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전쟁 –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기까지
당신과 나의 전쟁 –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기까지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2009년의 여름, 평택. 그는 거기 있었다. 해외 먹튀 자본이 떠난 후 2천여 명의 해고자가 나온 공장 구석. 한 때는 국내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를 만들던 그 공장의 구석에 그가 있었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이끌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던 국가폭력에 맨 몸으로 맞선 노동자들의 맨 앞에 그가 있었다.
2015년의 겨울, 조계사. 그는 거기 있다. 그는 전 국민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겠다는 ‘개혁’에 맞섰고, 개사료보다 싼 쌀값에 항의하다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농민을 위로하고 그 책임자를 찾자고 말했다. 그 죄로 그는 희대의 범죄자가 됐고 결국 절간 한 구석에 숨어 곡기마저 끊어야 했다.
한상균. 2009년에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의 지부장이었고 지금은 민주노총 위원장인 그가 서있는 곳은 7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갇혀있다.
# 2009년
2004년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쌍용 자동차는 중국의 상하이 자동차에 인수됐다. 그러나 상하이차는 2008년 돌연 자본 철수를 결정한다. 건실한 국내 자동차 제조사였던 쌍용차의 핵심 기술과 인력을 중국으로 빼돌린 이후였다.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경영하던 4년 동안 단 한 푼의 돈도 투자하지 않았다는 건 상하이차가 철수한 이후에 드러났다. 전형적인 ‘먹튀’였다.
상하이차의 철수 이후 구조조정의 칼바람에서 2천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희망퇴직이니 무급휴직이니 하는 말들이 동원됐지만 평생 기름밥 먹으며 ‘삶’을 이어온 노동자들로선 삶의 공간을 빼앗긴 셈이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의 칼날을 피해 간 ‘산 자’와 그렇지 못한 ‘죽은 자’로 나뉘었다. 어제까지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같은 대폿집에서 소주병을 두들기던 동료들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회사는 ‘산 자’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 반대와 회생 방안을 요구하던 해고자들의 집회 바로 옆에서 산 자들의 관제 데모가 열렸다. 77일간의 옥쇄파업에는 ‘구사대’가 동원됐다. 손 안대고 코 풀기에는 분열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신동기 씨는 ‘산 자’였다. 그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니었지만 77일간의 옥쇄파업에 동참했고 결국 괘씸죄로 회사에서 잘렸다. 그는 “인간적인 도리까지 저버리면서 돈을 벌라면, 차라리 도둑질을 하고 만다”고 했다. 노동자의 연대, 단결, 투쟁 같은 학습된 언어가 아니라 형들과의 의리, 사람의 도리를 말하는 듬직한 동네 형들의 언어로.
신동기 씨의 언어는 곧 해고당하고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언어이고, 한상균의 언어다. 땀 흘리며 일하고, 일한만큼 받고,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당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언어.
그러나 2009년의 여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일은 당연한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을 일이 아니었다. 헬기에서 뿌려대는 최루액과 테이저건 곤봉과 군홧발은 그들을 짓이겼다. 그건 ‘짓이겼다’는 사람에게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표현으로도 모자란 광경이었다. 그보다, 그날 그곳에서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칭하는 건 노동자들과 경찰 양 쪽 모두다)
77일의 파업을 이끈 한상균은 3년형을 받아 수감됐고 만기를 채워 출소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20여 명의 ‘동료’들이 죽었다. 동생과 동료들은 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동지’가 됐다. 한상균은 출소 후 ‘동지’들과 함께 다시 초고압이 흐르는 공장 주변의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같은 눈높이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하늘 위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 2015년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라는 이름이 붙은 집회의 선두에 한상균이 있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었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늘리고 파견업 허용업종 확대와 임금피크제 확대시행을 골자로 하는 노동개혁안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일하고 싶다고, 일한만큼 받고 싶다고,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돈을 받고 싶다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2009년부터 7년이나 지났지만 바람은 같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도 똑같았다.
한상균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과 그 과정에서의 집회로 이미 체포영장이 나와 수배생활 중이었다. 민중총궐기 집회를 마친 한상균은 경찰의 체포시도를 피해 조계사에 들어갔다. 조계종단은 세속의 풍파를 피해 부처님의 가피에 몸을 의탁한 그를 품어주겠다고 나섰고 경찰은 겹겹이 조계사를 에워쌌다.
2009년, 2012년과 마찬가지로 한상균은 고립됐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뉴스에 나오는 한상균의 직함은 쌍용차 노조위원장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달라졌고,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70만 명의 노동자로 늘어났지만 그의 말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도, 그를 대하는 세상의 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한상균은 쭉 고립돼 있었다. 그보다는 노동자들은, 아니 차라리 그냥 우리들은 고립돼 있었다.
사실 한상균이라고 썼지만 한상균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돈 벌어 먹고 사는 힘없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한상균은 ‘당신과 나’다. 당신과 나는 2009년의 쌍용차 공장에, 2012년의 철탑 위에, 2015년의 조계사에 있다.
# 당신과 나의 전쟁
당신과 나는 강경한 투쟁을 일삼는 노동자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로는 진보를 떠드는 어느 회사의 부장님일 수도 있고, 그 부장의 잘난 체에 아니꼬워 하는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일 수도 있다. 거리에 나와 복면과 밧줄을 든 투쟁하는 노동자일 수도 있고 집회 현장에 나갈 시간도 없이 야간노동을 해야 하는 파견직 노동자일 수도 있다. 이미 애초에 정리해고 당한 실직자일 수도 있고 실직이라도 당해보고 싶은 취준생일 수도 있다. 숨죽여 지내는 공장 안의 산자일 수도 있고 산자이면서도 투쟁의 목소리를 높였다가 괘씸죄로 해고당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건 당신과 나의 전쟁이다. 당신과 내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함께 싸우는 전쟁.
영화는 옥쇄파업이 끝난 뒤 여전히 복직을 위해 손 팻말을 든 해고 노동자들을 외면한 채 묵묵히 전자 출입문에 출퇴근 카드를 찍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들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13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궐기’라는 이름으로 서울 한복판에 몰려들었던 날이 지나갔다. 13만의 맨 앞에 서있던 사람,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노인,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경찰이 찾아온 학생들, 집에 가는 길에 체포된 젊은이. 이들과 당신과 나는 다른 이들일까. 우리는 손 팻말을 든 쪽일까 아니면 묵묵히 출퇴근 카드를 찍는 쪽일까. 아니 그보다 이런 구분은, 당신과 나와 저들을 나누는 구분은 누구의 언어일까.
당신과 나의 전쟁은 어떻게 ‘당신과 나’의 전쟁, ‘우리’의 전쟁이 될 수 있을까.
# 한상균
이 글을 쓰고 있던 날은 12월 7일이었다. 그 때까진 한상균의 거취가 결정 나지 않았지만 이 글을 송고하는 10일 오전, 한상균은 자진출두해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감옥에 있더라도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호송차에 올랐다.
언론에서는 장삼이사의 말잔치가 다시 시작됐다. 강경노선만을 고집하는 운동권의 구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다.
그래서 이제 당신과 나와 한상균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