가 총무가 되었다. 김한림 여사는 매우 활달해 조직을 잘 이끄는 리더였다.

 

중요한 실무는 막내가 한다.

최영희씨가 작성한 호소문

이경애는 KSCF 안재웅 총무의 새색시로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남편을 감옥에 빼앗겼다. YMCA에서 일하던 그녀는 재빠르게 김한림 선생 등 리더들의 손발이 되어 실무자 역할을 막내답게 해내었다. 이경애는 당시 스물다섯의 임산부였다. 첫 아이라 조심해야 할 처지였지만, 입덧투정은 커녕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온갖 잡일에 뒷일을 감당했다, 또 다른 임산부 이현배의 부인 최영희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할 일이 많지만,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실무로 받쳐주는 일 또한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하는 젊은 사람들의 몫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꾼들은 쉽게 노출되기 마련이다. 재판정에 필기도구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서로 나누어 피고마다 각각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달달 외워야 하고, 그걸 나오자마자 베껴 써서 통신문을 만들어 돌리는 일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왜일까? 방송은커녕, 신문에 한 줄도 날 수 없는 상황이고 그 기막힌 군법회의의 날조된 재판 과정을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었기에 국제여론을 조성해 대한민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 것만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리는 일 자체가 긴급조치 4호 위반이었다.

 

국내는 어려우니 해외언론에 알리자 

일본교회협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 석방 촉구문

마침 서울 문리대 김효순의 형이 혼자 방청객으로 들어가 재판과정을 듣고 나와 기록한 것을 전해 받은 이경애는 최영희와 함께 처녀 때 다니던 직장 YMCA를 밤에 몰래 찾아갔다. 경비 아저씨에게 담배를 사다주고는 문을 따고 들어가 밤새 그 내용을 타이핑해서 5부를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비밀 루트를 통해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그것이 외국 신문에 실렸고, 한국의 민주탄압 실상이 낱낱이 고발되기 시작하면서 국제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한국 정부에 압력이 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외신 보도로 국제여론이 들끓자 박정희 대통령이 노발대발하면서 누군지 잡아들이라고 직접 명령을 내리면서 이경애가 드러나고 말았다. 어차피 그런 일을 해낼 사람은 이경애 밖에 없었다. 이경애는 나머지 4통을 김지하 씨 어머니와 유인태 씨 누나, 이철 씨 아버지, 가톨릭 신부님 한 분께 드리고 자신은 어차피 털릴 것을 예상해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서 종로 경찰서로 잡혀간 이경애는 3박4일 동안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식사를 거부하며 그 방청기록을 누구에게 주었느냐는 심문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당시에는 인혁당 관련자 가족에게 최음제를 먹이는 등, 불법가혹수사를 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경애는 일부러 물도 먹지 않았다. 임신 중이었기에 그들이 약을 탔을까 더더욱 염려되었다. 둘째 날엔 결국 경련을 일으키며 실신해 근처 한국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끝까지 그 누구의 이름도 불지 않았지만, 결국 다들 잡혀 갔다.

그렇게 혹독한 수사를 받고 나온 이경애는 쉴 틈도 없이 여전히 구가협의 막내 일을 해냈다. 다시 구속자 석방을 위한 1만 명 서명운동을 하면서 남산 중앙정보부에 지하실에서 끌려갔다 와서 유산을 하고 안타깝게도 첫 아이를 잃었다.

경찰들이 친정집에 가둬놓고 함께 잠을 자며 지키다 민망했는지 나중엔 집밖에서 일주일 동안 감시하는 바람에 동네에는 사위가 빨갱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경찰이 이경애에게 경찰에서 당한 사실을 함구하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지만, 그녀는 경찰의 철수와 동시에 경찰과 중정에서 당했던 사실을 폭로하고 다녔다.  

 

막내는 금식기도회에서도 열외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어머니와 포옹하는 김윤

군사법정에서 사형, 무기징역, 징역 20년, 15년 등의 중형들이 선고되는 재판이 진행중이었지만, 구가협 회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아무렴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미국의 프레이저 상원의원도 온다고 하고, 미국이 인권 상황을 주시하고 있고, 세계적으로 한국을 압박하는데, 저들이 어쩌겠어? 우리가 더욱 잘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외신들이 계속 기사를 쓸 수 있게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한다. 우리는 뿌리파다. 뿌리는 튼튼하면 뽑히지 않는다. 뽑히지 않으면 끝내 살아남아 이긴다. 노래나 합시다. 농성? 많이 했잖아? 목요기도회? 늘 하잖아? 이번에 굶읍시다.”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197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 동안 김한림 총무의 지도로 명동의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금식기도회에 돌입했다. 구가협의 후원회장으로 자원한 시노트 신부도 참석했다. 막내는 쉬파리(경찰, 정보부요원 등)들의 동태도 살펴야 하고, 심부름도 해야 하고, 물자 보급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니 같이 굶으며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어른들이 “당신은 굶지 말고 일해”, “새댁은 밥 먹어, 할 일이 많잖아?” 하며 배려해 주셨지만 그래도 미안해서 밥은 차마 못 먹고 몰래 호빵 하나 겨우 먹곤 했다.

