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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조선인과 시민이 살려낸 강제동원의 현장, 일본 교토 단바망간기념관

 

강제동원 조선인과 시민이 살려낸 강제동원의 현장, 일본 교토 단바망간기념관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지난 2011년 6월 26일 일본 교토에서 서북 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단바에서 뜻깊은 행사가 하나 열렸다.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에 문을 열었지만 결국 20년만인 2009년에 재정난 탓에 문을 닫았던 단바망간기념관의 ‘재개관식’이 거행된 것이다.

단바망간기념관은 재일조선인 고 이정호 씨와 그의 가족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에 세운 일본 내 유일이자 세계 유일의 역사 박물관으로서, 특히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념관은 갱도 체험장과 외부 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갱도 체험장은 전쟁 뒤 문을 닫았던 단바망간광산을 이정호 씨가 임대해 가족과 함께 두 손으로 직접 다시 판 것으로서, 좁고 낮아 성인 한 사람이 겨우 기어들어갈 수 있는 갱도 안에서 배를 곯아가며 강제 노역을 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삶을 재현해 두고 있다. 또 갱도 밖에 있는 외부 전시장에는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당시의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도록 일본 전역에서 모은 광산 관련 도구와 사진 자료들을 전시해두고 있다.

망간은 철의 강도, 즉 전쟁 무기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금속이다. 식민지인의 손으로 자신의 조국을 멸망케 했던 전쟁 물자를 캐내야 했다니 더욱 비극적인데, 지난 1930년대에 시작된 망간 채굴은 40년대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1941년에만 1,100명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이곳 단바망간광산에 강제동원되어 갱도로 투입되었다고 한다.

당시 강제동원되어 온 이들이 겪은 문제 중 가장 가혹했던 것은 노동 환경. 조선인들은 가로 세로 90센티미터, 60센티미터의 좁은 굴에 포복 자세로 기어들어가 하루에 보통 100킬로그램의 망간을 캐내와야 했고, 만약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에는 센 매질과 식량 배급량 축소나 아예 중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적잖은 조선인들이 유서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생을 다해갔고, 운이 좋아 해방 때까지 살아남은 조선인도 있었지만 남은 인생을 진폐증으로 고생하다 결국 한 많은 생을 마친 이들이 부지기수다.. 16살 때부터 망간광산에서 일한 고 이정호 씨도 그 당사자였다.

이 씨와 그의 가족이 사비를 들여 기념관을 만든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단바지역의 망간 광산으로 끌려와 노예처럼 학대당하며 일해야 했던 조선인들의 역사를 기리고, 후손들이 그러한 피식민과 강제동원의 역사를 잊지 않게끔, 다시는 그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고 이정호 선생은 말했다.

하지만 기념관 건립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갱도 안에서 조선인들의 고된 노동을 보여주기 위해 설치한 사람 모형은 동양인이 아니라 옷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인 체격에 서양인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한정된 자금에 좀더 저렴한 것을 찾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또 폐광되어 버려졌던 갱도를 다시 판 것도, 외부 전시관을 새로 지은 것도 전문 건설인력이 아닌 이씨 가족 자신들이었다. 일본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 나아가 방해도 기념관 건립을 쉽지 않게 했다. 그러나 어떤 방해 요소도 이 씨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교토에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베어온 조선인들의 귀무덤-코무덤이 있다면, 단바에는 20세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폐무덤이 있다”고 생각했던 이 씨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바망간기념관은 비록 속도는 느릴지언정 완성되어 갔다.

하지만 이 씨 가족의 뜻과는 달리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일단 한국에서 찾아오는 이들은 연구자나 시민단체 관련자, 혹은 한일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소수의 여행자로 국한되었고, 일본인들 역시 강제동원이나 재일조선인 관련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 외에는 일부러 관람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적었다.. 자신들의 과오와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었기에 일본 중앙정부는 물론 지자체의 협조도 기대할 수 없었다. 1995년 이정호 씨가 사망하면서 기념관 운영을 맡았던 3남 이용식 씨에 따르면 “점차 방문객이 줄어들면서 재정상황이 나빠졌고 결국 2009년 5월 들어 연평균 500만 엔의 만성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폐관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문을 연 지 20년만에 맞딱뜨린 ‘현실’이었다.

하마터면 영영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단바망간기념관….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나섰다. 오래 전부터 일본 우토로 재일조선인 문제와 러시아 사할린 한인 문제 등 20세기초 일제에 의해 발생했으나 여태 해결되지 하고 있는 역사적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천착해온 한국 시민단체 지구촌동포연대(KIN) 등이 모금 캠페인을 벌여 2천여 명에 가까운 한일 시민들로부터 1억 원이 넘는 후원금을 모아낸 것이었다. 단순한 기념관을 넘어 강제동원의 현장으로서, 인간이 인간된 권리를 상실당한 채 노동해야 했던 간단치 않은 역사의 현장인 단바망간기념관은 가까스로 운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이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재개관 뒤 얼마 간은 매달에 1백 명 이상이 찾기도 했으나 아무 방문객도 없는 날도 이어지고 있다. 언제든 다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다. 그러나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에 맞선 고 이정호 씨 가족의 의지와 노력, 뼈아픈 식민지 시대를 잊지 않고 동아시아에 평화의 등불을 놓기 위한 한일 양국 시민들의 의로운 참여들이 오늘도 면면이 계속 되고 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혹 일본 교토나 오사카를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단바망간기념관에 한 번 들러보기를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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