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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아시아 민주주의 연구방문단, 타이완을 가다

잊지못할 2·27 천추에 남을 2·28

글  김석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 / coreeall@naver.com


들어가며> 臺灣? Taiwan?

타이완엔 두 번째다. 지난겨울, 아무래도 때가 되었다 싶어 타이중과 타이베이를 들렀는데 어림보다 빨리 아홉 달 만에 오게 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국제협력사업인 [서울민주주의포럼]의 길을 닦으러 왔지만 그보다 더 넓게 타이완의 흐름을 훑어보는 실마리를 얻었다. 고마울 따름이다.

지난해 왔을 때 이미 타이완은 우리가 어슴푸레 알고 있는 대만이 아니었다.
“다 같은 한족이 아니야?” “외신에는 허구헌날 국공합작 한다고 나오던데.”
“China와 Taiwan이 뭉쳐진 Chiwan을 우리 기업이 어떻게 뚫고 나가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은 참패했으며 앞으로 반년도 채 남지 않은 2016년 1월 14대 총통선거는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

세 번째 정권교체다. 그러나 양안관계만 아니라 국제정치에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독직사건으로 천수이벤 총통이 무너지고 마잉주 총통이 들어섰을 때만 하더라도 ‘하나의 중국’에 손사래치고 타이완의 독립을 말하는 민진당 지지는 바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거꾸로다. 심지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손문을 욕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놀라운 일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날이 서게 만들었을까. <2.28>이다.
대한민국에서 1987년 1월14일 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 민주화시위가 불붙었다면 타이완에서는 1987년 2월28일 즉, <2.28> 40주년이 민주화의 거센 물결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미 민주화가 ‘지나간 역사’로 느껴지는 바가 있다면 타이완에서 민주화는 아직도 꿈틀거리는 ‘오늘의 역사’다.

그 바탕에는 4백여 년에 이르는 타이완의 슬픈 역사가 있다.
지도에서는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복건성과 마주하고 있어 텃밭처럼 보이겠지만 물살이 워낙 거세어 큰 배로 쳐들어가면 모를까 누구나 쉽게 넘볼 곳이 아니었다.
하여 16세기까지는 물결 따라 밑에서 올라온 말레이-인도네시아 계통의 사람들이나 터 잡고 사는 호젓한 곳이었다. 그러나 1590년부터 모든 게 달라진다.

1590년 포르투갈 들어옴 / 1624~1662 네덜란드 식민지 /
1644∼ 명나라 망하자 복건성, 광동성에서 많은 한족들이 건너옴 /
1662~1683 鄭成功 세력의 저항과 청나라의 타이완 점령 /
1683~1895 청나라 통치 / 1895~1945 일본 식민지 / 그리고 국민당

명나라 때 鎖國과 짝을 이룬 사실상의 棄民政策으로 오늘 동남아에 퍼져있는 8천만에 이르는 客家人들이 시나브로 나타났지만 그들조차 발 디디지 않은 타이완은 명나라의 멸망으로 많은 한족들이 몰려왔기에 겨레로서의 정체성은 몰라도 나라(State)로서의 정체성은 딱히 말하기 어렵다.
그리 따지면, 명청 교체기에 건너온 절대다수 內省人(84%, 外省人은 14%)이 봤을 때 여러 차례의 3백여 년 식민지를 거치고 그나마 맞이한 반가운 이들이 1945년부터 해일처럼 다가온 국민당 군대와 대륙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에 져서 쫓겨 온 그들은 매우 거칠었다. 그 부대낌이 터져 나온 게 1947년의 2.27이었다. 타이페이 역 가까이에서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던 할머니를 대륙에서 온 단속원이 마구 때리자 시민들이 항의하니 경찰이 총을 꺼내들었다.
다음 날부터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타이완의 여론 주도층 인사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여론 주도층을 앞장세워 사태를 해결하려 한 게 아니라 아예 저항의 싹이 될 수도 있는 이들을 앞뒤 가리지 않고 잡초처럼 없앤 것이다.

