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운동과 ‘촛불시민’
한국 시민운동과 ‘촛불시민’
‘현상유지적 병존’ 아닌 ‘상호진화적 공존’의 길로 나아가야
글 홍일표 더미래연구소 사무처장
한국 ‘시민운동’의 등장과 성장
87년 6월항쟁이 쟁취한 민주주의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적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으로서 군사독재의 연장 또는 변장이라는 혹독한 것이었다. 그러나 87년 6월항쟁 과정에서 ‘넥타이 부대’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중산층’은, 선거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치민주화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의 출범을 필두로 본격화된 한국의 시민운동은 이러한 중산층의 정치사회적 욕구와 경제적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시민운동의 등장과 성장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새로운 주체(‘시민’)와 방법(‘합법’)의 시대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기존 민중운동에 대한 비판이 과장되게 이뤄졌다. 1994년 창립한 참여연대가 ‘진보적’ 시민운동을 내세우고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교량 역할을 자임했던 것은 이러한 사정과 연관된다. 그럼에도 ‘시민’을 새로운 운동주체로 ‘호명’해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고, 법과 제도를 새로운 운동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이슈를 확산시킨 것 등은 분명한 혁신이었다. 시민운동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은 빠르게 커져 갔다.
한국 시민운동의 성장은 ‘시민단체’와 ‘상근활동가’(흔히 ‘간사’라 불림)의 존재와 분리해 설명하기 어렵다. 활동가들은 회비를 내는 회원을 모았고, 각 분야 전문가를 포함한 자원활동가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조직했다. 시민단체 운영을 위해 정부나 기업 등의 제도적,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했다(참여연대는 예외적으로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거부했지만 여타의 단체가 받았던 지원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활동가들의 헌신과 역량은 시민단체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시민운동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활동가들에게는 기획력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실무역량, 다양한 논의와 자원들을 조정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주되게 요구되었다. 회원이나 자원활동가, 시민들과의 교감능력이 중요했지만 그들과 ‘함께’보다는 그들을 ‘위해’ 싸운다는 의식과 행동 패턴이 여전히 강했다. 특히 정당과 정치인들은 부패와 무능의 대명사로 여겨졌기에 시민운동의 신선한 활동과 구체적 성과들은 언론과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다.
✽ 2002년 ‘붉은 악마’의 월드컵 응원열풍으로 광장을 경험한 시민들은, 같은 해 겨울 미군 장갑차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시위를 열었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
한국 시민운동은 기존 정치와 기성 정당의 부패와 무능을 강하게 비판했고,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그들과의 거리두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시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이 대표적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을 퇴출시키자는 시민운동이 만들어 낸 엄청난 결과에 시민들과 정치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당시 학계에서는 ‘대의의 대행’으로 설명했다. 정당과 국회가 주축이 되는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시민운동이 그것을 대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민운동에 대한 시민적 지지가 높았다는 의미다. 이는 비단 낙선운동뿐만 아니라 다양한 법·제도 개혁을 이끌어 낸 것까지 포함한 평가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라는 정치적 조건도 중요했다. 시민단체가 만들어 내는 구체적 변화는 시민운동에 대한 효능감을 키웠다. 2000년대 초반 시민단체는 가장 신뢰받고 영향력이 큰 집단으로 조사되었고, 시민단체 회원이나 자원활동가 수도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나 비판과 우려도 안팎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홍위병’ 논쟁으로 불리는 이념적 공세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의 과도한 ‘제도화’도 문제가 되었다. 특히 시민운동 스스로도 깊은 고민과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이었다. 시민운동이 시민단체나 상근활동가 중심으로 이뤄지고, 보통 시민들은 그저 후원이나 지지만 보내는 수동적 존재로 고착화되었다는 비판이었다.
뼈아픈 지적이었고 시민단체 활동가들 스스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토로했다. 단체 운영의 관료화에 대한 지적은 많았지만, 자원활동가로 참여하는 시민만으로 ‘단체’ 기반 활동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단체들마다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이를 통해 정보제공, 소통, 참여가 늘어났지만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을 상쇄할 정도로 크게 변하지는 못했다.
