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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산업혁명유산 군함도’ 단상

‘유네스코 산업혁명유산 군함도’ 단상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불과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전범기업’, 즉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일본 기업의 시도에 제동이 걸린 적이 있다. 한국전력에서 독립해 나온 한국동서발전이 충남 당진 화력발전소 추가 건설에 필요한 기자재 제작사로 일본의 미쯔비시중공업과 히타치를 선정했다가 시민단체에 의해 철퇴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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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두 회사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악명이 높은 회사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미쯔비시의 경우 그 악랄함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는 평이다. 일본 큐슈 나가사키 앞바다에 떠있는 ‘하시마[端島]’라는 섬에 있던 미쯔비시 탄광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현장이다. 섬을 옆에서 본 모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 전함 ‘도사[土佐]’를 닮았다고 해서 군칸지마[軍艦島; 군함도]라고 불리기도 하는 섬, 최근에 일본이 '큐슈-야마구치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하나로 유네스코 산업혁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흔적이 있는 바로 그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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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탄광 개발이 시작된 군함도는 둘레가 고작 1.2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한창 때에는 5천3백여 명이 거주하며 석탄을 캐내던 곳으로 일본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공간으로 꼽힌다. 그러나 깊이가 무려 지하 1킬로미터가 넘는 해저 탄광의 내부는 좁았으며, 기온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고, 작업 도중 바닷물이 갱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는 등 자연환경과 노동조건이 혹독했다. 

사정이 그러했기에 광부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하시마도 아니고 군함도도 아닌 오로지 ‘지옥섬'이나 ‘감옥섬’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매일 12시간 이상씩 하루 2교대로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섬의 지표면에서 7백여 미터를 내려간 해저의 비좁은 막장에서 똑바로 서지도 못한 채 옆으로 눕거나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석탄을 캐내야 했다. 섬의 별명대로 지옥과도 같은 노동환경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감옥과도 같은 섬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파도에 휩쓸려 죽은 이가 부지기수였고, 갱도가 무너지거나 가스가 폭발해 흙에 매몰되거나 바닷물에 수장된 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에 따른 임금은 말할 것도 없이 변변한 끼니조차도 기대할 수 없었고,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아예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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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의 군함도는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른 상태다. 지난 가을 답사 때만 해도 도시 곳곳에 “메이지유신 산업유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축하”라 쓴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고, 이미 5개의 크루즈 업체가 나가사키항과 군함도 사이를 경쟁적으로 상시 운행하고 있었다. 회사마다 2편씩 하루에 총 10편의 고속선이 왕복하는 식이었다.

전체적인 투어에 왕복 2~3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여행 성수기에 아니었음에도 군함도를 직접 보려는 관광객들로 100인승 고속선이 거의 꽉 찬 상태였다. 중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층, 그리고 가족 단위 여행객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1인당 400엔 내외면 나가사키에서 군함도까지의 왕복 고속선 티켓을 살 수 있고, 거기에 200엔만 더 보태면 아예 섬에 상륙을 할 수도 있다. 야마사해운의 420엔짜리 승선권에는 군함도 상륙권 300엔 외에 기괴한 이름의 요금도 포함되어 있다. ‘메이와쿠(迷惑)’ 요금이 그것으로, 고속선이 지나는 인근지역 어민들의 고기잡이에 폐를 끼친다는 뜻에서 내는 일종의 ‘민폐 요금’인 셈이다. 언뜻 타인에 대한 예의가 바른 사회처럼 보이지만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심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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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상륙해 곳곳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근대화를 위한 산업의 밑바탕으로서의 석탄 채굴과 같은, 일반적인 일본인 입장에서 봤을 때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안내할 뿐 이곳에서 벌어진 인권말살의 전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섬을 돌아보는 관광객들도 그런 설명을 들으며 그저 “스고이네[대단하네]!’를 연발할 뿐이었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의 시민사회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유네스코 산업혁명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군함도나 군함도의 채탄 관련 시설이 아니라 당시 이 섬에 건설됐던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 그것도 용도를 알 수 없어 보이는 콘크리트 더미 같은 일개의 ‘흔적’일 뿐이지만 군함도를 찾는 이들에게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지난 1974년 폐광 이후 사실상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던 군함도…. 그런 상태로 풍화를 거듭해가던 군함도가 느닷없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일본전역에 분 이른바 ‘폐허 관광’ 열기가 기폭제였다. 오래되고 버려진 폐허를 찾아다니며 감상에 젖는 식의 관광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군함도도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인데, 지금은 거기 상술까지 더해진 느낌이다. 나가사키의 어느 대형마트에만 가도 ’군함도 소주’를 살 수 있는 식이다. 술병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군함도의 사진과 함께 ‘숲처럼 들어선 고층 아파트, 폐광 후 무인도에서 근대화 문화유산으로…, 섬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고 장황하게 적혀 있다. 역시 기억하기 싫은 역사, 즉 강제동원과 관련한 이야기는 있을 리 없고 그저 흐뭇한 미소를 띠게 하는 위안거리로서 군함도에 얽힌 이야기는 소비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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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대한해협 어디쯤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근대사를 대하는 한일 간의 간극이 군함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 한 복판의 형무소는 현재 건물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빈 터만 남아 황량할 따름이다. 그 북동쪽에 위치한 도시 키타큐슈와 일본내해인 세토나이카이 건너편의 시모노세키를 잇는 해저터널에도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노역을 하다 사망한 조선인들의 넋이 서려 있지만, 정작 터널 앞에 서있는 순직비에서는 조선인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지난 달 글에서 다룬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처럼 전쟁의 참상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다시는 없어야 할 전쟁에 대해 반성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역사관이나 교육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다.

과연 군함도의 미래는 어떠할까. 유네스코 산업혁명유산 등재 뉴스와 함께 이제 나가사키를 찾는 한국인이나 중국인 여행자들 중에도 군함도를 방문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동시에 군함도의 역사와 관련한 반쪽짜리 설명에 항의하는 이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과연 군함도는 근현대사와 관련한, 특히 반인권적 과거사에 대한 몰이해를 딛고 성숙한 역사의식을 담보한 공간으로의 진일보를 이뤄낼 수 있을까. 과거사와 관련한 일본 사회의 경직성이 못미더운 것이 사실이지만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평화 헌법 9조를 지켜내려 거리로 나온 수십만의 시민이 있는 사회가 또 일본이기에 일말의 희망이나마 완전히 버릴 수는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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