이윽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3월8일 대륙에서 2개 사단의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아름답던 타이완은 피비린내 나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정부 발표로만 2만8천이다.
그 뒤 타이완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백색테러가 벌어지는 계엄시대였다.
이리 되니 3~4백 년 앞서 바다를 건너온 이들에게 대륙 사람들은 더는 반가운 이들이 아니라 식민지보다 더 가슴에 한을 심어준 사람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1987년부터 1996년 직선제 총통선거까지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타이완 또한 민주화되었으며 정권교체가 일상사가 되는 나라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를 기다리지 못하고 국민당 사람들과 ‘하나의 중국’을 너무 서두른 북경에서 상처를 덧내었다. 



어찌 보면 곧 있을 총통선거와 민심의 흐름은 그 맞바람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이를 어찌 봐야 할까. 김칫국 마실 일이 전혀 아니다.
이 곳 여론 주도층들 사이에서 아직도 한국을 의리 없는 나라로 보는 눈이 있다.
카이로 회담에서 그 많던 식민지들 가운데 한국만 꼭 집어 독립 얘기를 했는데 6.25 때도 누구보다 앞장섰는데 단교도 모자라 대사관까지 넘겨줬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억울하기도 하다.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에서 미-일은 1972년 일찌감치 발을 뺐음에도 한국은 1992년까지 나름 버틸 만큼 버틴 게 아닌가.

어쩔 수 없다. 한국이 비록 컸다고는 하나 아직은 미-일과 견줄 수가 없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북경의 동북공정 바람까지 겹쳐져 암세포와 같은 중화주의 냄새도 웬만큼 배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타이완에 嫌韓이 퍼지면 우리만 손해다.
민진당이 재집권할수록 더더욱 국제무대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타이완과 한국은 손을 잡고 통일외교의 너른 자락을 펼치는 것만이 답이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두 나라 말고 어디에 있는가.

150804> 中正紀念堂, 그 짧고 굵은 이야기

첫 날이다. 사업회의 염동해-이현윤 두 베테랑과 함께 타이완으로 간다.
밤새 글 쓰다 깜박 존 탓에 일찍 온 그들까지 나와 함께 출국장을 뛰었다.
비행기로 딱 두 시간 반. 남도의 후끈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한다.

짐을 풀고 中正紀念堂으로 갔다. 中正(장개석)은 아직까지 타이완의 처음이자 끝이다.
국공합작 실패로 쫓겨 오면서 일어난 비극이 2.28이며 북경과의 결전을 내걸며 40년에 가까운 계엄령을 이어왔고 그를 되돌리려 한 바가 타이완의 민주화다. 
오늘 다시 국공합작의 맞바람으로 정권교체를 앞두고 있는 게 아닌가.



중정기념당 안의 너른 마당(Hall)에서는 그를 항변하듯 對日抗戰眞相特展을 펼쳤다.
꼭지를 잘 잡았다. 어차피 깊이 들어가면 말이 꼬일 수 있는 바라 짧고 굵었다. 

抗戰歷史眞相在臺北 항일전쟁의 참모습은 북경이 아니라 여기 타이베이에 있나니
蔣委員長領導抗戰 바로 장개석 총통이 그 항일전쟁을 영도하셨느니라.
抗戰勝利臺灣光復 항일전쟁에 이겨 타이완은 빛을 되찾았고
抗戰勝利中華復興 항일전쟁에 이겨 중화가 비로소 되살아나리라.

그런데 아쉬웠다. 어차피 확신을 드러내려면 이를 띄엄띄엄 두지 말고 아예 八言絶句로 확 띄게 함이 좋았을 것이다. (在를 빼도 다 알아듣는다.)
그래서일까. 너른 안마당 한가운데 볼썽사납게 무지막지 큰 抗日戰爭中華民國全圖를 기단 위에 돋을새김으로 비스듬허니 만들어놓았다. 中正의 8년 전쟁 이야기다.
그 뒤로 永懷領袖文物展視室이 있다. 글쎄 워싱턴 국회의사당 ‘기억의 방’인가 보는 듯한데 차라리 자잘한 전시물을 더 줄여 신비감을 자아냄이 좋을 듯하다.



