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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방식과 망각하는 방식 – 거미의 땅

기억하는 방식과 망각하는 방식 – 거미의 땅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사람은 게으르다. 게을러서 기억도 제멋대로다. 기억을 단순화 하면 편하다. 상처를 입힌 대상을 한 놈으로 압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야 할 대상도 그냥 한 놈으로 ‘퉁’치는 거다. 그게 남의 일이라면 더 쉽다. 그냥 말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필요한 만큼 잊으면 된다. “네가 아픈 건 오직 그 놈 때문이야.”

그러나 사실 모든 상처는 사고의 중첩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기억과 사연과 사건이 제각각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은 도무지 게을러서 이 중첩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아프거나 너무 귀찮거나 또는 너무 부끄럽다. 

수없이 많은 사고와 사연이 엮여 만들어진 상처가 다시 또 엮이고 엮여 묶인 건 ‘공간’이다. 너무 아프거나 너무 귀찮거나 또는 너무 부끄러운 기억과 사연, 사람을 매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간 자체를 철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니 그보다는 우리는 그렇게 하나하나씩 기억을 간소화하고 공간을 철거해왔다. 

한 때 신문물과 외화벌이의 첨단에 있던 경기 북부지역의 기지촌들도 그렇다. 지금 그 공간 위엔 으리번쩍한 뉴타운이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잊었다.


# 개미처럼 일했고 거미처럼 사라졌다

바비엄마는 77세다. 30년이 넘게 파주 선유리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선유분식을 운영 중이다. 그녀는 기지촌의 양공주로 일하던 20대에 26번의 낙태를 했다. 29살엔 결국 자궁을 드러냈다. 그 후유증으로 그녀의 건강은 온전치 못하다. 카메라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배와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는 장면을 잡아낸다. 

그녀는 아들 바비를 낳고 다시 임신을 했다. 결혼을 약속했던 미군의 아이였다. 그러나 이 미군은 다른 남자의 아이인 바비를 미국에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비엄마는 다시 아이를 떼어낸다. 뱃속에서 7개월을 견디다 끄집어내진 아이는 종이상자 안에서 죽어간다. 바비엄마 박묘연과 바비는 죽어가는 아이의 곁을 지켰다. 이후 바비엄마는 기지촌 여성들의 대모로 살았다. 방송에 출연하고 기지촌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내 얘기엔 지어낸 것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어. 누가 욕을 할지라도 이건 내 얘기니까. 우리는 개미처럼 일했고, 거미처럼 사라졌어”

박인순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두 딸을 낳고 생활했으나 알코올과 약에 찌든 미국인 남편은 그녀를 폭행하고 성판매를 강요했다. 박인순은 두 딸을 남겨두고 다시 기지촌으로 돌아왔다. 정신병처럼 보이는 무(巫)병을 얻은 그녀는 거리를 배회한다.

미술 심리치료를 받아 그림을 그리고 절에서 기도를 올리면서도 그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는다. 대부분 미군과 포주에 대한 저주다. 포주는 글을 모르는 그녀의 돈을 갈취했다. 영화는 법당의 불경 외는 소리 위에 그녀의 저주와 욕설을 덧씌운다. 그녀는 평화와 안식을 갈구하면서도 자기 안의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왜 때렸니, 왜 돈 안줬니, 이 망나니 미군아. 다 불태워 버릴 거야”

안성자는 흑인 혼혈로 태어났다. 엄마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기지촌의 양공주가 됐다. 그녀는 많은 기지촌을 전전했고 그렇게 옮겨 다닐수록 빚은 늘어갔다. 보건증이 없어 보건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결혼을 약속한 미군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미국으로 떠나 연락이 두절된 약혼자는 1년이 지나서야 편지로 파혼을 통보했다.   

안성자는 KBS 인간극장 <애니의 사랑>편에 출연했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삶 전체가 아니라 흑인 혼혈로의 삶, 기지촌 양공주의 고달픈 과거만을 요구했다. 브라운관을 바라보는 세상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딱 그만큼의 이야기만.


# 그곳엔 유령이 산다 – 망각의 방식

박인순은 밤이면 이제 초라해진 뺏뻘 기지촌 거리를 헤맨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그녀는 골목을 걸으면서 벽에 낙서를 하거나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방에 돌아오면 불을 끄고 초를 켠다. 그리고 난해한 그림을 그린다. 가끔 괴성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박인순을 괴롭히는 건 무병으로 인한 두통이다. 그녀는 기지촌에서 머무는 수많은 유령들을 보고 느낀다. 기지촌의 골목에는 유령이 산다. 슬프고 분노한 사람은 죽어서 작은 입자가 되고 그 수많은 작은 입자들은 실체가 되어 그 골목 여기저기를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그 골목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유령들이 실재하는 것이든, 고단한 삶을 살아온 박인순의 정신병이든 그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공간은 여전히 남아있고 박인순의 기억에 그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실재하고 있다. 그것을 유령으로 부르든, 정신병으로 부르든.

