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분배의 불완전함이 만든 ‘엘리트 민주주의’
글 정법모 박사,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sao0526@snu.ac.kr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 30주년 기념행사 ©연합뉴스
빈곤, 부패, 치안불안의 늪
필리핀은 1986년 일찍이 ‘피플 파워(people power)’란 이름으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 1987년 한국, 1988년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아시아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나라이다. 2001년 두 번째 민중혁명을 통해 부패 대통령을 탄핵했고, 여성 대통령 두 명을 배출했으며, 다수의 정치인과 행정 관료가 여성이다. 아동, 여성, 노동자, 성소수자 등에 대한 국제협약 서명국이고, 1987년 헌법 등 매우 진보적인 법률이나 제도를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일찍 구축하기도 했다. 마르코스 독재시기에 정권 탄압을 피해 학교나 종교 기관의 엄호 아래 활동했던 사회운동 세력들이 1987년 이후 시민단체로 전환하면서, 현재 필리핀에는 약 25만에서 50만 개의 시민단체가 있을 정도로 시민사회도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필리핀은 2014년 기준 24.8%의 빈곤층이 있고, 인구 열 명 중 하나는 해외 이주노동자일 정도로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나라이기도 하다.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농산물이나 광물 등의 1차 산물을 수출하는 데 초점을 두고 2차 산업 육성을 등한시했던 필리핀 경제는 자생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다른 인접 국가들이 하나씩 경제적으로 추월해 가는 동안 필리핀은 만연한 부패와 잘못 설정한 성장 전략으로 인해 몰락해 가는 국가 이미지를 형성해 왔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필리핀 사회에 “필리핀에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훈육(discipline)”이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이 말은 맞는 말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최근 필리핀 경제는 이주노동자 송금이나 비즈니스 아웃소싱인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산업의 성장으로 글로벌 경제위기를 잘 넘겼을 뿐만 아니라 최근 5년 동안 5%가 넘는 경제 성장률을 보이면서 국제 신용 평가 회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장밋빛 경제 전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패 이미지가 강하고, 무엇보다 ‘위험한’ 나라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강도나 유괴 등의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데 비해 국가의 치안 능력은 낮은 수준이다. 더욱이 이슬람이나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반군이 심심치 않게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으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무장 그룹도 있다. 또한 정치인, 언론인, 주민 리더를 대상으로 한 초사법적 살해나 선거 관련 폭력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국제 시민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리핀 대선 주자들의 거리유세 ©연합뉴스
필리핀 민주주의의 좌표
‘피플 파워’로 아시아 민주화 선도했으나
동시에 부패와 성장 전략 실패,
치안의 약화로 몰락국 이미지 짙어
2000년대 초반 한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필리핀에 연수를 떠난 적이 있다. 당시 많은 참가자들은 진보언론이나 시민사회의 정부 감시 기능 등을 기준으로 필리핀이 한국보다 뒤쳐져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필리핀의 정치, 경제의 다양한 단상들을 도식적인 기준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독재자의 자손이 집권한다고 했을 때, 필리핀 친구 중 한 명은 나에게 걱정을 담은 메일을 보내왔다. 2009년에는 코리 아키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즈음하여 피플 파워의 상징 같았던 노란 물결이 거리를 뒤덮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지지율이 낮았던, 마르코스 정권에서 암살된 니노이 아키노 상원의원과 코리 아키노의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필리핀이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국내외에 전하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2016년 대통령 당선 발표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당선인 ©연합뉴스
하지만 올해 총선, 다시 필리핀 민주주의의 추는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과 아들딸뿐만 아니라 부패 혐의로 물러났던 에스트라다 대통령, 부패와 부정선거 오명으로 얼룩진 아로요 전 대통령도 국회의원이나 지자체 선거에서 모두 건재했다. 그리고 범죄인은 몸소 단죄하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한 두테르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하였다. 마르코스의 아들이 간발의 차이로 부통령에 낙선한것을 그나마 위안거리로 삼을 것인가? 담배꽁초를 버리는 일이나 심야에 술을 파는 일까지 규제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두테르테가 당선되고, 아버지가 계속 대통령으로 재직했다면 필리핀도 싱가포르처럼 번성했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마르코스 2세가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 선거 직전에 빈민 지역에서 만난 한 청년의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someone with heart’가 아니고 ‘strong man’이다”라는 것이 필리핀 국민들의 보편정서였을까?
한국의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필리핀에 갔을 때, 오랫동안 필리핀 NGO에서 활동한 외국인이 “필리핀은 아시아의 모범은 못 되겠지만, 사회를 공부하는 ‘텍스트북’으로는 좋은 곳”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고 시민의식이 높았던 나라, 동시에 일상생활에서 폭력의 그늘이 지워지지 않는 나라. 만일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좌표가 있다면 필리핀을 어디에 놓는 것이 알맞을까? 단선적인 성장 궤도에 낮게 위치 지우고, 한국의 과거쯤으로 파악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는지 모른다.
부의 재분배, 민주 정치에도 중요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가 높은 필리핀은
절차적 민주주의만큼이나 부의 재분배가 중요함을 방증한다
필리핀에 대해서 ‘피플 파워 피로(people power fatigue)’나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democratic fatigue)’란 말을 자주 쓴다. 필리핀 서민들이나 주민조직은 “더 이상 ‘시위’로 해결되는 것이 없으니, 당장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 달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이야기하거나 이제 ‘경제 민주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언설들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가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필리핀의 사례를 보면,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엘리트들이 머릿속으로 상상해낸 산물이며, 특정 계층이 전유하고 규정하는 대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서 경제적 부의 혜택을 원한다는 것이다. 선거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실제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결과로 이어져야 했다.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고 이야기되는 아키노 가문의 정치인들은 한 번도 경제 구조를 변형시켜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최고의 부를 보유하면서 토지 분배를 규정했던 법률을 피해가기 바쁜 가문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엘리트들의 민주주의 논의가 실제 삶을 바꾸지 못했음을 느꼈고, 두테르테의 정치가 위험한 ‘포퓰리즘’이라 할지라도 막연한 기대하에 위험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은 빈곤 등 경제 문제가 많다. 사진은 필리핀 부랑자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부의 재분배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기반이 약한 것인가는 여러 국가의 사례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정치체제에서 선거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대표자를 선택하는 이 ‘절차’는 분명히 중요한 것이지만, 그만큼 더 많은 국민이 부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이 분배 시스템의 변화는 개인적인 욕망들을 담고 있는 선거 하나로는 달성되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개인들의 선택은, 공생을 위해서는 공정한 분배가 우선임을 깨닫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언젠가는 집합적 다수로 수렴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