윗층에는 제퍼슨이나 링컨기념관 보는 듯한, 말 그대로 中正紀念堂이다.
中正의 높은 坐像 뒤로 <倫理-民主-科學>의 세 말씀이 새겨져있는데 <民主>는 광장을 가로질러 솟을대문에 새겨진 <自由廣場>과 딱 이어져있다.

헌데 좌상 왼쪽 오른쪽의 글귀가 매우 남다르다.
왼쪽은 生活的目的在增進人類全體之生活
살아가며 이룰 바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차츰 나아지게 함이다.
오른쪽은 生命的意義在創造宇宙繼起之生命
목숨의 값어치는 온누리에서 끊임없이 목숨이 피어나도록 하는 바이다. 

그 까닭은 좌상 뒤의 글귀 탓이다. 국공합작까지 우왕좌왕했던 손문의 삼민주의를 국공합작의 처절한 실패 뒤 꿈에도 생각지 않은 제2의 鄭成功이 되어 그리고 2.28 뒤 어느새 뜻밖에 독재자까지 되어 버린 四面楚歌의 中正이 백색공포의 와중에 스스로 儒家가 되어 나름대로 손본 것이다.
미리 말하지만 청천백일기 아래 홀로 앉은 中正이 퍽이나 외로워 보인다.
이 꿈을 그 누가 제대로 가슴에 새기겠는가.

倫理 / 我們爲了充實生命的意義, 進而至於國族的繁榮發展, 
所以要以倫理來實踐民族主義. 
윤리-민족주의 / 우리들은 목숨의 값어치를 알차게 할 것이니, 
마치 임금의 피붙이들이 번영발전 하듯이 모두가 그에 이르도록 나아갈 것이라, 
이를 민족주의를 이루어나감에 윤리의 벼리로 삼는 바다.



 

民主 / 爲了要[這個國家眞正以民爲主], 進而至於每一個人都能够貢獻其能力,
[以行主權在民之實], 所以必須以民主來實踐民權主義.
민주-민권주의 / [나라마다 참으로 국민들을 주인으로 모심]을 벼리로 삼을 뿐이니,
사람마다 모두 제 능력으로 이바지할 수 있도록 나아갈 것이라,
이로써 주권재민의 실질을 이룰 것이니,
모름지기 민주로써 민권주의를 이룸에 이르도록 삼는 까닭이다.  

科學 / 爲了要解決民生問題, 進而至於[以裕民生],[以充國力],
所以必須以科學的精神和方法爲實踐科學的民生主義.
과학-민생주의 / 민생문제의 해결을 벼리로 삼을 뿐이니,
민생이 넉넉하고 국력이 알참에 이를 것이라,
모름지기 과학정신으로 과학적 민생주의를 이루는 방법을 삼는 까닭이다. 

타이완에서 가장 중요한 메모리얼이 국립고궁원과 中正紀念堂 아닌가.
바깥에서 봤을 때는 솟을대문부터 사당까지, 그리고 좌우의 극장과 음악당까지 나름 넓직허니 판을 짜놓았는데 안에 들어가니 안타깝게도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사람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끌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저것 크게 만들어놓는다고 눈길이 확 몰리는 게 아니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울림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일까. 기념품 가게에서 마땅히 살 만한 게 없었다. 차라리 만들지 말지.

밖으로 나와 비둘기들과 짧은 동안 몇마디 나누다 잰걸음으로 [2.28공원]에 갔다.
민국86년 즉, 총통직선제가 치러진 그 다음 해인 1997년에 세워진 2.28기념비다.
비문을 읽어보니 뭐랄까. 담담하달까, 아직도 삭이고 있다 할까. 
끄트머리 天佑寶島 萬古長靑 글귀에 가슴이 그저 아려올 뿐이다.



답사랄까. 앞으로 자주 올 곳이다. 다 문 닫아 국립타이완박물관에 들렀다.
아직도 진행형이라서 그럴까. [2.28공원]부터 턱없이 작았고 먼저 만든 2.28기념관과 나중에 만든 2.28기념관 그리고 이런저런 상징물까지 中正紀念堂과 견주어보니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앞으로도 이리저리 손볼 일이 많겠다는 첫 느낌이다.
(그래도 총통부 가까이 금싸라기 땅이다. 크기보다 오늘의 무게에 달렸다.)
이름과 달리 아주 소박한 국립타이완박물관을 말 타고 산 지나치듯 살펴보았다.

