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6월항쟁] ‘시민정치’를 통한 민주공화국 개편
‘시민정치’를 통한 민주공화국 개편
직접민주주의 보장하는 개헌과 견제·균형 원리 복원 필요하다
글 정상호 서원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shojeong@seowon.ac.kr
광장의 정치의 본질: 자기입법 원리로서 시민정치
2002년 효순·미선 사건부터 2004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시위, 2008년의 수입쇠고기 반대 광화문 촛불집회, 그리고 최근의 전국적인 박근혜 대통령 퇴진시위에 이르는 광장의 정치 또는 촛불집회는 시민정치라는 틀로 정리하는 것이 생산적이다. 시민정치의 틀은 역사적 맥락 및 이론적 뿌리를 해명함으로써 횡적으로나 종적으로 비교를 가능하게 만들고, 유익한 정치적 함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왜 시민들은 ‘주기적’으로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이는가?
필자는 광장의 정치가 반복되는 근본적 원인이 한국정치의 근본 설계가 주권자 시민의 자기입법(self-legislation) 원리에 대한 기만과 무반응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이론적 뿌리는 장 자크 루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자신이 다루고 있는 입법의 원리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민법이나 형법이라 부르는 사회적 관계의 규율에는 해당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권자로서 시민들이 집합적으로 행사하는 입법권의 범주는 루소가 근본법(fundamental laws) 또는 정치법(political laws)이라고 부르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이 근본법은 오늘날의 헌법처럼 국민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통치구조의 기본 형태를 결정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것을 좁은 의미의 헌법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존 롤스가 말하는 ‘사회의 기본구조(the basic structure of society)’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루소가 주권자들로서 시민들이 갖는 입법권, 따라서 정당성 있는 정치공동체의 핵심 원리로서 자기입법의 원리를 강조했을 때, 그가 뜻하는 바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 내지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모든 시민 각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그리고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시작하자 시민정치”라고 쓴 피켓을 들고 촛불집회에 참여한 어린이 ©녹색당
왜 유독 대한민국에서 시민정치가 활성화되고 있나?
시민정치의 가능 조건은 그것을 구현할 주체, 즉 좋은 시민에 있다. 이러한 이해는 후기산업화의 탈물질주의적 가치의 확산이 민주주의의 해방적 효과를 낳는다는 잉글하트·월젤(『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2011)의 경험적 연구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후기산업화가 대부분의 선진국들에서 자기표현가치(Self-expressive values)를 증진시킨다는 점이다. 획일화와 표준화를 강조하였던 산업화와 달리 후기산업화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통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즉각적인 생존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연대를 가져온다. 둘째는 후기산업화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 즉 ‘시민행동주의’에 대한 강조이다. 후기산업사회의 정치참여 방식은 엘리트가 이끄는 선거 캠페인과 정당정치에서 대중의 자기표현이라는 자율적인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셋째로 후기산업화는 금전과 권력, 생존과 같은 물질주의적 가치에서 행복과 삶의 질 등 ‘탈물질주의적(post-material) 가치’로 목표의 전환을 가져왔다.
요점은 대한민국이 비록 미국이나 서유럽보다는 탈물질주의 지표에서 떨어지고 북유럽보다 높은 복지 수준을 누리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그들만큼 또는 그들 이상으로 좋은 시민의 행동주의적 성향과 가치를 체득·체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자기표현 가치’를 구현하는 데 창의적이며(세월호 고래풍선, 명박산성 등), 시민행동주의(참여인원)에 적극적이었다. 결국, 이 나라의 시민들은 투표와 납세, 준법을 강조하는 국민에서 관용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좋은 시민’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입법 원리의 제도화: 개헌의 중심 과제
그렇다면 시민정치의 제도화, 즉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 시민의 삶과 직결된 중요한 정책과 문제를 결정하는 데 국민투표와 시민발의라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우선 직접민주주의 안에 있는 두 가지 유형의 국민투표(popular votes), 즉 자발적 국민투표(Referendum)와 정부발의의 동원형 국민투표(plebiscite)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칠레 교황청립 가톨릭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다비드 알트만은 엄격한 기준에서 볼 때 직접민주주의는 시민발의와 시민발의에 의한 국민투표를 일컫는 것이며, 위로부터 기획되어 권력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투표(plebiscite)나 단순한 자문 절차 또는 부분적 결정을 의미하는 주민참여예산제 등은 직접민주주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처럼 사람(대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과 이슈를 선택한다. 이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 <표 1>이다.
