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구조 해체로 러시아 민주주의 후퇴 막아야
기득권 구조 해체로 러시아 민주주의 후퇴 막아야
글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 moscow4@hanmail.net
소비에트는 몰락했지만 국가사회주의 유산 건재
초기 소비에트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공산당 지배하에서 국가 관료 기관으로 변모했다. 이론상으로 ‘노동대중이 지배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민주주의적 체제였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 속 소비에트는 극도로 비민주적이며 관료화된 공 산당의 직접적 통제하에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더 억압적인 체제로 변질되었다.
이후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국가사회주의의 유산은 건재하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비중심부 지역에서 흔히 나타나는 권위주의적 성격도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 잣대로의 평가를 거부하며 러시아적 특수성, 러시아식 민주주의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독재 미화의 전형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체제 전환 이후 25년이 지난 현재 소위 민주화 이행과 민주주의 공고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학술적 논쟁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러시아의 권력 구조나 제도 등을 설명하기 위해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의사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 관리 민주주의 등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각종 ‘민주주의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현재 3기에 이른 푸틴 체제를 권위주의나 독재 체제, 심지어 파시스트 레짐으로까지 규정하기도 한다.
✽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연설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 ©연합뉴스
정부의 선거 통제 강화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선거나 정당을 중심으로 행태 및 제도적 차원에서 민주주의 공고화 여부를 판별하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론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는 정치체제들조차 선거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수용한 경우가 많다. 선거나 정당 등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치제도나 정치과정들은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한 사실상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인 것이다. 특히 시민사회로부터의 통제가 발달한 국가들과는 달리 체제전환기 국가들의 경우 심지어 선거나 정당 운영은 권위주의 체제와도 병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러시아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면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민주주의가 있음을 주장한다. 보편적인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러시아적 문명에 기반한 독특한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는 주권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 민주주의는 권력의 분할이나 시민사회와의 갈등이 아니라 통합과 집중을 특징으로 하고, 특히 대통령이 이러한 통합과 집중의 중심이자 균형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민주주의의 절대적 요소가 아니라면서 러시아에서의 다원주의란 서구 국가와 자본, 그리고 그들과 연계된 반민족적 올리가르히(올리가키의 러시아어–과두집단)와 동일시되어 국가를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푸틴 스스로도 이 개념을 사용하면서 민주주의적 제도는 러시아적 현실, 전통과 역사에 맞게 이식되어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구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지속되면서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기에 있는 러시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주권의 유지와 이를 위해 필수적인 대내적 주권 강화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주권민주주의의는 반서구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주의적 성향의 강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최소주의에 입각하여 정치적 영역으로 한정하더라도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러시아의 선거 제도는 정기적, 안정적 선거가 이루어져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선거 등록부터 선거 운동과 홍보,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 선거는 자유롭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지도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러시아의 언론매체들은 국가의 직·간접적 통제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선거 국면에서 철저하게 정부 및 권력정당 편향적인 보도 및 방송편성을 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선거 통제 강화 조치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1993년에 비례대표제로 225명, 다수대표제로 225명, 도합 45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하원(두마) 선거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정부의 통제 강화 조치로 2004년 법 개정을 통해 다수대표제가 폐지되어 진입장벽이 높은 순수비례대표제로 변화되었다. 지방의회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순수 다수대표제였다가 점차로 두 제도가 혼합된 혼합제로 변화하고 있다. 2004년에는 지방행정부 수장 선거마저 폐지되고, 그 대신 중앙 정부가 임명하는 방식으로 법이 개정되면서 지방행정부 수장들의 권위주의적 성격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 외에도 선거권의 위임과 선거관리위원회의 방조, 투표용지의 매매와 위조 등의 행위는 푸틴 정권 후반기로 올수록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방선거의 경우 유권자에 대한 협박이나 부정투표용지의 대량 제작 등 심각한 범죄적 성격을 띠는 행위가 확산되고 있다. 또한 선거관리위원회가 일방적으로 야당 후보를 제재하고, 국고보조금을 극도로 불공평하게 배분하는 등 선거의 불공정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 러시아의 반 푸틴 집회 ©연합뉴스
✽ 2012년 러시아 대선 결과 발표 모습 ©연합뉴스
야당의 주변화로 인해 무력해진 정당제
정당체제 역시 1999년과 2004년 선거를 기점으로 표면적으로나마 유지되어 오던 민주주의적 성격을 급격하게 상실하고 있다. 푸틴의 등장과 함께 조직된 권력 정당인 ‘통합러시아(United Russia)’당은 행정적 메카니즘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대통령과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행정부에 철저하게 종속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푸틴 2기인 2000년대 중반 이후 서구와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좌/우, 자유주의/민족주의, 시장주의/국가주의 등 다양한 프레임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유권자들의 지지를 대거 획득했다. 대부분의 야당들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어용 야당화된 가운데, 별도의 어용 야당까지 생겨났다. 결국 대표적 야당인 공산당마저 주변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당 창당 요건의 강화 등으로 신생 정당의 원내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2001년, 2005년 정당법 개악에 의해 강화된 현상이기도 하다. 몇 차례 강화된 NGO 등록법 등도 러시아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요소인 시민사회를 옥죄는 대표적인 악법이다.
서구 국가들은 러시아가 또 다른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심각한 견제를 하고 있다. 러시아 지배 계급은 이러한 갈등으로 인한 위기를 적극 이용, 애국주의적, 반서구주의적 수사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적 시민사회를 질식시켜 가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이로써 정치적,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조차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러시아는 기존의 정치적,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국한해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기존의 민주주의론의 주류적 흐름을 극복해야 한다. 러시아에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지배 기득권 세력들의 사회경제적 지배 구조의 지속에 있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실질적인 권력 분점과 특권적 기득권 집단들의 사회적, 경제적 독점이 해체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의 대안적 정책이 덧붙여질 때, 기득권 구조는 해체될 수 있을 것이며 민주주의는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시절 ‘좌파적인 것’에 대한 왜곡된 경험과 올리가르히로 대변되는 기득권 지배 세력의 압도적 힘의 우위로 인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대안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전진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패를 막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