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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 지금, 여기, 우리의 질문

<자백> - 지금, 여기, 우리의 질문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


청문회장에 들어선 나이든 남자들은 대부분 “모르겠다”고 말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라고 이름 붙여진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많지만 사건의 실체를 속 시원히 진술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주변 사람들을 잘 관리하지 못했”거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나지 않”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만 한다. 사건은 벌어졌고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번 사태의 경우 국민 전체, 내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피해자다) 모두 모멸감을 느끼고 화를 내고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책임을 ‘자백’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자신은 깃털일 뿐이라는 그들의 말에는 기시감마저 든다. 그렇다면 사실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건 고작 최순실 개인이 아니라 후안무치한 그들이 세우고 지켜온 시스템, 그리고 그동안 단 헌번도 그들을 벌하지 못한, 어쩌면 하지않은 모두일지 모르겠다.

이제 ‘자백’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들로부터 받아내야 할 자백. 그리고 우리가 뱉어내야 할 자백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자백의 시간.


# 그들이 사는 세상

<자백>에서 최승호 감독을 만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시종일관 “저와는 관계없는 일”, “잘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유학생간첩단 조작 사건에 대한 질문의 답이다. 증거를 들이밀어도 구구절절 핑계 늘어놓기 바쁘다.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이 벌어진 70년대,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이었다.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문을 해대고 성적 학대까지 일삼았다는 악명의 남영동 대공분실이 그의 주무대였다.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 뿐 아니라 수많은 간첩단 사건이 고문을 통한 허위자백으로 무죄임이 입증됐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사를 지휘한 자신의 자필 문서까지 들이밀었지만 그는 “자신은 간첩사건을 조작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저 사법부의 소관일 뿐”이라는 것. 말인즉슨 틀리지는 않다. 지금 당장 그에게 도덕적 책임과 사과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법적인 책임은 요구할 수 없다. 잘나가는 공안검사 김기춘은 ‘법’을 빠삭하게 꿰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법조 미꾸리지’라고도 불린다. 법치국가에서 ‘법’을 꿰고 있다는 건 사회의 시스템과 구조를 꿰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보다는 김기춘을 비롯한 ‘그들’, 한 번도 법의 징치를 받은 적 없고 단 한순간도 권력과 금력을 놓아본 적 없는 이들이 이 사회의 시스템을 만들어왔다는 것에 더 가깝다. 그건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에서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같은 말로 법을 조롱하는 모습이 증명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김기춘은 법을 어떻게 유려하게 ‘이용’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자신을 옥죄어 올 증거들의 증거능력을 떨어뜨리고, 밝혀내기 어려운 심증은 모르쇠 잡아 떼 확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확신범이다. 그들은 “이 나라에서 너희들은 우리를 벌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명 그건 그동안의 역사가 증명해온 사실이다. 사실 지금 광장에 넘쳐나는 100만의 촛불도 저 확신범들의 체제 안에 남아있다. ‘저들의 평화’.


# 공포와 체념, 순종과 부역

<자백>에 등장하는 김승효 씨는 김기춘이 조작한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다. 남영동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그는 백발의 노인이 된 지금까지 정신질환을 안고 살아야했다. 일본어로 더듬더듬, 가끔 허공을 향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그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한국말로 또박또박 말을 하던 그 순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섬칫한 순간이다. “한국은 나쁜나라입니다” 김승효는 한국이 자신에게 가했던 폭력,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불사했던 잔인함을 기억하고 있다. 몸과 마음으로 모두. 그 순간 자백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개인에게 어떤 폭력을 가해왔는지 그리고 그 폭력은 개인에게 어떤 상흔을 남기는지 명백히 보여준다. 그건 일개 정보기관이나 악질검사가 어느 억울한 개인 한 명에게 저지른 폭력이 아니다. 국가라는 집단의 폭력이다. 분노가 치미는 일이지만 사실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은 의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같은 불의가 권력을 잡고 수십년을 살았으며, 공화국의 시민이라고 자부하던 이들은 왜 그들을 징치하지 못하였나 하는 의문이다.

이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싹을 틔워 순응과 외면이라는 최면으로 길러지다 결국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부역’이라는 열매를 만들었다. 이 불의한 사회 시스템을 주권자를 자임하는 자들이 징치하지 못하고 방조하는 일은 부역이다. 우리는 왜 청문회에 나온 이들이 잘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재벌 총수들이 수백억 수조원씩 뒷주머니를 차도 그러려니, ‘나라에서 시키는 일’에는 무조건 순종하며 ‘국가가 강요한 질서’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을 혼동하기 시작했을까. 김승효와 유우성이 간첩으로 꾸며지고 그 간첩에 대한 조작된 공포를 기반으로 불의한 그들이 국회의원, 대통령이 되고, 재벌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죽이고 착취하는 세상을 왜 당연한 세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을까. 건국이후 단 한 번도 견제받고 위협당하지 않았던 권력의 ‘영생’에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부역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김승효가 말한 나쁜 나라 한국의 실체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자백을 해야 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 자백을 받아내는 방식

<자백>은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동안 정치적 올바름을 무기로 내세운 영화들이 그 올바름에 만족해 성긴 만듦새로 일관해 왔다는 건 슬프지만 사실이다. 풍자와 조롱을 구분하지 않고 상대에 대한 악의적 폭력을 착취하며 낄낄거리는 데 그치기 일쑤였다. <자백>이 좋은 영화인 건 그처럼 조야한 태도를 배제하고 진지하고 객관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모든 흠을 무시하게 하는 전가의 보도가 아님을 영화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도 그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

<자백>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건 이제 우리가 저들로부터 어떻게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사이다 발언과 통쾌한 욕지거리가 난무하며 ‘저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면 작은 과오는 눈감아야 한다’는 태도, 내가 이루고 싶은 목적 (그 목적이라는 게 얼마나 정의로운지는 중요하지 않다)을 위해서라면 어떤 오류와 악의도 상관없다는 태도는 사실 남영동에서 살을 찢고 사실을 왜곡하던 저들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자백>의 최승호 감독이 보여준 것 같은 냉철하고 진지한 질문과 고민이다. 세상을 바꾸는 건 화를 누르고 던지는 더디고 느린 질문이다.

동시에 질문은 우리가 스스로 자백하는 방식이다.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 무엇을 착취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하여 무엇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반성하고 다시 싸우게 하는 일.

# 지금, 여기, 우리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은 올라가는 엔딩 스크롤을 보지 않고 일어서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자백에서 (놓쳐서는 안될)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엔딩 스크롤에 있다. <자백>의 엔딩 스크롤에는 지금까지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최종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목록이 들어있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목록은 1997년을 마지막으로 끊겼다가 2011년에 다시 이어진다. 97년을 기준으로 과거가 된 듯했던 국가의 폭력이 현재로 다시 소환되는 것 같은 장면이다.

국가의 폭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그들은 여전히 모른다고 말하고 꼬리를 자르고 법을 수단삼아 도덕을 조롱한다. 그들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무의미하게 저항하다 이내 포기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으로 그에 부역한다.

헌정사상 가장 뜨거운 겨울이다. 거리에는 100만개의 촛불이 마치 들불처럼 번져간다. 이 들불로 무언가 태워내지 못한다면,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와 제도와 시스템과 그들의 권력의 불의함을 자백받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에 앞서 거기에 순응해온 우리의 나태함과 어리석음을 자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다시 부역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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