150805> 2.28國家紀念館, 가슴 저린 만남

이틀이다. 2.28국가기념관에 가니 鄭乃瑋 주임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방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한국말 좀 할 줄 아는 사람.
서글서글허니 한눈에 봐도 마음 참 고운 사람이다.



그와 함께 기념관 이 곳 저 곳을 둘러봤다. 첫 대목이 [기대에서 실망까지], 다음은 [강성언어정책]이다. 해방군이 아니라 아예 동족으로 설레며 맞이했다가 식민지보다 더 잔혹하게 당한 아픔, 그리고 그 처음이 만다린어의 강제사용이다.

만다린이란 말에서 보듯이 이는 청나라 만주인들의 말이다. 그 말소리에 맞게 뜯어고친 말이 한족의 말이 되고 명나라 한족들의 말은 남쪽으로 쫓겨 가 광동어(칸토니즈), 객가어(동남아), 민남어(복건성) 등으로 흩어져버렸으니 참으로 역사의 역설이다. 그 역설을 원조 한족들인 내성인들이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게다가 탐관오리들 탓에 먹을 것 넘쳐나는 남도에서 굶주림에까지 시달렸다.



이윽고 1947년 2월27일 벌어진 폭행과 총격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타이완 전역으로 퍼진 항의시위와 비밀체포와 실종사태. 끝내는 3월8일 두 개 사단이 들어와 마구잡이로 펼쳐진 진압. 사진마다 글씨마다 피눈물이 배어있지 않는 곳이 없었고 비어있는 자리마저 통곡으로 그득 찼다. 

다들 참 잘 생겼다. 3부 요인을 비롯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엘리트들은 다 죽였다.
陳儀(대만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는 나중에 간첩으로 밝혀졌다 한다.
그렇다 한들 中正이 겨우 두 해 뒤에 펼쳐질 운명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리 모질게 했을까. 죽을 때까지 그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했을 것이다.

그나마 언론에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은 [受難者들의 벽]을 채웠다.
그러나 뒤쪽으로 갈수록 거의 대다수는 이름만 남아있다. 실종자들은 왜 이리 많은가.
자그만치 17년이나 벽 뒤에 숨어산 施儒珍의 자취 앞에선 숨조차 멎는다.
“시신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고 절을 할 묘도 없으며 돌아가신 날조차 모르니 하늘 아래 이보다 더한 슬픔이 어디 있으랴.“ 끝내 억눌린 한숨이 터져 나온다.

무슨 말을 하랴. 마을의 성황당처럼, 초원의 오보처럼 긴 머리를 풀어헤친 헝겊 한 쪽에 마음을 담아 적을 뿐. 
[不忘2.27 遺千秋2.28 大韓民國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나오는 곳에 자리한 작품은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려 아기와 함께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정문 밖으로 때마침 밝은 햇살이 눈부시다. 2.28의 앞날이 그리 되길 빈다.


 

廖繼斌 기념관장께서 점심을 사신단다. 그런데 직원 분들이 여섯이 나오셨다.
어찌 되었나 물어보니 한두 사람만 남기고 오늘은 다들 즐기자 하신다.
고맙다. 우리에게 마음을 확 여신 것이다. 우리도 서울로 모시겠다 청한다.
그러고 보니 이 분의 할아버지가 아까 기념관에서 뵌 廖進平 정치가이셨다.
감옥에 네 차례 다녀온 독립투사이자 또렷한 얼굴과 그윽한 눈매를 지닌 분이다.
닮았다. 독주를 퍼부었건만 두 얼굴이 자꾸만 겹친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150806> CCW-TI-TFD, 타이완의 민주주의를 만나다. 

사흘이다. 가장 바쁜 날이다. 하루에 CCW, TI, TFD 세 곳을 들른다.
먼저 CCW(Citizen Congress Watch, 공민감독국회연맹). 
여러 분야에 걸친 40개 단체의 연합체로 2007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처음 만나서 속 얘기를 듣기는 어렵지만 이때가 천수이볜 총통 부부의 부패스캔들이 터졌을 때다. 
타이완의 첫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스타 정치인의 끔찍한 몰락.
게다가 타이완은 비록 민주화 되었다고는 하나 늘 양안관계의 살얼음 위에 서 있질 않은가. CCW가 나올 만하다.