스위스의 사례는 왜 직접민주주의가 시민정치의 본령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스위스의 제도는 헌법 개정이나 국제기구 가입 등의 국가적 중대 사안에 대해 정부와 의회가 주도하는 ‘의무적 국민투표’, 의회가 통과한 입법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선택적 국민투표’, 18개월 동안 1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는 시민발의가 있다. 시민발의의 경우 연방의회가 이를 거부해도 제안자들이 스스로 이를 철회하지 않는 한 발의된 개정안은 국민투표에 회부된다. 이번 개헌을 통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수준에서 이러한 민주주의 원리를 적극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촛불민심을 항구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이고, 정당정치와 의회정치, 중앙정치와 지방정치, 시민단체를 활성화하는 상생의 해법인 것이다.
공화국의 또 다른 원리: 견제와 균형의 복원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에 수백만의 시민이 모인 이유 중의 하나는 소수 권력층의 오랜 전횡에 검찰이나 감사원, 여당과 야당, 언론 등 그 어떤 정부조직과 제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소위 ‘이게 나라냐’라는 정당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점차 권력을 독과점하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집단의 유착과 전횡을 이번 기회에 근절하자는 의지로 발전하였다. 그러면 3권 분립의 기계적 균형을 넘어선 이 과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그 단초는 시민들의 오랜 지혜가 담긴 공화국의 ‘의미의 전복’ 현상에 주목하는 것일 수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과 같은 군사독재정부가 자신의 정권을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표방하자 대중들은 거꾸로 공화국이라는 단어의 뜻에 무소불위의 권력의 이미지를 덧씌워 버렸다. 이제 공화국은 이소노미아(비지배 균형)라는 지향해야 할 가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견제 없는 권력 집중과 과도한 권한 행사라는 불의한 현실을 꼬집는 비판적 개념이 되었다. 2016년 광장의 시민들은 특히 ‘검찰 공화국’, ‘재벌 공화국’을 문제 삼았다. 또한 오래 전부터 공화국의 시민들은 국정 역사교과서를 주관한 ‘관료(교육부) 공화국’과 ‘서울 공화국’이 공화국의 적폐라고 생각하여 왔다.
자기입법 원리로서 직접민주주의의 제도화가 개헌의 문제라면 4대 개혁 입법은 차기 정부의 중대한 국정과제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엘리트검찰과 정치검찰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는 물론이고 최근에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검사장 주민직선제’를 도입하자. 둘째, 재벌개혁을 위해서 전경련 해체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를 넘어서, 비정규직과 청년취업을 위한 새로운 노사정대타협이 필요하다. 성과연봉제나 임금피크제 등 대기업·공공부문의 정규직과 재벌 기업의 나눠먹기 협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과 시민단체의 참여를 보장하고, 의제로는 ‘기본임금제’ 도입이나 최저임금제 대폭 인상 등을 다뤄야 한다. 셋째, 교육개혁이다. “대학 자율성을 침해하는 교육부를 해체하고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어야 하며, 초·중등 교육은 지방교육청이, 대학 등 고등교육은 각 대학이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지원처’로 교육부를 개편하자는 안철수 전 대표의 국정감사 제안은 매우 합리적이다. ‘교육부 해체’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교육 주체와 관련 연구자들의 진지한 검토와 적극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넷째, 지방을 중앙정부에 종속된 하위단체가 아니라 독자적인 지방정부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예산과 권한의 재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제, 좀 더 냉정해져야 하는 시간이다. 광장의 정치와 촛불집회 등 시민정치가 항상 거리에서는 선전하였으나 선거에서는 좌절하였던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다. 또다시 개헌을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두고, 야권 분열 속에서 권력을 넘겨주었던 87년 6월항쟁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효순·미선 추모 촛불은 이후 사드 배치나 제주해군기지 등 평등한 한미관계의 수립에 기여했는가? 광우병 촛불은 4대강 사업을 저지하였는가?
개헌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에 담겨야 할 내용은 자기입법 원리로서 직접민주주주의의 제도화가 관건이다. 탄핵의 최종 결정까지 각 정당과 정치인들은 개헌의 구체적인 방향을 놓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시민단체의 역할이다. 지금까지의 개헌 논의가 정부나 권력 형태에 집중되어 왔다는 한계에 주목하여, 중앙과 지방에 적용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매뉴얼을 개헌 의제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목전에 닥친 대통령 선거 역시 중요하다. 개헌과 별도로 야3당은 앞서 제시한 국가개혁을 위한 4대 과제(검찰·재벌·교육·분권)의 핵심 내용과 일정을 담은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정치협약’이나 ‘공동정부’라면 야합이나 거래라는 일각의 비판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정권은 4대 국정과제의 실행력을 담보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확대 같은 선거법 개정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새로운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소극적 의미에서 박정희-박근혜의 반세기에 걸친 구체제(old regime)의 종말이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국가의 중대사를 의회와 더불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겠다는 자기입법 존재로서 시민의 등장을 의미한다. 앞으로 3개월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진로를 결정할 뜨거운 겨울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국가로서, 그리고 산업화 단계에서는 뒤늦었으나 이제 바야흐로 시민정치의 선도 국가가 될 호기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