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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진보의 진화’를 위하여

운동가가 되려 하기보다 운동적 삶 지향해야
가치·관계지향적 운동으로 생활 속 작은 진보 만들어나가야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지혜공유협동 조합 이사장

진보에 대한 인식 확장


✽ 인천 5·3 민주항쟁 30돌을 맞아 지난 5월 인천시 남구 주안쉼터공원에 세워진 계승비 ©연합뉴스

87년 6월항쟁은 사회의 전 계층이 참여하여 호헌철폐, 민주쟁취를 외치며 4·19혁명 이후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적인 변화를 이룬 쾌거였다.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운동세력에게는 커다란 자신감과 성취감을 갖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사회운동세력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동안 ‘변혁’을 중심으로 하던 민주화운동에서 ‘변화’와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운동으로 중심이 이동되었고, 2010년 이후에는 전 지구적인 생태위기가 단순히 환경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와 문명적 차원의 거대한 ‘전환’을 요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시대적 과제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변화되면서 진보에 대한 인식의 확장과 진보의 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진보운동의 흐름은 과거의 인식에 머물러 우리 사회의 발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30년 전 격동의 한국사회를 앞서 이끌어온 사람들의 인식과 생활양식이 오히려 진보의 질을 추락시켜 대중에게서 괴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사회를 이끌기보다 퇴행적 모습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살펴보며 ‘진보의 진화’를 모색하려고 한다. 모든 글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이며 자신을 분석한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필자의 성찰록이며 참회록이다.

이분법적 사고, 관념적 오만을 넘어서

1970~90년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대체로 학습과정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선명한 인식과 이루어야 할 사회적 목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정의와 진리에 대한 신념은 너무도 명확해서 자신의 전 삶을 투여해도 아깝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확신이 역사적 사명과 민중 지향적 삶에 헌신하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 열정과 에너지는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대안적 가치를 세우는 동력이자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장점이 고스란히 우리에게 독이 되는 측면이 있다. 당시 학습을 통해 형성된 시각과 관점은 ‘과학적 사고’라고 생각되었고 그를 기반으로 한 ‘역사의 법칙성’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되었다. 특히 민족적 관점, 계급적 당파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진보세력은 ‘우리 편(我方)’이고 ‘아군’이며 ‘좋은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 반대편은 수구보수이고 ‘저들, 그들(他方)’로 간주하며 ‘적군’으로 규정하여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나쁜 세력’으로 통칭했다.

이렇게 상황을 언제나 ‘전투’로 인식하는 관점은 엄혹한 독재 권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훈습된 인식이다. 누구를 만나든, 어떠한 상황이든 적인지 우리 편인지를 구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전선’을 긋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러한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였다. 타협과 절충은 곧 기회주의 또는 개량주의였다. 운동권은 바로 이 ‘비타협성’이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계급적 당파성이나 민족적 이해가 의미 있는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 진보’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통합적인 진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최근에 진보적 사회운동가들이 가부장적이며 반여성적이라는 냉혹한 비판에 직면한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개발주의를 지지하는 반환경적 언사와 행동으로 비판을 받는 경우도 많다.

흑백논리나 이분법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에 상대는 제압해야 할 대상이거나 의식화의 대상이다. 이렇게 진리에 대한 배타적 독점의식은 관념적 우월성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바로 자아도취적 오만의 근원이 되었다. 이런 사고는 신앙은 될 수 있어도 과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만이 배타적으로 옳다는 진리에 대한 독점의식은 바로 폭력의 시작이다. 마치 신의 이름을 외치며 십자군전쟁을 일으킨 이들이나 원주민을 구원한다면서 살육과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던 남미의 선교사들처럼 말이다.


✽ ‘민주수호’를 외치는 집회 참가자들 ©연합뉴스

실제의 세계는 흑백이 아닌 컬러세계

실제의 세계에는 100%의 백과 100%의 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사람은 회색이며 그저 명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때로는 ‘중도’를 강조하지만 결국 무채색의 프레임이다. 실제의 세계는 무채색이 아니고 유채색의 세계이다. 무지개 같은 다양성의 세계이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보면 어느 하나를 기준으로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고 규정할 수 없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다양한 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꽃밭이 되는 화엄의 세계이다.