黃秀端 3대 이사장과 陳建甫-顧忠華 상무이사와 洪國鈞 정책주임까지 네 분이 함께 했다. 참 보기 좋았다. 진 상무이사가 초대 이사장이셨다.
그런데 상무이사로 일하며 타이완자유선거관찰협회도 이끌고 있다.
옛날 우리 공선협이라 보면 된다. 딱 NGO다. 손님 온다고 치웠을 텐데 그래도 바닥 한쪽으로는 온갖 상자가 쌓여있다. 그를 갈음해 잘 보이는 벽 쪽으로는 113 입법의원들의 프로파일링이 줄을 서 있다.
2009년부터 의원들 영상을 만들고 띄우면서 꾸준히 쌓아온 일이란다.

분위기는 참 좋은데 시간은 매우 짧았다. 졸리는 아침 시간임에도.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선물을 주고받는다. 이사장께서 주신 선물은 책이다.
[國會防腐計 ACTION!] 엘리베이터에 붙인 글귀가 눈에 남는다.
<守護民主 守護公督盟> <打壓公民 馬上就刑> 
민주주의를 지키자! CCW를 지키자! 시민들을 탄압하면 마총통은 벌 받을 것이다!
따뜻한 만남과는 달리 아직도 타이완의 시국은 만만챦은 칼바람이다. 힘내라 CCW!



점심을 들고 세신대학으로 갔다. TI(Transparency Int’ Taiwan)이다.
타이완 투명성기구인데 명함에는 대만투명조직이라 적혀있다.
葉一璋 이사장과 方凱弘 부대표가 나오셨다. NGO인데 으리으리하다.
알고 봤더니 세신대학 주임비서도 맡은 이사장께서 부러 좋은 곳으로 맞이한 것이다.

누구 말이라 할 수는 없지만 놀라운 이야기도 나온다.
“Taiwan is only one in 5 country(차이나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 마카오).”
정권교체를 거듭하며 투명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에 어느 정권에나 불편부당하다.
민주주의 인프라를 차츰 높여나가며 정경유착을 줄이려 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잉주 쇼크와 천수이볜 쇼크를 모두 아우른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정성공 쇼크 뒤에 3백년이 채 되쟎아 찾아온 게 2.28 쇼크다.
해서 그 40주년인 타이완의 87체제가 민주주의의 기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2.28 탓에 북경은 또 다른 陳儀의 군대라는 포비아가 살아난다.
14%가 국공합작을 서두를수록 손문까지 싫어하는 독립 기운이 거꾸로 높아진다.
짧은 만남이지만 의회 감시든 투명성이든 그 어디나 2.28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젠 사뭇 다른 곳이다. 마치 워싱턴 K스트리트 어느 사무실에 온 듯하다.
TFD(Taiwan Foundation for Democracy, 臺灣民主基金會).
말이 재단이지 지구마을에서 외톨이가 된 타이완의 오지랖을 넓혀나가는 민관 합동의 외교부 같은 곳이다. 마치 서울의 타이완 대표부가 대사관 몫을 하듯이.

그래서 그런지 여기는 대표 보기가 힘들다. 갈음해서 엘리트들이다.
Ching-Hsin Yu 부대표와 彭士宏 국제합작조 연구원이다. 
둘 다 교수와 외교관 냄새를 더불어 풍긴다. 함께 한 젊은 펠로우 셋까지도.   
 

외교를 얘기하며 나라 안 민주주의 훈련과 나라 밖 지원을 함께 말한다.
더불어 한국과 일본과 타이완 그 세 나라가 같이 지닌 두 가치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더불어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를 바라며 다 같이 좋은 이미지를 쌓는 노력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말한다.
맞는 말이라 장단을 맞추며 서울민주주의포럼(SDF) 얘기를 꺼냈다.
나아가 이들이 뻔히 알겠지만 한국과 타이완의 인연을 거듭 되짚는다.
타이완의 앞날에 통일대한민국은 반드시 도움이 될 수밖에 없고 이제 대한민국 안에서도 타이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늘 것이라 하였다.
펠로우 한 사람이 물어봐서 아시아 민주주의에서 한-타이완의 자리를 말했다.



