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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와 민족주의 - 안중근과 유럽연합에서 배운다

안중근과 유럽연합에서 배운다

글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주도해서 만든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탈냉전 이후에 유럽공동체로 발전했다. 급기야 오늘날에는 유럽연합(EU)을 만들고 단일통화권을 구축하며 국경을 없애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IS(이슬람국가)의 테러, 난민 문제, 유럽연합 국가들의 경제적 불균등 발전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유럽은 나폴레옹전쟁에서부터 보불전쟁, 1, 2차 세계대전 등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를 딛고 유럽통합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에 비하면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에는 유럽과 전혀 다른 방향의 질서가 만들어졌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와 성장, 베네룩스 3국과 같이 평화질서 구축에 이해관계가 강한 강소국의 부재, 남북 분단체제의 강화,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존재 등이 유럽과 비교해서 볼 때 동아시아에서 화해를 가로막고 평화질서를 구축하지 못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여기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존재는 한국과 중국에서 반일민족주의를 강화시키고, 한국과 중국 내부에서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내정치의 기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거꾸로 가는 일본의 시계

일본의 아베 정권은 역사수정주의 노선에 입각해서 사과하지 않는 일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아베정권이 추구하는 ‘보통국가화’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시각에서는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 노선이다. 2차대전 이후 패전국 일본을 재건한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평화헌법에 기초하여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노선을 추구하였다. 아울러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일본 보수 세력의 재무장과 우경화 시도 속에서도 종군위안부 문제를 사과한 고노 담화와 일본의 침략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아베의 노선은 평화헌법에 대한 해석 변경을 통해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여 재무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후 요시다 시게루가 추구해온 노선에서 명백하게 이탈한 것이다.

아베 총리의 재무장 노선은 2차대전 종전 70주년 외교를 통해서 꽃을 피웠다. 아베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했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일인 4월 27일을 일본의 ‘주권회복의 날’로 지정했다. 그리고 2차대전 종전 70주년인 2015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일을 전후해서 4월 하순에 미국을 방문하여 미일 가이드라인을 개정함으로써 자위대의 해외 활동을 보장하는 지침을 마련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국내 관련 안보법률도 제정하고 개정하였다. 바야흐로 아베 총리의 앞길에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아베 총리는 자위대의 해외진출의 명분을 “국제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으로 포장했다.


✽ 2013년 일본 정부가 논란 속에 제정된 ‘주권회복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베 총리와 일왕 부부가 참석했다. ©연합뉴스

바야흐로
아베 총리의 앞길에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견고한 미일동맹

아베 총리의 거침없는 행보는 미국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깊은 관련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의 기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에게 일본은 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태평양의 전초기지로서 가치를 지녔다.

1852년 페리 제독이 일본을 원정할 때부터 미국은 일본의 가치를 중요시했다. 페리의 원정은 처음부터 일본의 개항이 목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아시아 진출에 맞서서 새로운 통상지 개척의 필요성에 직면한 미국은 일본을 선택했다. 당시 증기기관선으로는 태평양을 횡단할 연료를 충분히 실을 수 없는 맹점이 있었다. 페리 제독은 이러한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이미 개척한 아시아 항로인 대서양과 인도양을 경유해서 연료를 보급하면서 일본에 도착했다. 이후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확고한 위상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위상은 2차대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공산진영의 아시아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일본을 선택했다. 오늘날 G2로 성장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미국은 일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의 재무장 노선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정확하게 일치하면서, 미일동맹을 견고히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 도쿄에서 열린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 반대 시위 ©연합뉴스

한국의 반일민족주의

하지만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관점은 역사적인 맥락과 국제정치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지 강점에 대한 분노의 표출 차원에서 진행되어 왔다. 한국 국민들의 강고한 반일민족주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대 정권은 일본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한국 국민들의 반일민족주의는 강력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에 비해서 가혹했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가 식민지 강점시기 말기에 보인 민족말살정책이나 태평양 전쟁에서 자행한 잔혹한 행위는 이후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반일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국 역대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 시도 역시 일본 우경화의 역사적 맥락과 국제정치적 현실에 대한 고려가 충분하지 못했다. 한일관계라는 양국 차원이 아니라 동아시아 차원에서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구상하는 전략이 부재했기 때문에 반일 민족주의와 한일과거사의 강력한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新 대동아공영권

다른 한편 아베 정부의 재무장 노선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기된 ‘대동아공영권’의 현대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베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서슴없이 요시다 쇼인을 꼽는다. 대동아공영권의 뿌리는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인 요시다 쇼인의 사상에서 비롯된다.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의 공존공영이 아니라 일본천왕 아래, 즉 일본의 지배 아래 아시아가 공영한다는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주의적인 노선이다. 이러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서구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단기간에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한반도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만들게 된 것은 요시다 쇼인의 노선을 실현하는 차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아시아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과 같이 숙명적으로 배타적 대립적 관계를 타고난 것이다.

아베가 추구하는 노선은 대동아공영권의 뿌리인 요시다 쇼인과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을 위해 만주국을 설계한 기시 노부스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국가위상 때문에 미일동맹의 후견을 받고 있는 노선이다.

한일관계의
현실적 갈등 해결을 위해
동아시아 협력기구 창설이 필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시사점

한일관계 개선은 역대 정권이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와 국제정치적인 상황을 포괄하는 전략 속에서 아시아 평화 번영의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일 민족주의에 기초해서 일본의 재무장 노선과 맞서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어려운 길이지만 우리의 전략적 접근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의 구상이지만 상설기구로서 동양평화회의 조직,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도 담겨 있다. 안중근이 구상한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유럽연합과 비슷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협력기구 창설이라는 범아시아적인 플랫폼에서 한일 간 과거사 문제와 경제 문화 교류의 투트랙(two track)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 멀지만 역사적인 맥락과 국제정치적인 현실을 고려한 길이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를 구상한 것처럼, 한일관계의 현실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해법은 유럽연합과 같은 동아시아 협력과 연대의 모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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