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뤼순감옥 단상
중국 뤼순감옥 단상
글. 사진 권기봉(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안중근 의사가 옥중 사망한 중국 뤼순감옥을 찾았을 때 우선 눈에 띄는 것이 감옥 건물의 독특한 색깔이었다. 색깔이 두 가지였다. 3~4층 정도 되는 건물의 1~2층까지는 회색 벽돌로, 그 위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러일이 지은 뤼순감옥
알고 보니 아래층은 일본에 앞서 뤼순을 지배한 러시아가 지은 것들이었다.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중국인이나 무정부주의자 등을 가둬두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 감옥을 접수한 뒤 3~4층으로 증축하고, 옆으로 50여 미터를 더 늘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부가적인 건물들도 더 세워졌다.
그렇게 해서 83칸에 불과했던 감방은 253칸으로 세 배 이상 늘어났고, 결국 중국 동북지방에서 제일 큰 감옥이 되었다. 한 마디로 일본 역시 자신들의 지배에 저항하는 조선인이나 중국인, 혹은 그 외 나라에서 온 반제국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뤼순감옥을 이용했던 것이다.
감옥뿐만 아니라 뤼순이나 근처의 다롄 시내에도 그들이 남기고 간 건물들이 여럿이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사실 중국인들에게는 남의 나라를 제 멋대로 휘젓고 다닌 똑같은 제국주의자들이었을 뿐이다. 러시아와 일본이 이 지역에 대한 '안정적 통치기반 마련'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사이좋게 바통을 주고받은 셈이다.
다음으로는 건물 구조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건물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각 건물들이 방사형으로, 즉 부채살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이었다. 지난 1791년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죄수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감옥 ‘파놉티콘’의 아이디어를 따온 시설이었다.
파놉티콘 구조
풀어 말하면, 파놉티콘은 모두를 뜻하는 ‘판’과 본다 혹은 감시한다는 뜻을 가진 ‘옵티콘’을 합성한 용어이다. 한 마디로 ‘모두를 감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건물 구조를 방사형으로 설계한 뒤, 한 가운데에 감시석을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에 올라앉은 간수가 그곳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건물에 수감돼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수의 간수가 다수의 죄수를 감시할 수 있게 함으로써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뤼순감옥 간수의 자리에사 본 옥사 내부
또 그 중앙에 있는 간수의 자리는 늘 어둡게 하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함으로써 중앙에서 감시하는 감시자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죄수들이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고, 결국 수감자들은 규율과 감시를 내면화해 스스로를 감시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탓인지 중국에서는 최근 들어 뤼순감옥을 국가적인 역사 교육 현장으로 정하고 학생들의 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힘이 없으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지배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현장으로서 뤼순감옥만큼 훌륭한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재 중국 내의 여러 상황들 때문에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일단은, 사람이 사람다운 권리를 누리며 살기위해 투쟁했던 이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서 ‘현장’보다 나은 것은 없기에 뤼순감옥은 중국에서도 중요한 역사문화재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 감방 내부 / 안중근 감방
다만 지난 1945년 ‘붉은 군대’가 진주하면서 사용이 중지되었다가 1971년 들어 전시관으로 개방된 뤼순감옥은, 이미 1988년에 중국의 국가중점 역사문화재로 지정되었음에도 2008년까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자유로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교도소장실 바로 옆에 있는 한 작은 방, 즉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직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방을 직접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뤼순감옥을 이른바 ‘애국주의 교육 시범기지’로 지정해 중국인들의 방문을 적극 유도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외국인 출입이 허용되고 있다. 당연히 적잖은 한국인들도 이곳을 찾고 있다. 보수 복원 공사를 했기 때문인지 최근에는 예전에 비해 한결 말끔해진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고 있다. 안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20여 제곱미터 규모의 사형장도 해방 뒤 오랜 기간 세탁장으로 쓰였지만 이제는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다. 또 조선을 비롯한 미국과 일본, 러시아, 이집트 출신의 항일 인사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공간을 꾸며 놓기도 했다.
다만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던 곳에서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감방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신채호 감방
안중근 의사와 관련해서는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영어 등 4개 국어 안내판이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신채호 선생의 경우엔 영문 이름부터가 오류였다. ‘Shen Caihao’라는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국적도 'North Korea'로 되어 있었다.
이름과 국적이 그러한 상황에서 설명문 내용도 사실과 달랐다.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을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호를 붙여 '북한혁명선언'이라고 잘못 표기해둔 것이다.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역사가가 6년 동안 갇혀 있던 감방치고는 홀대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안중근이라고 하는 국제적 스타의 그늘에 가려진 경우는 단채 신채호 선생만이 아니다. 안 의사의 업적을 깎아 내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다른 민족해방운동가들에 대해서도 합당한 관심이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중국’이라는 일국의 범주를 넘어서는, 인간 본연의 권리를 되찾고자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수많은 다국적 투쟁가들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였다.
파놉티콘은 과연 뤼순감옥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역사 속의 시설일 뿐일까? 그리고 뤼순감옥은 중국인의 반제 투쟁의 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까?
2016년 현재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뤼순감옥의 역사,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격량 속에 있다. 남과 북, 그리고 미국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서로 폭격이니 전쟁이니 하는 언사를 남발하고 있다. 중․일 간에도 영토 분쟁을 빌미로 한 갈등의 파고가 높다. 우리는 과연 평화와 인권을 향한 공동 투쟁의 현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