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인터뷰
“나는 언제나 실무자 편…조직 흥망은 실무자 의지와 능력에 달렸다”
역점 사업은 한국민주주의전당 건립과 해외 민주화운동사 재조명
“정권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 있는 기념사업회가 되기를”
봄기운이 완연한 3월 18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새로 둥지를 튼 종로구 중학동의 트윈트리타워 내 이사장실에서 박상증 이사장님과 만났습니다. 해외에서의 민주화운동 경험과 기념사업회의 수장으로서의 소견, 개인 생활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래는 일문일답입니다.
-와인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스위스에서 10년을 살다 왔다고는 하지만, 가난한 간사 신분이었으니 저렴한 테이블 와인 정도를 마셔본 것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귀국 후에 점잖은 식당의 모임에 초대받으면 와인을 꼭 나더러 고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와인에 대해 서울에 있는 사람보다 더 몰랐어요. 그래서 서울 와서 내가 와인 공부를 했어요.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한 1년 와인공부를 열심히 했죠. 그래서 어느 정도 이제는 알게 되었죠. 지하실에 와인 200개가 들어가는 규모의 와인랙을 설치했는데, 지인들이 한두 번 채워주셨어요. 그 덕에 아름다운재단(이사장)과 참여연대(공동대표)에 있을 때 종종 우리 집 앞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고 와인대접도 하곤 했어요.
-민주동지회 사무국장을 역임 하는 등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셨는데.
: 1966년도에 한국을 떠나 스위스로 갔는데, 당시는 동백림 사건 직후라 분위기가 나빴어요. 나는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된 사람들과의 연계는 별로 없었죠. 그러나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한 교계를 중심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여했지요.
유신정권시대였던 1975년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WCC 제5차총회가 열렸어요. 그 전에 먼저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한 100여명의 인사가 제네바에 들러 회의를 참석하고 가시게 했죠. 특별 초청한 김관석, 안병무, 문동환 3명은 한국정부가 여권을 주지 않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어요. 제네바 회의에서 논의 끝에 국제기구를 먼저 만드느니, 한국 사람 주체의 모임이 먼저 결성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기독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민주동지회 결성을 결의했고, 아직 해체되지 않았으니 그때부터 40여 년간 제가 사무국장 역할을 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일본잡지 세카이(世界)에 지명관 교수가 ‘TK생’ 이라는 필명으로 십수년간 한국정세에 대해 기고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입니다. 군사정권 하에서 해직된 교수(덕성여대)인 지명관 선생을 일본 동경여대의 철학과 교수로 부임할 수 있도록 힘을 쓰고, 10여 년에 걸쳐 월급을 대는 일을 민주동지회가 했어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으로서의 소견을 듣겠습니다. 기념사업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그 과정에서 이사장님의 운영 기조를 말씀해 주세요.
: 내가 진짜 이사장이 된 거요?(일동 웃음)
정말 솔직한 이야기예요. 지난해 나의 취임과 관련한 소요가 있었지요. 정상화 이전은 비정상적인 상태였을 텐데, 그때를 가령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이라 하자고요. 그렇다면 지금은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 것이 맞나요?
과거에는 정권의 변화에 따라 기념사업회도 흔들렸던 것 같아요. 한 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 형성된 조직이기 때문에, 그 세력이 물러나니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 같은 인상도 있어요. 이것을 극복하고 초월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주체성을 가져야 해요.
-임기 중 역점 사업이 있으시다면?
: 임명을 받고 나서 예전 기록들을 살펴보니, 기념관(한국민주주의전당) 건립이라고 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더군요. 지난 10여 년간 추진 움직임은 상당히 있었던 것 같은데,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새로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죠. 오히려 설립 초기보다 더 나쁜 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계획했던 방안 중에서 어떤 것을 계속 추진할 수 있을지 빨리 확인을 할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2안, 3안을 마련해야지요. 1안 하나에 얽매여 시간을 끌 수는 없으니, 동시다발적으로 추진을 해보자는 겁니다. 내 임기 동안에는 힘을 쏟아볼 생각입니다만, 그러나 안 될 사업이면 다음 사람에게 부담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때가 되면 과감히 포기 선언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다른 할 일을 해나가자고 말이죠.
-해외 민주화운동의 재조명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처럼, 해외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도 여러 가지로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기념사업회도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종합적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이해를 하려면, 해외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평가를 할 것은 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에 그걸 종합적으로 전부는 못하더라도 부분적으로라도 사료를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살펴보니까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 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민주시민교육은 사업회의 미래지향성과도 연관된 중요한 사업입니다. 어떻게 추진해야 할까요?
: 사실 기념사업회에 오기 전까지 내가 강조했던 ‘시민교육’은 여기서 말하는 개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내가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선택한 국가정체성인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주공화국에 대해 교육해야 한다는 거였죠. 지금 사업회가 잘 하고 있지만, “좌파교육”이라며 편견 어린 시선도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기념사업회가 극복해 나가야 할 문제죠.
그러나 시민교육과 관련한 나의 주장은 오히려 다른 지점에 있어요. 우리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세미나를 열고 직접 시민교육을 하러 다니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시민교육의 기본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거기에 모든 사람들이 집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교육계의 탁월한 실천가이자 학자였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현재 상황에 대입시켜서, <시민교육을 위한 페다고지>와 같은 책을 쓰자는 것이죠.
-오랜 타국 생활이 외롭고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 멘토가 있으셨나요?
: 국내에서는 중학교 4학년 때 만난 강원룡 목사님을 많이 따랐고, 김재준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자)님께는 사상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지요.
해외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WCC 총무를 지낸 필립 포터 박사입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민주동지회에 큰 힘이 되어주셨어요. WCC는 극단보수에서 극단진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에큐메니컬 운동 진영에서 논쟁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조정하느냐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사모님 생전에 아주 돈독한 사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사별하신지 벌써 십 수 년이지만 자택 대문에는 아직 ‘박상증-이선애’라고 적힌 공동문패가 걸려있다고요.
: 돈독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을 잘 들은 것이죠.(웃음) 10년 투병을 했는데, 사람을 계속해서 불능 상태로 몰고 가는 알 수 없는 병이었어요. 이선애 목사가 여성운동가이자 여성신학자로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처음에는 남편을 비롯한 온 세상 모든 남자를 미워하는 마음이었다가, 나중에는 남성과의 파트너십으로 성숙해 가더군요. 가부장 문화가 심했던 그 시절에도 명절에 시댁에 가면 부엌 출입을 안 하던 사람이어서 내가 많이 곤란했어요. 그렇지만 다른 데서 보충을 잘 하는 현명한 사람이어서 어른들께도 큰 미움은 안 받았습니다. 며칠 전 이선애 목사의 연세대 동문들과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제가 이 이렇게 말했어요. “이선애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훌륭하다”고요. 정말이지 모든 면에서 나보다 훌륭했던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직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우리 집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도 하고, 와인도 한잔 합시다. 서로 오가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가지 않겠어요?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자주 만납시다.
구성원 개개인이 기념사업회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그 인식 아래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해주세요. 오늘 12시에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사람 10명을 불러다가 이사직에 임명한다고 합시다. 그런 상황에서도 실무자들이 우수하면 그 조직은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노벨상 받은 사람 10명을 데려다가 이사회를 시켜도 실무자가 시원찮으면 그 조직은 안 되는 겁니다.
조직이 되고 안 되고는 실무자의 의지와 능력에 달렸습니다. 나는 항상 실무자 편입니다.
진행 현종철, 정리 김남희 knh08@kdem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