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가족의 딜레마 - 무엇을 먹든간에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회사 앞에는 유명한 삼계탕집이 있다. 지난 초복과 중복 그야말로 문전성시, 인산인해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하루동안 사람들은 닭을 얼마나 잡아먹는 걸까.
명절이 되면 TV에선 온갖 특집프로그램이 방영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노래를 부르는 이주노동자나, 육상복을 입고 뛰는 아이돌이나 상품으로 받아가는 건 똑같이 시뻘겋고 싱싱한 ‘고기 덩어리’다.
퇴근길, 고이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주당들이 찾는 곳은 골목마다 늘어선 치킨집이나 삼겹살 집이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굽거나 튀긴 고기를 먹지 않고 살아가는 한국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자신들이 먹는 고기가 사실은 살아있는 생명이었다는 걸, 고기라는 게 그 생명의 시체라는 걸, 그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고 비위생적이라는 걸 아는 한국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 육식에 대하여
‘고기를 먹어야 하는 날’로 알려진 ’복날’은 사실 농번기의 노동력을 제고하기 위한 풍습이었다. 먹을거리를 잘 만들기 위해 먹을거리로 몸을 보하는 지혜. 사실 오늘날 농업이 전체 노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 남짓한 상황에 복날 보신음식을 챙겨먹는 일을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복달임 음식은 당연히 ‘고기’라는 인식도 마땅치않다. 우리가 ‘고기’를 일상적으로 먹기 시작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육류소비량은 5.2㎏이었다. 33년 만인 2013년에는 42.7㎏으로 늘었다. 육류 소비 증가와 유사하게 비만율도 높아졌고 그 결과 10명 가운데 3명 이상이 비만인 사회가 됐다.
돼지고기는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로 2013년 현재,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20.9㎏이었다. 특히 한국사람들이 많이 먹는 삼겹살의 경우 수입량이 급격히 늘고 있다. 2014년 냉장·냉동 돼지고기 삼겹살 수입량은 11만6034톤으로 2013년보다 26% 늘어났다. 닭도 다르지 않다. 2013년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11.5㎏이었다. 연간 소비량은 약 6억 마리 수준인데 삼복 시기의 한 달여 동안 소비되는 양이 총소비의 40%에 육박한다.
이 엄청난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건 ‘공장식 축산’이다. 소며 돼지며 닭이며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축사에 가둬놓고 살을 찌운다. 7월 너른 풀밭에 제초제를 뿌리면서 소들은 일생 풀 한 번 뜯지 못한다. 기계에 연료넣듯 주입하는 사료는 유전자 조작 곡물이고 더럽고 좁은 축사에서 시들어간 몸은 항생제가 지탱한다. 사람이 먹는 대부분의 동물들은 늘 약물중독 상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판위의 삼겹살과 닭다리와 스테이크를 ‘생명이었던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티비에서 종종 소개되는 동물학대 현장에 분개하다가도 그날 저녁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는다. ‘생명’과 ‘상품’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장.
육식은 사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먹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입맛을 위한 것. 우리는 이제 살기 위해, 건강하기 위해 먹는게 아니고 즐기기 위해 먹는다. 식사가 쾌락의 방법이 된 것이다.
우리들의 뇌가 그렇게 육식에 중독된 까닭은 포만이라는, 겨우 5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획득하기 어려웠던 쾌감을 오늘의 우리들은 싼값에 손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 시스템과 항생제 사료가 가져온 싼 고기의 소비는 사실은 싼게 아니다. 고기값에 포함되지 않은 값비싼 비용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비용은 우리 몸과 지구에게 청구된다. 비만을 비롯한 고지혈증,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 등등 수많은 성인병의 창궐과 이를 치료하기 위한 진료, 치료비는 탐식의 대가로 우리가 치르는 비용이다.
# 채식에 대하여
채식은 ‘유행’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 유행이 좀 더딘 편이지만 최근 채식을 선언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의 삶의 방식이 소개되면서 채식과 동물보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추세다.
하지만 이에대한 구조적 이해가 동반되고 있을까. 동물보호와 채식, 유기견과 유기묘를 사랑하는 패셔너블한 삶은 공장식 축산 구조와 비대해진 애완동물 시장의 문제인식에 기반하고 있을까. 인간과 함께 사는 고양이들을 위해 한 해 동안 닭 300만 마리가 죽어나가는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인도인 한 사람이 고작 1년에 5.4킬로그램의 고기에 만족할 때, 미국 고양이 한 마리는 연간 약 21킬로그램의 고기를 먹는다. 고양이 주인이 채식을 하고 하지 않고는 상관없다.
채식은 유행이나 동물에 대한 온정적 관심이 아니라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실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으면 아프게된다. 인간의 날카로운 송곳니는 인간이 꾸준히 육식을 하며 진화해왔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송곳니가 증명하듯, 인간은 수백 만 년 진화하면서 고기도 먹었고, 풀도 먹었고, 곡류도 먹고 살았다. 원천적으로 채식만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또다른 근본주의다. 인간이 고기를 먹지 않았다면 지금의 뇌 용적량을 갖지 못했다. 즉, 문자와 문명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채식에 대한 강변, 유행은 또 서구, 북반구 지식인들과 중산층들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농업 중심의 개발도상국, 노동력이 곧 생존인 제3세계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신념을 위한 채식은 일종의 폭력이다. 사실 그 개발도상국들의 육류소비 방식은 서구의 그것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이지도 않다.
