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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마리아 - 불경한 그녀들의 노동

레드마리아 - 불경한 그녀들의 노동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그녀들’을 처음 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이사 직후 아직은 낯선 동네 어름을 헤매다 들어선 골목, 헐거운(?) 옷차림의 그녀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가 심드렁하게 날 쳐다보던 모습이 ‘그녀들’에 대한 첫 인상이다. 있어선 안될 곳에 들어섰다는 생각만 들었다. 황급히 골목 밖으로 나서는 길을 찾으면서도 눈은 그녀들을 힐끔거렸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그녀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왕성한 성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을 비하할 목적으로 그녀들의 직업을 사용했다. 사춘기의 남자애들이 떠올릴 수 있는 직업군에서 상대에게 가장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직업은 그랬다. ‘창녀’, 욕설의 끝판왕.

많진 않았지만 머리가 좀 굵고 또래 보다 조금 일찍 철이든 몇몇은 그녀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어려운 가정환경과 잘 풀리지 않은 인생이 내던져진 기구한 삶의 여성들. 나중에 대학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고나선 ‘계급구조’나 ‘가부장제’ 같은 말들로 표현이 바뀌었지만 그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까운 그녀들, 구제의 대상.


‘레드 마리아’는 성노동자들을 비롯한 여성의 ‘몸’과 ‘노동’에 관한 영화다. 영화에는 한국과 필리핀의 성노동자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영화는 성노동자들과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임노동 관계를 부정한 여성 홈리스 등을 통해 노동이 어떤 것이냐는, 특히 여성의 노동과 여성의 몸에서 비롯한 여남의 차이, 그리고 임노동관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섹슈얼리티 노동’의 진짜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강변이나 해설, 주장이 아닌 질문이다. 영화는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질문일 뿐이다. 이 영화가 주장하는 단 한가지라면 당신이 알고 있던 상식에도 그 이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성노동은 노동일 수 있느냐는 질문

영화 ‘레드 마리아’를 연출한 경순 감독은 ‘레드 마리아’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당시 있었던 일화를 언급한 적 있다. 당시 ‘레드 마리아’를 단체관람 한 어느 여성단체의 활동가들은 감독과의 대화에 토론자로 참석한 성노동자들을 ‘성노동자’로 지칭하는 것을 거부했다. 활동가들은 그녀들을 ‘성노동자로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경순 감독은 “당사자가 성노동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지만 활동가들은 한사코 그녀들을 ‘성노동자’로 부르지 않았다.

근대 이전 성적 서비스를 담당했던 여성들에 대한 이름으로는 기녀, 창녀, 유녀, 해어화, 갈보 등이 있었다. 이러한 이름들은 이들 여성에게 ‘노는 (娼)’여자라는 이름을 붙임으로 규방 여성들과 상반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말 하는 꽃’이라는 의미의 해어화 같은 경우도 남성들에 의해 감상되는 꽃에 그녀들을 비유함으로 수동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근대 이후에도 그녀들을 지칭하는 언어는 그녀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단정하고 있다. 성매매특별법에서는 “성매매를 강요당하거나, 마약 등에 중독됐거나, 청소년이거나, 사물을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미약한 자, 장애인, 인신매매된 자”까지 포함해서 ‘성매매 피해여성’이라고 보고 있다. 성특법의 관점대로면 성매매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된 것’이며 성매매여성은 곧 성매매 피해여성이다.

어떻게 부르는가, 어떻게 불리는가, 누가 부르느냐는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다. 그 이름 자체로 존재가 가시화되기도, 은폐되기도, 대상화, 타자화 되기도 한다. 지금 그녀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는 분명히 인신매매나 빚더미에 억눌려 원치않는 성판매(‘성매매’라는 언어는 분명히 잘못됐다. 여성은 성을 매매(賣買)하지 않는다. 오직 판매한다. 성매매라는 말은 이 관계에 존재하는 명백한 남성권력을 은폐한다. 이 글에서는 ‘의미의 전달을 극히 방해하지 않는 한’ 성매매 대신 성판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를 강요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이는 성판매를 생계유지를 위한 자발적 수단으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혹은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 패러다임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성급한 일반화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혹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기도 한다.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성매매 피해여성’이라는 이름은 성서비스를 거래하는 여성들을 적극적인 경제활동 주체, 일을 하는 노동자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윤락녀(윤락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를 타락시키는 행위다)라고도 불리며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피해여성으로 불리며 동정의 대상이 된다. 그도 아니라면 어린 날의 내가 그랬듯이 조롱과 비하의 대상이 된다. 무엇이 됐든 자신들의 삶으로 정의되고 평가받는 것이 아닌 대상화, 타자화된 존재로만 존재하는 것. 


이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한 가지는 피해자가 아니므로 동정어린 눈길로 보지 말라는 것.

성노동자권리모임 GG의 활동가는 “성 노동은 기자가 기사를 쓰고 타이핑을 해서 돈을 버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권장할 만한 직업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죄의식을 가질만한 잘못도 아니”라는 것. 그녀들에게 성판매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버는 ‘경제행위’에 다름아니다. 경순 감독의 레드마리아2에 등장하는 성노동자 연희 씨도 성노동이라는 ‘직업’을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오히려 아르바이트 하던 바(Bar)에서 사장에게 당했던 일들이나 등록금을 벌기 위해 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더 ‘착취’에 가깝다고 했다.

