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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과 그 일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과 그 일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2013년, 가산 디지털 단지역 옆에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 금천 순이의 집’이 탄생했다. 가산 디지털 단지 역에서 내려 2,3분 거리인데 서민 주택가를 지나야 한다. 이런 시설로서는 보기 드문 위치지만 시설의 ‘성격상’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이 체험관은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과 한국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구로공단의 역사를 지금의 청년들에게 전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림1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                                              그림2 당시의 벌집촌

구로공단은 2014년에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당시 기술과 자본이 모두 없었던 우리나라는 저임금에 의존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시작했고, 한국수출산업공단이라는 정식명칭을 단 구로공단이 1964년부터 당시에는 영등포구였던 구로와 금천구 일대에 조성되었다. 공단은 1973년에는 무려 6백만 평 규모에 이르게 되었고, 노동집약적인 섬유, 봉제, 전자 및 가발 등의 잡화를 생산하는 수출기업들이 대거 입주했다. 그 노동력은 주로 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 10대 여공들이 맡았다. 임금은 형편없었지만 수출 선적 날짜에 맞추기 위한 철야 작업이 많았다. 이 때 각성제를 비타민이라고 속여 먹이는 사업주도 있었고, 이 때문에 나중에 결혼한 다음 기형아를 낳는 여공들도 있었다고 한다. 미싱대와 프레스 공장에서 잘려나간 손가락이 구로공단에서 1년에 두 가마니가 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산업재해희생자 위령비는 엉뚱하게도 보라매 공원에 서 있다. 하기야 5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삼풍참사 위령비도 현장이 아닌 양재 시민의 숲에 서 있는 나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 ‘칙칙한’ 위령비는 그 놈의 땅 값 때문에 공원이 아니면 갈 곳이 없는 실정이다.   

물론 여공들의 주거환경도 형편없었다. 임금이 워낙 낮기도 했지만 고향에 오빠나 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혹은 고향의 부모님께 소나 돼지를 살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였다.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에는 그녀들이 살던 벌집들을 잘 볼 수 있다. 1980년대 이 곳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소설가 신경숙은 그의 자전적 소설 <외딴방>에서 '벌집촌'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중략)…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수십 가구가 사는 데도 화장실은 달랑 한 개였고, 미로 같은 계단 끝에 발만 간신히 뻗을 수 있는 서너 평의 방에서 살아야 했던 게 당시 여공들의 생활이었다. 그나마 혼자서는 사글세를 감당키 어려워 2평 남짓한 단칸방에 세 명이 동거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철제 프레임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을 들여놓으면 셋이서 모로 누워 쪽잠을 자야했다.

방마다 화장실이 없어,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났는데도 단 두 개 밖에 없는 공용화장실에 긴 줄을 서서 아침을 준비했다. 공용화장실 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공동세면장으로 발길을 돌리면 세면장도 벌써부터 북적이고 있었다.


그림3 금천 순이의 집 내부

하지만 구로 공단 여성 노동자들은 그대로 참고 살지만은 않았고, 떨쳐 일어나 민주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의식화에 큰 공헌을 한 위장취업자들인 故 김근태, 손학규, 김문수, 심상정, 원희룡 등은 현재 쟁쟁한 정치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체험관에도 그에 대한 내용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985년 6월, 구로 1동에 위치한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파업이었고 이는 바로 구로동맹파업으로 연결되었다. 1946년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주노조 간의 연대 투쟁은 1970년대 노동 운동의 고립되고 분산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동맹 파업은 노동 운동의 대중화와 정치적 지향을 구체화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 구로공단의 노조 조직률은 25%였고, 특히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월급이 오르면 공단을 넘어 전국에 영향을 미쳤다. 수도 서울의 공단 노동자들이 정권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보호무역주의의 확대와 임금상승, 3D 업종 기피 및 제조시설의 해외 이전 등으로 경공업 중심의 노후화된 구로공단의 ‘경쟁력’으로는 더 이상 버텨내기 힘들게 되었다. 수출과 고용은 각각 1988년에 42억 달러, 1987년에 7만 3천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전환되어 공동화가 시작되었다. 결국 단지를 재개발하여, 제조업 중심의 산업단지를 벤처, R&D, 정보·지식기반산업 중심의 도심형 첨단산업단지로 개편하는 사업이 추진되어, 2000년 2월 14일,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결과 아파트형 공장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첨단 정보지식형산업, 연구소, 벤처기업 등이 입주하는 도시형 산업단지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구로공단의 사장님들은 이 때 땅을 팔아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사실 수도권 일대의 공장주 중 사업으로 돈을 번 이 들 보다 택지 전환이나 지가 상승으로 인한 보상금으로 돈을 번 이 들이 훨씬 많다. 1990년대 구로공단의 대표적인 민주노조 사업장인 한국KDK 자리에는 15층 백상스타타워가 들어서 있고, 구로동맹파업의 주역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이 있던 자리는 마리오 아울렛, W몰, 현대아울렛 등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이 1990년대까지 한국을 뒤흔들던 노동운동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1호선에는 가산 디지털 단지역이 있고, 2호선에는 구로 디지털 단지역이 있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데, 두 군데 다 ‘첨단 이미지’를 가진 역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어 보인다. 참고로 구로 디지털 단지역의 옛 이름은 구로공단역이었고, 가산 디지털 단지역의 옛 이름은 가리봉역이었다. 지금은 중국동포가 상권을 장악해 ‘가리베가스’라고 불리기도 하는 가리봉동은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이 몸을 부비고 피곤한 몸을 눕혔던 쪽방들은 물론 그들이 푼돈으로 배를 채우는 순대, 떡볶이를 파는 시장이 있었다. 박노해 시인의 <가리봉 시장에서>가 이곳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이제는 주위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안양천을 넘는 수출의 다리는 그 때의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렸던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표지판은 많이 퇴색해 있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구로 공단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첨단 공단에서 하청의 하청으로 일하는 ‘IT 노가다’들에게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나 노조 결성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비록 잘려나간 손가락이 구로공단에서 1년에 두 가마니가 된다는 식의 산업재해가 드물어지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무대로 ‘21세기 형 노동운동’이 다시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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