박인순과 바비엄마와 안성자의 상처는 모두 제각각이다. 마찬가지로 박인순이 보는 유령들의 상처와 분노 슬픔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그녀들의 (혹은 그들)의 기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우주가 얽혀 만들어낸 공간. 

거미의 땅은 제목처럼 땅거미처럼 사라진 땅의 이야기다. 서울 경기 북부에 화려하던 기지촌 공간은 재개발과 뉴타운 정책으로 하나씩 지워졌고 잊히고 있다. 기지촌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주한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졌다. 기지촌의 여성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양공주’로 영입됐지만 그 배경에는 군사정권의 체계적인 관리와 ‘포획’ (그건 포획이었다. 빈곤과 사회적 낙인, 배제, 망각은 당시의 정권이 그녀들을 대하던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적어도 그녀들은 당시 ‘사람취급’을 받지는 못했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을 애국자니 산업역군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던 한국 정부는 90년대 이후 기지촌 운영에 대한 관여 일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기지촌 공간은 철거됐다. 

공간의 말소는 기억도 말소했다. 세상은 뱃속에서 끄집어낸 아이의 죽어가던 모습과 보건소에 갇혀 엄마를 그리워하던 고통, 포주에게 화대마저 빼앗긴 억울함을 그냥 ‘아픈 역사’로 퉁쳤다. 그리고 그 위에 호화로운 아파트를 짓고 그 아파트 값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기지촌의 흔적은 그저 땅값, 집값을 떨어뜨리는 악재로만 남았다. 세상이 기지촌을 기억하는 방식은 필요한 만큼을 망각하기 위해서다.   

주한미군, 외화벌이 같은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말소되고 잊힌 그녀들은 재개발, 뉴타운 같은 또 다른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다시 말소되고 또 잊힌다. 저마다의 사연과 상처를 가진 수많은 유령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편하게 망각된다. 철거된 공간에는 망각된 유령들과 그 유령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골목을 떠도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여전히.


# 세라와 애니, 과거와 오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안성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의 후반부다. 

안성자는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성자는 세라와 애니라는 두 개의 자아를 가졌다. 세라는 기지촌 친구 애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지만 애니는 편지에 답을 하지 않는다. 세라는 애니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편지를 받은 애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기지촌으로 돌아가 세라의 흔적을 되짚어보며 그 시간들의 실체, 고통을 직면한다.

세라는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었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던 안성자의 과거, 애니는 그 외로웠던 애니를 마침내 인정하고 껴안을 수 있는 안성자의 오늘이다. 그녀는 외면하고 싶었고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대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감싸 안는다.

특별한 설명 없이 전개된 이 분열증적 화면들은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무시하고 오히려 극영화의 연출로 전개되는 듯 보인다. 한참을 지켜보고 애니와 세라가 모두 안성자임을,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자기 안에서 화해를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아 갈 때쯤 안성자는 폐허가 된 기지촌 보건소 건물에서 춤을 춘다. 

과거와 현재, 애니와 세라를 오가던 안성자는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공간에서 가장 아름답게 춤을 추며 현재와 과거를 인정한다. 그건 화해나 용서, 치유 따위의 안일한 말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건 그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이다. 지나온 삶의 고통도 번민도 그 갈등마저도 자신이었음을 인정하는 몸짓. 화해도 용서도 치유도 그 다음이다. 망각하고 침잠시키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 마주하고 다투고 마침내 끌어안은 ‘기억’.


# 그건 아직 우리의 몫이 아니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70년대 정권이 기지촌 운영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 흔적을 어떻게 지워 가는지 밝혀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일기도 했다. 금세 식어버리긴 했지만.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타결한 정부에 대한 거센 비난여론이 이어지고 있다. 기지촌 여성은 사실 주한미군에게 한국정부가 ‘제공’한 ‘위안부’와 같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워버린.

망각은 쉽다. 그 고통을 단순화해 기억하기도 쉽다. 분노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분노를 바탕으로 그들을 위해 싸우는 일은 더욱 쉽다. 정작 어려운 건 그 기억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그 기억에서 나의 치부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들과 싸우며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들과, 혹은 나와 싸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

용서와 화해를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분노와 비난도 쉽게 말해선 안 된다. 그러기에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다. 

※ 거미의 땅은 2012년 완성돼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수상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아왔다. 국내에선 개봉없이 몇몇 영화제를 통해서만 공개됐지만 오는 1월 14일 처음으로 극장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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