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다하우수용소를 찾아서
내가 그곳을 처음 찾은 것은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인 지난 1999년 여름이었다. 그 동안 모은 돈을 갖고 떠나는 첫 배낭여행의 목적은 유럽 곳곳에 산재해 있는 현대사의 현장들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한국사회가 현대라는 특정 시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과 그들의 그것을 비교해보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1945년 4월까지 꼭 12년 동안 독일은 물론 폴란드 아우슈비츠 등 자신들이 침략한 전 유럽에 걸쳐 1만5천 개 이상의 강제수용소를 운용했던 자칭 ‘제3제국’ 독일, 그 중에서도 생체 실험에 사용하기 위해 최초로 실험실을 세운 곳으로도 알려져 있는 최초의 나치스 집단수용소였던 다하우수용소 답사는 제격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다하우수용소의 관람 동선은 철저하게 실제 재소자의 발걸음을 따라 가게 되어 있었다. 즉 재소자가 수용소에 처음 들어와 신체검사를 받고 막사를 배정받고, 힘이 있는 이는 노역 현장으로, 힘이 없는 이는 가스실로 보내졌을 때의 그 순서대로 돌아보며 그들의 공포를 추체험하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운명이 권력과 사회제도에 의해 어떻게 파멸의 길로 몰아쳐가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다하우수용소 역사기념관이 돋보였는 이유는 마네킹이나 비명소리 등을 이용해 나치의 잔학상에만 집중해 고발하거나 이미 철거된 수용소 건물을 억지로 복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사 현장을 관람객에게 보여줌에 있어 역사적 사실을 단순히 알리는 데서 끝내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옛 이야기를 오늘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었다.
예컨대 다하우수용소의 내부 전시물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제3제국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독일 이외의 국가에서도 이름과 정도만 조금 달랐을 뿐 어떻게 해서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사회 저변에 골고루 퍼지게 되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발을 붙일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1차대전 이후 각국 사회 내부에 쌓여가던 경제적 모순과 위기에 따른 불만을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공격을 통해 잠재우려 했고 급기야 전쟁을 통해 해소하려 했던 당시의 정치세력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쿠데타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투표를 통해 나름 합법적으로 집권한 히틀러가 어떻게 민의를 얻어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는지를 조명한 뒤, 당시 독일인 대다수는 왜 그같은 움직임에 반대하지 않고 동조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강제수용소 안팎에서 벌어진 극악한 폭력의 책임을 단순히 히틀러나 나치스에게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했든 소극적으로 지지했든, 혹은 무관심했던 대다수의 일반인들, 이른바 ‘평범한 우리들’은 과연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묻는다.
다음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 외에도 북유럽을 포함한 거의 유럽 전역에서 세를 얻어가던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의 위력과 성장세를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 전체주의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만 기세등등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왜 독일은 주변 국가들을 침략했으며, 그 땅에 1만5천여 곳에 달하는 수용소를 지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다하우에 최초의 수용소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 끈질기게 묻는다. “이 역사가 지금의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로 요약되는 전시의 맥락은 전체주의의 원인을 짚고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하우수용소 전시관 내에서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 마지막 전시실 즈음에서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 나아가 전체주의란 것은 시민 개개인과 사회의 경계심이 늦춰질 때 이름과 양상만 다소 바뀔 뿐 언제든지 다시금 발호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또 옛 기억이 서린 장소를 그대로 남김으로써 가해의 역사를 반성하는 동시에 후대를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것 외에도 당시 가해자였던 개인이나 기업은 현재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은 앞으로의 독일이 어떠한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지 준엄하게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단순히 지나간 일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은 그러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현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못본 채 하지 않고 꾸준히 되새김질하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 다하우수용소 역사기념관이 유럽의 평화를 위한 '굳건한 닻'이라고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다만 씁쓸한 것은 시선을 국내로 돌렸을 때다. 내가 유럽 현대사 답사에 처음 나선 1999년이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현대사를 다루는 시각의 편협함에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해서다.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현장 가운데 한 곳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기념관만하더라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한 1908년 이래 문을 닫은 1987년까지 형무소 혹은 교도소로 기능한 기간만 대략 80년에 이르지만 그곳에서 기념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1945년 해방 때까지다. ‘인혁당 사법 살인 사건’을 다룬 사진 패널 한 개를 제외하면 항일과 반독재 민주화투쟁, 즉 인간이 인간된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했던 역사 가운데 딱 반쪽만 따로 떼어 기념하고 있다. 과연 나머지 절반의 역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한국 사회는 과연 현대사를 올곧게 대면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