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닮은 듯 다른 브라질의 탄핵정국
한국과 닮은 듯 다른 브라질의 탄핵정국
글 임두빈 부산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원 HK교수 idb88@bufs.ac.kr
지난 12월 9일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한민국은 이제껏 가보지 못한 길을 촛불을 밝히며 찾아가고 있다. 2016년 8월, 지구 반대편인 브라질에서도 브라질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지우마 호세프(Dilma Rousseff)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태가 일어났다. 이 탄핵 사태는 2016년 1월 1일부터 11월 27일 사이에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주제들 중 2위로 집계될 만큼 글로벌한 이슈였다.
헌법적 권한 강하지만 의회 지지기반 적은 브라질 대통령
브라질은 중남미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제와 내각제에 관한 논쟁이 치열했던 국가다. 1985년 오랜 군사독재 시대가 끝난 후 1993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제 공화제를 정부형태로 정했다. 브라질의 대통령제는 비례대표제, 연방제, 다당제와 양원제가 결합된 형태이며, 행정부와 입법부 간 견제와 균형을 기반으로 한 미국 모델과는 달리 대통령과 행정부로의 권력 집중이 두드러지며 권위주의적 유산도 남아있다.
브라질은 의회의 입법권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이를 막기가 어렵고, 대통령이 ‘임시 조치권’을 통해 대부분의 법안을 추진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하다. 반면에 고도로 분화된 정당체계 때문에 집권당은 소수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브라질 대통령은 주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대개 연정을 꾸리고 여러 정당에 권력을 나눠주게 된다. 사정이 이러니 브라질 대통령의 인기가 급락했을 때 자칫하면 의회로부터 탄핵을 받을 수 있는 취약점을 항상 안고 있다.
이미 1992년에 브라질 하원의회는 군부독재 이래 30년 만에 직접선거로 선출되었던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Fernando Collor de Melo)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시키기도 했다. 당시 콜로르 전 대통령이 속한 정당의 의석수는 5%에 불과했다. 그러나 몇 년 뒤 대법원은 콜로르에 대한 탄핵 사유에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 대통령은 정당이나 의회의 지지보다 대중 인기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에서 항상 ‘포퓰리즘’ 정치가 비판을 받고 그 부록처럼 부정부패의 문제가 등장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포퓰리즘과 부패가 만연한 정치문화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은 1992년 탄핵 소추된 콜로르에 이어 24년 만에 탄핵으로 실각한 두 번째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호세프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이해하려면 전임 대통령인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에 금속노조위원장 출신인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Ina´cio Lula da Silva)는 2002년 대선에서 우파 여당후보를 꺾고 승리해 정권을 잡았다. 이는 브라질 역사에서 노예해방과 버금가는 큰 사건으로 여겨진다. 당시에는 브라질 국민들의 75% 이상이 정부정책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당시 우파 정부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드높았다. 그러나 룰라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외신 보도가 나올 때마다 주식, 채권과 헤알화의 약세가 거듭됐다. 룰라는 시장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전 정권의 친시장적 정책 유지를 약속하는 유화책을 폈다. 룰라는 중도 노선을 걸으며 과거 지지층인 좌파세력으로부터 변절자라고 비난받았지만, 강력한 세제개혁과 연금제도 개혁을 승인하면서 폭 넓은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2006년에 연임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노동자당과 룰라 정권은 2005년 ‘페트로브라스 비리 스캔들’로 전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결국 이 분노의 총구는 룰라의 정치적 후계자인 호세프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대내외 경제 환경의 악화와 부패, 통치자의 무능함이 어우러져 노동자당은 결국 브라질 역사상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당으로서는 가장 오래인 13년 132일의 집권 기록을 남기고 한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야권의 탄핵소추에 몰려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게 된 호세프는 탄핵 정국 내내 부당성을 호소하며 “인기가 없다고 대통령을 탄핵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탄핵은 실제 부패 의혹의 주도자들이 벌인 의회 쿠데타이다”라는 변론을 폈다. 그러나 호세프 전 대통령은 자신을 탄핵정국으로 이끈 국민들의 대규모 반정부시위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모두의 노력’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사실 브라질이 현재 겪고 있는 혼란의 기원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곳에 있다. 좌파나 우파 모두 부패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호세프의 탄핵을 주도했고 현재 대통령직을 수행 중인 우파성향의 테메르 전 부통령 또한 측근들이 줄줄이 각종 비리 의혹에 휩싸이면서 최근 탄핵 위협에 직면해 있다. 몇 번의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도 아직도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도 희망적인 사실은 1822년 식민지 독립 이래 사회계층의 고하를 가릴 것 없이 사회적·문화적으로 고착화된 고질적인 부패의식을 거부하고 실종된 국민주권을 바로 세우려는 시민의식이 행동으로 나타나 사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에 주는 메시지
브라질의 민주화운동 과정은 우리나라의 상황과 서로 다른 점이 많아 보이지만, 외래의 식민 지배를 겪은 것이나 비슷한 시기에 군부 독재시대를 겪은 것,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을 배출했다가 탄핵에 이른 점까지 의외로 비교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많다. 실제로 이번 사태의 표면만 보더라도 최초의 여성대통령, 탄핵사태, 전대 후광을 업은 정치인, 높았던 지지율의 무한대 하락, 광장과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 대통령의 버티기 등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동일한 사건처럼 보인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에서 우리 시민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성숙한 평화적 시위문화는 우리 근대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 브라질은 이러한 평화적인 길거리 시위에 익숙하다. 그 기원은 매년 1~2월에 열리는 카니발 축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브라질 사회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외부의 선입견과 규범으로는 진입할 수 없는 공간이 많다. 사람들은 가문, 학력, 피부색, 거주하는 동네, 인간관계, 권력자와의 친분관계 등에 따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사회적 등급이 매겨져 있다. 브라질 사람들에게 카니발은 모든 것을 정반대로 뒤집고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탈출할 수 있는 출구이다. 따라서 브라질 사람들은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바꾸기 힘든 현실에 대한 저항을 카니발화한 광장시위, 길거리 시위를 통해 표출하는 데 익숙하다. 다만 일상의 역주행이라 할 수 있는 카니발을 일상의 저항으로 옮기는 과제는 그들에게 아직 숙제로 남아있다.
이번 박 대통령 탄핵사태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안겨주었다. 우리 국민들이 광장으로 거리로 나와 다채로운 시위문화로 의사를 표현하며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아 가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카니발 장면과도 같았다.
탄핵소추 발의가 자진 사임이 아닌 강제 사퇴로 귀결된 사례는, 엄격한 사법체계를 갖춘 선진국보다는 중남미와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발생했다. 이 점을 볼 때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주소는 불안한 좌표 위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룩한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오히려 주류 정치인들이 퇴색시키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