모든 생명들간의 조화, 윤리적 삶을 위해 채식을 권장하는 것이라면 그보다는 먼저 자동차 사용을 줄이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생활물자소비를 줄여아 한다. 공장식 축산방식과 단일경작에 대한 비판에 날을 세우고 생태를 파괴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산업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에 더 예민해져야 한다. 패션으로만 소비되는 채식은 어떤면에선 더 비윤리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 잡식가족의 딜레마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만든 황윤감독은 자신을 ‘돈가스 마니아’로 소개한다. 자신뿐 아니라 남편과 아들도 고기에 열광한다. 감독은 전시용으로 길드는 동물원의 야생동물들을 조명한 전작 <작별>이나 로드킬 당하는 야생동물에 대해 다룬 <어느날 길 위에서>를 통해 동물권과 생명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감독 자신도 자신과 가족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고기’를 그 생명과 연관짓지는 못했다. 구제역이라는 재난과 살처분이라는 인간의 잔혹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350만 마리의 돼지가 한 번에 죽어나간 구제역 파동을 접하고 감독은 돼지가 살아있는 생명이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돼지’를 찾아나선 감독이 드디어 만난 돼지는 살아간다기보다는 살아지고 있는 상태였다. 악취를 풍기는 축사 안에서 소톨(돼지가 몸을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해놓은 금속 틀)과 항생제, 성장 촉진제에 갇혀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하다 때가되면 죽어버리는. 생명이라기보단 기계의 부품같은 모습.
감독은 이번엔 공장식 축산을 하지 않는 시골농가를 찾았다. 돼지의 분뇨로 채소를 기르고 그 채소가 다시 돼지의 먹이가 되는 방식은 전통적인 농업의 순환에 한층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수퇘지는 고기의 냄새를 더 좋게 하기위해 거세를 당한다. 암컷은 끊임없이 새끼를 낳고 자식들과는 생이별을 이어간다.
과거에는 축산과 도축의 과정이 마을 안에서 이뤄졌다. 탄생과 성장, 죽음, 탐식의 과정이 삶에 밀착해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고 축산과 도축의 과정이 도시인들의 삶과 분리되면서 소와 돼지가 공장제 축산 자본의 이윤을 위해 '단백질'로 추상화됐다. 가축과 인간이 함께 삶을 공유하던 수십만 년의 진화과정에서 오늘날처럼 가축을 맛과 포만감의 대상으로만 인식했던 적은 없었다. 고기를 먹으면서도 그 고기가 생명이었음을 직관하는 관계는 사라졌다.
돼지에 대한 온정적 시선, 윤리적으로 올바른 먹거리 생산에 노력하더라도 근본은 ‘관계맺기’에 달려있다. 삶은 다른 생명의 죽음을 딛고서야 영위할 수 밖에 없다는 그 근본적인 깨달음.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의 관계맺기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소하지만 절실한 깨달음.
영화의 시선이 감독의 어린아들 도영과 새끼돼지 돈수를 오버랩하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감독이 아들을 임신하고 출산하던 과정은 어미돼지 십순이 새끼돼지 돈수를 낳는 장면과 겹쳐진다. 십순이 돈수를 돌보는 장면은 감독이 도영을 보살피는 장면과 매칭된다. 돼지도 생명임을, 태어나고 죽어가는 과정임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이라는 섭리, 섭생이라는 필연에 귀속된 존재임을 자연스레 익혀가는 과정이다.
# ‘먹는 것’에 대하여
요즘의 대세는 먹방이고 쿡방이다. 한동안은 맛집이 유행이더니 지금은 집밥과 요리가 브라운관을 점령했다.
하지만 집밥이라는 개념이 이제는 너무 보편화된 ‘외식’에 대항한 개념이다. 식당에서 사먹는 밥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말. 우리나라는 OECD에서 요리에 소모하는 시간이 가장 적은 나라다. 식재료를 보고 만지는 일이 거의 없다. 만들어진 요리가 간단한 주문으로 내 앞에 놓여지는 게 전부다. 아직 피가 흐르는 고기와 흙이 묻은 채소를 보지 않으니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피부로 인식할 기회가 없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딛고 살 수밖에 없다. 섭리를 역행해가면서까지 채식을 강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돼지 분뇨가 채소를 키우듯 농업은 순환적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순환의 지혜를 아는 농부들과 도시 사람들의 관계가 복원됐으면 좋겠다. 도시의 콘크리트 덩어리 대신에 각자의 마당에 텃밭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 노동 시간이라도 줄여서 각자 요리할 삶을 가졌으면 좋겠다. 먹거리는 단순히 탐식과 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생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