세 곳을 바람처럼 다녀오니 오유석-이승원 두 박사가 와 있었다.
늘 다니던 중정역과 사림시장 가까이를 벗어나 다섯이 오붓이 서문역으로 몰려간다.
다들 민간외교 하느라 나름 애썼다. 게다가 남도에서 반가운 이들을 만나니 그 아니 좋을씨고. 타이베이의 밤이 홍시마냥 불콰하니 무르익는다. 

150807> 일어나라 타이완! 민진당-타이베이2.28기념관-景美군사법정

나흘이다. 가장 마음 쓰이는 날이다. 타이완의 독립을 말하는 민진당에 갔다.
먼저 민진당(Democratic Progressive Party)의 吳釗燮 비서장(사무총장)을 만나 반가이 인사를 나눈 뒤(이들의 歡待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곧장 국제사무부(국제협력국)의 黃志芳 주임과 陳婉宜 부주임을 만났다.



처음 만났지만 깊은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가 어제 거쳤던 만남 그리고 우리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란 점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CCW나 TI나 TFD는 나름 일반의 틀을 띄기에 말을 가려야 하지만 민진당은 그 목적이 뚜렷한 정당이 아닌가. 딱히 가릴 게 없었다.

한 주일 앞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林冠華 학생의 이야기 그리고 지난해 해바라기 운동에 이어 터져 오른 고등학생들의 저항까지 북경의 주문대로 시장부터 교과서까지 거침없이 나아가는 국공합작과 그에 맞서 타이완 스스로의 길을 찾겠다는 제2의 ‘2.28’의 민심까지, 뛰어난 통역 덕에 가슴 저릿하고도 숨 가빠지는 만남이었다.




언제는 반공대열에서 벗어난다며 의리 없다 한국을 욕하다가 이제는 혐한까지 부추기며 신들린 듯 My Way 하는 국민당과 달리 민진당은 함께 할 것이 매우 많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 넓은 43억 아시아에서 지옥보다 더한 평양정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Big Brother 사회와 카스트의 나라 그리고 IS까지 지구마을의 민주주의를 함께 이야기할 자격과 책임이 있는 나라가 코리아와 타이완 밖에 더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2.28에서부터 해바라기 운동과 오늘의 저항까지 거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이다. 앞으로 애쓰겠다.“
“해 바뀌고 총통 취임식 때 꼭 불러달라. 그리고 두 분 만난 것처럼 서울에서도 늘 같이 만나 마음을 나눌 분들을 알려 달라.“
“고맙다. 민진당은, 타이완은 여러분들을 대한민국을 잊지 않고 함께 할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 아직 오전임에도 무언가 밥값을 제대로 한 듯한 ‘달콤한 피로’가 몰려온다. 그를 이기고 타이베이2.28기념관으로 발을 옮긴다.
엊그제 갔던 2.28국가기념관이 홀로코스트 기념관 같았다면 이곳은 뭐랄까 영화촬영 세트의 느낌이다. 방송국이 있던 자리라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2.28국가기념관보다 먼저 세워진 곳이라서 그럴 터이다.

1996년 타이완의 첫 직선제 9대 총통 선거가 치러지고 2.28 반세기에 맞춰 들어선 기념관과 그보다 10년이 지나 민진당이 집권했을 때 들어선 기념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
먼저 곳은 이제 그만 아픔을 묻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리 얘기하고 다음 곳은 아니다 아직도 묻힌 진실이 하늘만큼 쌓여있다 얘기한다.
그래서 [타이베이2.28기념관]이고 [2.28국가기념관]이다. 
현미경과 조감도의 다름이라 물어보나마나 시설은 훨씬 이곳이 깔끔하다. 