 

구가협 울기만 하나? 웃고 놀기도 한다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울고 있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관련된 가족들

금식기도회 중간 중간에는 여흥 시간도 있었다. 내내 기도만 할 수 있나? 재미있는 오락 시간도 가지고, 지치지 않게 놀기도 해야지. 구가협은 언제나 모이면 노래도 하고 즐겁게 웃는 신나는 모임이 되어 갔다. 김한림 총무는 늘 모임을 즐겁게 잘 이끌었다.

금식을 하다 보니 처져서 기운 내자며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우홍선 씨 부인이 웃고 힘내자며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감옥에 있는 남편 우홍선과의 연애 시절 생각을 하면서 현제명의 ‘그 집 앞’을 불렀다. 퇴근하고 친정에 와서 세레나데처럼 불러주었다는 그 노래,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잔잔히 부르는 노래에 다들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놀자고 시작했던 판이었는데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들 마음이 신산한 판에 이철의 어머니와 이현배의 어머니가 분위기 살린다며 사교댄스를 추었다. 홍성에 사는 시골 아주머니 이현배의 어머니는 춤을 꽤나 잘 추었다. 춤 선생을 불러다가 동네사람들 데리고 자기 집 안방에서 ‘슬로우 슬로우 퀵퀵’ 하며 돈 들여 배운 춤 솜씨라고 하였다. 이현배의 어머니는 남자 역할을 하고, 이철의 어머니가 여자 역할을 하며 둘이서 온갖 댄스를 다 보여주었다. 구가협 농성장은 그렇게 재밌는 곳이었다. 울기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1970년대, 80년대 구속자 가족들은 그렇게 싸웠다. 웃으며, 수다 떨며, 우는 사람 달래주고, 서로 웃겨주며, 신나게, 힘차게 그렇게 싸웠다.

 

우리도 당신들을 지지합니다!


1974년 11월 14일, 일찍 금식기도회를 마친 구가협 회원들은 이른 아침 출근시간에 가두시위를 계획했다. 명동성당 언덕을 빠져나와 광교를 지나 종로2가를 거쳐 종로를 거슬러 올라가 목적지인 기독교회관까지 행진할 계획이었다.

“내 아들 내 남편 정치제물로 삼지 마라”, “나라 사랑 무슨 죄냐?”, “감옥살이 웬 말인가?” 등 4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종로2가를 지나는데 난데없이 버스창문이 열리면서 어떤 남자들이 막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우리도 당신들을 지지합니다!”

여기저기서 박수를 치며, 주먹 쥔 손을 내밀며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기운이 솟고,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내인 이경애는 그때를 생각하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단다. 그 엄혹한 시대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일어났을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긴급조치 4호 위반이었다.

사흘을 꼬박 굶은 구가협 회원들이었지만 더욱 기가 살아서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종로 3가를 접어들어 4가에 다가갈 즈음 닭장차가 가로막고 무장경찰들이 회원들을 두들겨 팼다. 그들에게 곤봉세례를 맞은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맞아봐야 감옥 안에 있는 내 가족만큼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닭장차로 막아선들 골목길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니 몇 걸음 돌아 5가까지 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결국 도착하는 데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다들 기독교회관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기독교회관 1층 로비에서는 공덕귀 여사를 비롯하여 모두 모여 그 자리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긴급조치 무효! 민청학련 무죄! 구가협 40년!

민청학련사건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기뻐하는 박형규 목사.

 

2013년 5월 대법원으로부터 긴급조치 4호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긴급조치 1,2,4,9호는 모두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해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긴급조치 무효, 민청학련 무죄, 인혁당재건위 무죄, 모든 유신 시대의 시국사건들에 대한 재심에서 재판부는 무죄를 선언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국가를 대신해서 사과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가족들이 모여 싸웠던 단체 구가협! 그것은 단순히 제 가족의 석방만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구가협 회원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으면 민주주의 탄압이 지속될 것이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으므로 스스로도 싸우겠다는 열의에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속자 가족들이었기에 누구보다 더 열정으로 싸웠다. 구가협이 없었다면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대적 국내외 홍보,  재야 지도자 그룹의 동참, 지속적인 민주화운동의 확대를 이끌어내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구가협을 이끌던 리더들은 이미 모두 고인이 된 지 오래다. 구가협의 막내가 60대 중반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구가협을 이은 1980년대의 민가협의 막내도 50대 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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