이분법적 가치는 “All or Nothing”의 관념이다. 80%의 선한 가치가 있다고 해도 20%의 문제가 발견되면, 그 20%를 전체로 단정 지어 전면 배제한다. 이와 반대로 다양성의 가치는 부분의 잘못을 전체적인 잘못으로 단정하여 배제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때 오히려 훨씬 더 다양한 비판과 논쟁, 토론이 활성화될 수 있다. 이분법적 관점에서 비판이나 논쟁은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같은 진영 내에서 다른 의견이 있어도 격의 없는 토론이나 논쟁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양성의 관점에서는 비판하거나 논쟁을 한다고 해도 그를 전면 배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깊고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진보세력에게 부족한 실력

이러한 이분법적 인식에서 비롯된 전투는 상대를 악마화하여 쉽게 증오를 조직할 수 있어 우리 편의 결집력을 높인다. 그래서 전선이 명확할수록 적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높아져 투쟁의지를 고양시킬 수 있다. 이러한 습관은 상대방을 면밀히 연구하고 분석하기보다는 그저 단순화시키고 희화화하여 경멸하거나 폄훼한다. 사람의 행동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진보운동의 게으른 현실분석은 그렇게 실패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만들고 창조하는 에너지’보다는 ‘무엇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운동권의 잘못된 습관이다. 다시 말해 ‘대안과 희망을 만드는 운동’보다는 ‘타도와 반대하는 운동’을 통해 집단 속의 정체성을 찾는 데 익숙하다. 이러한 체질로 인해 자신을 성찰하는 능력은 현격히 떨어지고 타인이나 밖의 세계를 비판하는 능력은 더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운동권은 “왜 반대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가?” 하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미워하면 닮게 된다’는 말처럼
분노와 적개심은 상대를 파괴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파괴한다

신뢰는 모든 것을 ‘비판과 문제제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해결의 관점’에서 보고, 그것을 책임지려는 자세에서 나온다. 진보세력이 실력이 없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반대와 공격하는 감각은 발달했지만, 실제 과제를 인식하는 변별 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대안 제시 능력, 다양성을 통합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개심과 분노는 체계를 파괴하고 붕괴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오히려 이후 의미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 창조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미워하면 닮게 된다’는 말처럼 승화되지 않은 증오는 자신도 모르게 적을 닮아가게 만든다. 사실 분노와 적개심은 상대를 파괴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파괴한다. 상대를 구원하지도 못하고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므로 술만 마시게 된다.


✽ ✽ 2015년 ‘세계 민주주의의 날’을 기념하여 진행된 퍼포먼스

생활세계의 작은 진보

과거 진보적 운동권은 ‘토대’의 변화를 유도할 ‘상부구조의 변혁’을 도모했다. 그래서 대체로 정치권력적 사고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연히 정치권력 변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환경, 여성, 노동, 농민 등 모든 문제에서 최종적으로 정치권력의 전취가 관건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각각 삶 속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생활세계의 진보, 일상의 변혁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생태문제, 복지문제, 마을 만들기, 풀뿌리지역공동체, 성 평등 문제 등 일상의 진보는 오만한 과대망상가들의 관심 밖이다. ‘큰일은 능력이 없어서 못하고, 작은 일은 시답지 않아서 못하는’ 게으르고 어리석은 진보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저항중심의 운동에서 가치지향적 운동으로

운동은 무엇을 반대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희망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 ‘이루고자 하는 대안적 가치’가 궁극의 목표여야 한다. 새로운 대안운동의 전략은 투쟁보다 연대, 대립보다 일치를 우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목표가 전략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목표에 따라서 적이 다르게 형성된다. 전략적 목표는 서로 다투는 이해보다 더욱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이때 대안적 방식은 아(我)와 적(敵)이 동일한 평면에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적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적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전략이론의 이상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물리력으로 제압한다고 해도 적의 저항의지까지 포기시키지 않으면 내가 약화될 수 있다. 적이 강해지면 복수를 시도하게 되고 다시 전투는 시작된다. 싸우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는 적의 저항의지를 생성시키지 않아야 하고, 생성되더라도 저항의지를 포기시켜야 한다. 저항의지를 생성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적을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 적을 규정함을 통해서 아(我)의 연대를 고양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상대와 투쟁에 전념하고 승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를 확장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승리를 연대의 부산물로 만들어야 한다.

목표가 아니라 과정과 관계지향적 운동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운동은 수단과 목표를 통일시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래서 목표뿐 아니라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 목표와 성과만을 지향하는 운동은 속도에 집착하게 된다. 속도가 빨라지면 과정이 손상되고 상처받는 사람이 생긴다. 등산에서 정상에 올라가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산길에 난 들풀의 아름다움을 볼 겨를이 없다. 서두르는 사람에게는 계곡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즐길 겨를이 없다.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과정 자체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다.

대안적 운동방식은 목표도 중요하지만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긴 호흡의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마음 자세다.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과정은 참고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사고를 당해 죽으면 억울한 죽음이 된다. 그러나 과정을 충분히 즐겁게 해온 사람에게는 이때까지의 즐거운 삶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것이 된다. 제적당하고, 투옥되고, 고문당하면서 남다른 결단의 경험에 오래 사로잡힌 사람은 은연중 보상의식이 싹터 자신을 괴롭힐 가능성이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운동가가 반드시 운동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운동가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운동적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훨씬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물론이다.


✽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결의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힘내라 민주주의’ 구호가 적힌 카드 를 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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