이곳의 상징은 王添灯이다. “爲最大多數 謀最大幸福”이란 짧고도 굵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그는 성공한 사업가임에도 일제에 맞서 자치와 문화의 길을 열었고 해방 뒤에는 ‘人民報道’의 사장이자 정치가로서 스스로 타이완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끝내 전설이 되었다.

아픈 시가 많다. 그 가운데 柯旗化 시인의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가슴을 저민다.
다만 안타깝게도 마치 아직은 오래지 않은 듯 글이 툭툭 튄다.
꺼억꺼억 쉰 목소리가 넘쳐 어제 일 마냥 지울 수 없는 생채기로 남았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2.28의 시가 노래가 부드러워질 날이 어서 오기를 빌 뿐이다.



점심을 들고 꽤 달려 景美人權文化區로 간다. 이름과는 달리 군사법정이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자그만치 38년에 이른 계엄령, 백색공포의 시대다.
肅靜이란 큰 글씨의 옆에 檢擧匪諜 人人有責이라 적혀있다.
어디 여기뿐이랴, 타이완 온 나라가 그 글씨 아래 숨죽여 살았을 것이다.

잘 살려놓았다. 들머리부터 칠성판을 곧추세운 듯 선돌들이 잔뜩이더니 안으로 들어가니 재판정부터 감방까지 가는 곳곳마다 잡혀온 사람만 없었지 마치 그 악몽의 시절인 듯 먹먹한 어두움 그대로였다. 비까지 흩뿌리니 그야말로 을씨년 아니 을미년스럽기까지 하다. 한숨을 뱉어내고 돌아서는 길에 짓누르듯 서있는 公正廉明은 희극의 뿌리가 비극임을 말없이 웅변한다.

다들 애 많이 썼다. 이제 타이베이의 이모저모도 살펴보자 했지만 웬걸 먼로바람이 아니라 숫제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그래도 꿋꿋이 여기저기 잰걸음으로 돌아다닌다. 아쉬움에 묻힌 타이베이의 마지막 밤이 저문다.

150808> 코리아와 타이완이 함께 만들어나갈 앞날을 그리며.

닷새, 마지막 날이다. 딱 하루 주어진 자유일정을 어찌 할까 다들 궁싯거렸지만 괜한 짓이다. 퍼붓는 빗줄기와 유리문은 죄다 테이프로 가위 표시를 할 만큼 바람에 흔들리는 타이베이 그리고 가끔 나뒹구는 가로수들만 보다 날이 샜다.
그럼 그렇지, 언감생심 어디 우리가 놀 팔자랴. 그저 비행기라도 떠주니 그나마 다행일세. 공항에는 아침부터 기다리다 체면이고 치우고 아예 누워버린 저 멀리 유럽 사람들이 안쓰럽다. 고작 3시간만 늦어진 탓에 4박6일이 되었다.

하루를 호텔에서 공항에서 기다리며 떠오르는 생각이 제법 많다.
곧 천안문광장의 열병식에 박대통령이 습근평 주석과 함께 오르겠지.
복잡한 국제정치는 둘째 치고 그 자리에 못 서는 김정은의 투덜거림이 당장 거슬리지만 한켠으로는 타이완 사람들이 마음에 걸린다.

일본군과 목숨 걸고 싸운 건 공산당이 아니라 장개석의 국민당이 아닌가.
또 그 때문에 이리 쫓겨 온 게 아닌가. 대한민국의 해방과 독립에 끼친 공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서울에서는 그 모든 일을 이웃들과 나누면서 타이베이에는 무슨 말을 건넸겠는가. 한켠으로는 국공합작 서두르다 다시 타이완에서조차 정권교체에 몰렸고 또 한켠으로는 혐한을 부추기며 핏대를 세우는 국민당의 후신들. 우리를 장학량 같다 생각하지 않을까.

타이완에 보기보다 친한파들이 꽤 많은데 다음에는 잔뜩 찾아놓고 가야 하겠다.
저녁에 우리끼리 오순도순은 서울에서 질리도록 하면 된다. 
곧 머쟎아 서울민주주의포럼에 우리가 만난 그 누가 올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는 친타이완, 그들은 친한파가 되는 깔끔한 거래가 외교 아닌가.
겨우 한 번 스친 인연보다 이제부터 만들어갈 앞날에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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