전직 매춘인 마고 세인트 제임스는 “한 시간의 서비스에 대해 돈을 받는 것과, 한 시간 타이핑에 돈을 받는 것, 무대에서 한 시간 연극함으로써 돈을 받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구분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통한 노동이든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의미.

‘성매매근절주의’에는 남성중심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성판매, 매춘의 착취 / 피착취의 구조, 억압구조에 대한 우려도 있다. 그러나 다른 분야의 노동에서도 억압과 착취구조가 발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노동과 산업이 잘못됐다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성노동만을 특별히 다른 층위에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각 노동이 각각의 특성을 지니듯 (억압과 착취구조에도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성노동에도 대항해야 할 특성과 인정해야 할 특성이 있다. 

결국 성노동도 여타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몸을 써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노동’이다. 또한 동시에 ‘성노동’을 포함한 여성의 노동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

그렇다면 이 사회가 성노동만을 특별히 취급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레드 마리아’는 비단 성노동뿐 아니라 여성의 몸과 노동에 대한 통제를 이야기한다. 그건 노동의 개념에 대한 재정의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이미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성노동을 비롯한 모든 노동에서 제대로 된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섹슈얼리티에 따라 노동 개념 역시 재정립 돼야 한다는 것이 감독이 ‘레드 마리아’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다.

# 노동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질문

노동의 개념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의 언어로 정의된다면 여성의 노동, 특히 재생산 노동이 배제되는 현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상품을 만드는 노동이 생산 노동이라면, 그 노동력은 가사와 돌봄 노동을 통해 재생산된다. 육아, 가사 도우미, 노인 돌봄 서비스처럼 일부 재생산 노동은 임금노동으로 편입되고 산업으로 재구조화되지만, 아직도 대부분 가정에서 이뤄지는 가사노동은 부불노동이다. 그야말로 “가장 소외된 노동”. 

특히 유교 문화를 가진 한국은 여성의 노동을 특히 가사노동에 국한해 이야기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전업주부 임금 계산 프로그램에 따르면, 하루 평균 12시간 일하는 40대 주부의 월급은 약 380만 원이다. 연봉으로 환산하면 4500만 원 수준. 여성이 '가족을 위한 헌신'을 바탕으로 사실상 24시간 노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가사노동을 임금노동으로 환산하는 단순 접근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치무라는 도쿄 하라주쿠의 요요기 공원에 천막을 치고 살아간다. 노숙인이다.

그녀는 소일거리로 면 생리대 만드는 일을 하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음식 나누기 모임'을 열어 거리에서 음식을 만들고 노숙인들과 나눠 먹는다. 그녀는 노동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자본으로 구축된 안락함을 거부한 채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그녀가 택한 삶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녀가 구축한 삶의 형태는 이 사회가 필수 불가결로 규정한 ‘노동’에 대한 염증에서 출발한다.

이치무라의 삶과 가장 반대에 있는 건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종희의 삶이다. 종희는 기륭전자에서 해고된 후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라는 한국사회의 노동의 현실이 집약된 삶이다. 기륭전자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895일간의 장기농성을 벌이며 6번의 추석과 여섯번의 설을 거리에서 맞이했다. 

18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된 사토 역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다. 파나소닉이라는 거대 기업을 상대로 복직을 위해, 홀로 싸움을 벌여나가면서 또 다른 삶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토의 삶 역시 자본주의적 노동관계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토와 종희 모두 길었던 투쟁 끝에 복직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레드 마리아

워낙에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등장한 영화 라서 그런지 이야기의 심도와 연결성, 개연성에서 한계를 보인다. 여성의 노동, 성노동, 비정규직, 임노동. 영화가 다루고 싶었던 이야기가 워낙에 거대한 담론이기도 하다. 임노동관계를 거부한 이치무라와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종희와 사토, 성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희영의 삶은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이 모든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 한가지를 찾아낸다. 여성의 배. 영화는 여성들이 자신의 배를 화면에 드러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감독이 보여준 여성의 배는 곧 생명이다. 

생리와 성관계, 임신과 출산은 자궁에서 출발하고 그 자궁을 감싸고 있는 배가 바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쌓여가는 지점이다. 사람들의 배가 매끈하게 근육이 잡혀있는 경우를 보기란 쉽지 않다. 주름지고 처진 배, 말랐지만 살이 붙은 배, 임신으로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배 등 제각기 주름진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화보에서 나오는 날씬하고 탄탄한 배가 아니더라도 이들의 생명력을 대변하는 배는 ‘그들의 일상’을 살아냄으로서 만들어진 또 다른 훈장이다.

영화의 말미에는 영화 출연자들이 그들의 배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모습들이 이어진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얼굴을 볼 수 없는 매끈하고 통통한 배의 사진들이었지만 피날레는 주름진 삶을 살아온 여성들이 그들의 배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배의 주름이란 곧 삶의 주름, 생명의 주름과도 같은 것. 

배에서 생명을 낳고 삶의 주름을 배에 새긴 여성들은 곧 마리아다. 하지만 순순히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불경한 마리아들. 레드 마리아.

노동과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때로는 자신이 선택했던 일이 인생의 경로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신경 쓰지 않는 자본주의의 하부 계급에 속하는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어떻게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벽을 넘어 어떻게 손을 내미는 지, 어떻게 레드마리아가 돼 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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