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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었던 그사람. 계훈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었던 그사람. 계훈제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자주. 민주. 통일 국민회의 사무실 앞에서 사진촬영하는 계훈제

계훈제! 한 때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184cm의 큰 키와 특이한 성, 그리고 언제나 허름한 국민복에 흰 고무신 차림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가 간지도 올 3월 14일로 18년이나 되었다.

그의 고향은 평북 선천군 심천명에서 태어났다. 홍경래의 봉기가 일어났던 다복동이 부근에 있고, 병자호란 때의 영웅이었던 임경업 장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런 땅에서 태어나자란 소년 계훈제는 열 여섯 살 때, 일제 강점기 시절 가장 대표적인 민족학교였던 신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의 교풍이 그에게 미친 여향도 컸지만 더 큰 사건은 이 곳에서 장준하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민통련 임시총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백기완, 계훈제, 문익환

훗날, 이 둘은 같은 북방 출신인 함석헌, 문익환, 백기완과 함께 형제처럼 지냈는데, 계훈제는 이들 다섯 명중에 가장 ‘대중성’이 떨어지는 인물이자 가장 완벽한 ‘재야인사’ 이기도 했다. 가장 연장자인 함석헌을 제외한다면 장준하는 국회의원도 한 번 지냈고, 문익환도 젊은 시절에서 미군 통역장교로 활동했으며, 백기완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훈제는 단 한 번도 ‘공직’을 맡거나 공직에 출마해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세상을 떠난 장준하와 문익환은 유지를 잇는 기념사업회 비슷한 모임이 있지만 계훈제는 그것조차 남기지 않았다.  

학교 시절 그이 꿈은 의사였다. 그리고 사환으로 삼 년간 일하며 돈을 모아 상경했지만 시력 검사 결과가 색맹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체 게바라, 손문, 아옌데, 호세 리잘 같은 의사 출신 혁명가를 가질 기회를 잃고 말았다. 하지만 유달리 총명했기에 최고의 엘리트만 갈 수 있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과에 1943년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3년이 무슨 해인가! 전세가 기울어가는 일제는 지식인들을 후방에 둘 수 없어 학병으로 ‘지원’을 강요하였기에 많은 이들이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원을 거부하고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신의주로 갔지만 그 곳에서 붙잡혀 강제 입영되고 말았다. 그는 평양 인근 승호리에 잇는 시멘트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했지만 이곳에서 조선민족해방당 요원들과 접촉하게 되어 당에 가입을 한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로 변신한 모교로 돌아와 이철승 등과 함께 우익 학생단체를 이끌고 반탁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였으며, 서울대 문리대학생회장으로 백범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에 노동을 하다가 얻은 폐결핵이 악화되어 거의 사경을 헤맬 지경이 되었지만 9년 만인 1958년 회복되어 사회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이 폐 질환은 반세기 동안 그를 수시로 괴롭히는 괴물이 되었다. 4.19 직후에는 교원노조 결성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5.16쿠데타로 그 꿈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1963년부터 1964년 까지는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1968년에는 월남 전쟁 파병 반대운동에 투신하였다. 1969년에는 삼선개헌에 반발하여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10월 유신 이후에는 민주수호국민위원회, 민주통일국민회의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1975년 장준하의 죽음 이후에는 문익환과 동지가 되었다.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2년 이상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5년에는 민통련의 부의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문익환의 구속으로 의장 대행을 맡아 성공회 성당 집회를 주도하였다. 1991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민련과 전국연합 상임 고문을 맡아 활동하는 등 그야말로 온 생애를 재야에서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바친 것이다.

그는 그렇게 긴 재야 생활을 하고 오랫동안 독재정권과 싸웠고, 1970년부터 10년 동안 한국 최고 잡지인 <씨알의 소리>의 편집위원을 지냈으면서도 글 역시 명예욕의 일부라면 많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나마 미완성 자서전인 《나의 투쟁, 나의 일생(가제)》을 남겼을 뿐이고, 그 책이 《흰 고무신》이란 다른 이름으로 나오긴 했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있다. 어쩌면 평생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도 통일도 모두 완성하지 못한 그에게 자서전이란 미완성으로 남는 쪽이 더 어울리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 외에는 SBS에서 방영하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그의 일생을 취재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남긴 흔적조차 많지 않다. 그는 1990년 5월 도봉구 방학동 612-30으로 전입하여 1999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안타깝게도 집은 남아있지 않고 집터는 공용주차장이 되었다. 주차장 입구 벽에 선생을 소개하는 안내 동판이 붙어 있지만 안타깝게도 주차요금 안내판에 가려있다. 마치 그의 일생을 상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봉구청과 문화원에서는 ‘도봉 인물길’이란 이름으로 김병로, 홍명희, 전태일 등 도봉구에서 살았던 현대 인물들의 집을 연결하는 탐방코스를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가해도 좋은 공부가 될 듯 싶다. 

주차장이 된 계훈제 선생 집터

그의 유택은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 공원에 있다, 그의 묘소는 입구 쪽에 있어 쉽게 갈 수 있는데, 묘비 위에 흉상이 있다. 본인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기를 바랬지만 후인들이 이것이라도 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리라.

작년 11월, 법원은 사후 14년 만, 사건으로는 36년 만에 1977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계 선생의 재심에서 14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사유 중 하나가 인상적이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가 당시 유신헌법에 비춰 봐도 위헌이라는 대법원 결정에 따라 이같이 판결했다.”

 

 관련 글   겨레의 땅을 딛고선 흰 고무신 - 계훈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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