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의 숨겨진 힘 : 오산 한신대 캠퍼스를 가다.
한국 민주화의 숨겨진 힘 : 오산 한신대 캠퍼스를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4.19혁명과 6.3학생운동의 기억이 생생한 시기인 70년대, 유신정권에게 가장 강력한 적은 학생들이었다. 그러니 청와대와 중앙부처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대학교와 고등학교들은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와 경기고를 위시한 명문 학교들이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관악구와 강남 지역으로 대거 이전하게 된다. 이에 비해 사립 대학교 이전은 1970년대에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획은 했지만 박정희가 죽고 유신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고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일당에게도 가장 큰 적은 학생 특히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사립대학들을 아예 강남도 아닌 경기도나 더 먼 지방으로 이전시키려 했다. 그 결과, 성균관대, 경희대, 한양대, 외국어대, 중앙대, 경기대, 명지대, 한신대 등이 지금은 도시화 된 곳이 많지만 당시에는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인 경기도 일대로 캠퍼스의 상당 부분을 이전했다. 고려대, 연세대, 건국대, 동국대, 홍익대 등은 아예 권역을 넘은 지방에 캠퍼스를 세웠다. 운동권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여자대학들 중에서는 지방 캠퍼스를 세운 예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수도권 집중화를 완화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실시된 이 ‘정책’이 실은 학생운동권의 약화를 노린 것이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정책’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방 확대에 기여하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참고로 1990년 대 초, 미얀마의 군부독재정권은 이를 ‘본받아’ 수도 양곤의 대학들을 지방으로 이전시켰다고 한다. 새마을 운동만 수출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울이 아닌 곳에 뿌리를 내린 대학 중 하나가 한국신학대학 즉 한신대학이다. 한신대는 ‘진보’를 ‘아예’ 학교의 이념으로 내세우는 몇 안 되는 대학이기도 하다. 1940년 설립된 조선신학교가 전신인 한신대학교는 장준하 선생이 1949년 편입해 와서 졸업하긴 했지만 성서연구와 목회자 양성에만 전념하는 조용하고 작은 대학이었다. 하지만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충격을 받고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하기 시작한다. 학교 특성상 규모가 크지 않고, 서울의 변두리 수유리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 대학이었지만 스승과 학생들이 같이 싸웠다는 점에서 다른 대학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 문익환, 문동환 형제와 안병무, 서남동 교수가 대표적인 존재들이고 김수행 교수 역시 1980년대를 한신대에서 보내다 서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신대는 1980년 종합대학이 되었고, 다음해 오산에 캠퍼스를 마련하고 대부분의 학과를 차례로 이전하며 오산 시대를 열었다. 당시에는 보수적 색채가 강했던 수원 일대에서 한신대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오산, 화성, 수원은 물론 안양과 평택 일대까지 진출하며 어느 곳 못지않게 치열했던 수원 지역 6월 항쟁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여당 일색이었던 이곳에서 30년이 지난 지금은 수원, 오산, 화성의 국회의원과 단체장 12명 중 11명이 야당 소속이니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산 캠퍼스의 위치는 병점역에서 버스를 타고 논 사이로 난 길로 한참을 가야만 갈 수 있는 외진 곳이다. 캠퍼스 배후는 아예 산으로 막혀있으니 수유리 캠퍼스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수유리야 그래도 서울이니 땅값 때문에 그런 곳에 있었다고 해도 80년대 초반에는 땅 값이그리 비싸지 않았을 텐데 왜 이런 곳에 학교를 지었을까? 란 의문이 들었는데 알아보니 1호선 가까이 ‘운동권 대학’이 들어서길 원치 않았던 전두환 정권 때문이었다. 1970년대 관악이나 강남이나 땅 값이 싸기 마찬가지였는데, 굳이 서울대를 관악에 보낸 이유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필자는 87년 그 뜨거웠던 여름에 한신대학은 2천여 명의 학생들 중 절반이 집회에 나왔고, 논 가운데 외길에서 ‘지랄탄’차를 서너 대나 끌고 온 경찰들과 혈투를 벌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전설이 아닌사실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소규모 아파트 단지나 집들이 드문드문 있지만 그 때는 말 그대로 논밭과 작은 마을 밖에 없었을 것이니 그 싸움은 멀리서 보면 참으로 기이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지리적 요건 때문에 학생들이 수원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각자 흩어져서 논두렁 길을 걸어 병점으로 가 버스를 타야만 했다고 한다.
집회 때 학생들이 출정식을 가진 장소는 유동운 열사의 추모비 앞이었다. 1961년 포항에서 태어나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광주진흥고를 나온 후 한신대에 입학한 열사는 1980년 5월 광주, 그것도 도청 사수대의 일원으로 싸우다가 희생되었다. 겨우 만 19세였다. 그래서인지 추모비와 비문도 일부러 거칠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 옆에는 문익환 목사의 기념비가 서 있다. 뒷면에는 유명한 시 ‘잠꼬대 아니 잠꼬대’가 새겨져 있는데, 바위는 보령 웅천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작년에 새로 단장한 한열 동산에 들어선 새 기념비도 같은 곳에서 가져온 곳이라고 하니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의 그 외침이 다시 떠오르면서 애틋한 감상이 들었다. 기념비 외에도 아호를 딴 늦봄관이라는 건물이 있을 정도로 문 목사에 대한 대우가 각별한 이 곳이지만 1981년에 이미 만 63세였던 늦봄에게 이곳에서 정식 강의를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특강을 다녔고, 동지이자 동생인 문동환 목사가 이곳에서 강의를 했으니 그의 정신이 베여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2010년, 개교 70주년을 맞아 한신대학에서는 민주화 운동 자료집 <너와나, 함께 가는 세상(발행 한신대학교 기록정보관)>을 발간했다. 무려 1568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이 책의 제자(題字)는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 문동환 한신대 명예교수 친필이다.
오산 캠퍼스의 건물은 인문관, 과학관, 경상관 같은 무미건조한 이름을 붙이는다른 대학과는 달리 창립자인 송암 함태영, 만우 송창근과 장공 김재준의 호가붙어있다. 묘하게도 모두 조선시대에는 극심한 차별을 받았던 변방 함경도 출신들이다. 문익환 목사 역시 부친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이고 국경을 넘어 명동을 개척하면서 그 곳에서 태어났다.
함경도 출신들이 서울 변두리인 수유리에 신학교를 세우고, 다시 오산의 변두리에 종합대학을 만든 한신대의 역사. 어쩌면 주류와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역사...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자유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었고, 한국 현대사 적어도 민주화 역사에 있어서 학교 규보다 훨씬 큰 흔적을 남겼던 것이리라. 이 대학 교수 출신인 김상곤이 경기도 교육감에 당선되어 무상급식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여 21세기의 화두인 복지문제에 대해 새로운 충격을 던졌다. 이 역시 한신대의 교풍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앞으로 작은 대학, 지방에 위치한 대학들이 한국 민주화에 미친 공헌과 영향에 대해 좀 더 고민하고 연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크지 않은 한신대 오산 캠퍼스를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