촛불 ‘시민’의 등장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시민 없는 시민운동’을 고민하고 있을 때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집회나 시위는 2002년 전까지는 '운동권' 등 특수한 사람들의 몫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02년 ‘붉은 악마’의 월드컵 응원열풍으로 시민들은 광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2년 겨울, 미군 장갑차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 간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의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열렸다.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한 네티즌의 제안에 응답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촛불시민’이 등장한 것이다.
촛불시민들은 촌철살인의 손 팻말을 들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사진은 유모차를 끌고 촛불집회에 참여한 가족의 모습 ©연합뉴스
촛불시민의 등장은 시민운동에 자극과 충격을 주었다. 수천, 수만의 시민들이 밤에 촛불을 들고 스스로 모였다. 인터넷은 촛불시민들이 서로 연결되는 가상의 공간이었고, 광장은 촛불시민들이 만나는 현실의 공간이 되었다. 물론 촛불시위의 지속과 확대에는 시민단체의 역할이 중요했다. 시위 현장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그것을 전후해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조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후 2년 뒤인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무효를 주장하는 촛불시위가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다.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광장까지 촛불의 바다가 만들어졌고, 대형 스크린과 스피커, 잘 차려진 무대장치가 촛불시위 현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시민단체와 촛불시민 사이에 갈등은 표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광우병쇠고기수입반대 촛불시위에서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 1,700여 개 단체가 참여했던 광우병대책위와 촛불시민들 사이에 ‘다름’과 ‘다툼’이 드러났다. 촛불시민들은 “깃발을 내려라”고 요구했다. 시민단체나 기존 ‘조직’들의 깃발에 촛불시민들은 반감을 표했다. 촛불시민의 대부분은 시민단체 경험이 없었다. 인터넷 포털 카페의 회원인 경우가 많았고,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서 정보를 입수했다. 직접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아프리카TV의 생중계를 보며 댓글로 응원을 보냈다. 100회나 계속된 촛불시위는 광우병대책위가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그들이 촛불시위의 ‘지도부’가 될 수는 없었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이명박 정부는 시민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하지만 광장에 모였던 촛불시민들이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 주진 못했다. 그들은 광장을 떠나 일상으로 복귀했고, 시민단체들은 스스로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2012년 대선으로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고 시민운동에 대한 압박은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여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다. ‘세월호의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 대안 마련을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2014년에도 광화문 광장에선 촛불이 타올랐다.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촛불시민들은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으나 변화를 만들어 낼 힘은 없었다.
‘촛불시민’ 이후의 시민운동?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이 이뤄졌다. 오후 4시 10분 정세균 의장이 가결을 선포하는 순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픈 함성’이 들렸다. 같은 시간 국회 앞에 모였던 수천 명도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이것은 전 국민적 함성이었다. 직전에 실시되었던 여론조사에서 78%의 국민이 탄핵에 찬성했고, 탄핵소추 의결 다음날 열렸던 7차 촛불집회까지 포함하면 참가자는 연인원 750만 명이 넘었다. 촛불시민들은 뛰어난 연설 능력과 놀라운 패러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민주주의를 외쳤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촌철살인의 손 팻말과 SNS 컨텐츠들은 2008년 촛불시위와는 또 달라진 진화된 모습이었다.
시민들은 “깃발을 내려라”는 고함 대신 자신들만의 깃발을 만들어 왔다. 장수풍뎅이연구회, 민주묘총 등의 깃발은 시위 내내 화제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 친구들과 연인들, 혼자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단체나 조직은 그들 사이에 어우러졌고, 노동자도, 농민도 ‘시민’과 다르지 않았고, 시민단체도 촛불시민과 갈등하지 않았다. 정당과 국회의원들은 ‘탄핵’이라는 헌법적 절차를 수행할 것을 요구받았다.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대의의 대행’은 더 이상 없었다. 대의는 정당과 국회의 몫이었고, ‘광장민주주의’의 열망은 촛불시민의 몫이었다.
2016년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시민단체의 역할은 작지 않았다. 청와대 앞 100미터 지점까지 촛불행진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도, 매주 대규모 행사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시민단체들이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촛불을 든 모두가 ‘시민 없는 시민운동’에 대해 고민하던 시민단체가 기다렸던 ‘시민’은 아니다. 광장을 떠난 촛불시민들이 시민단체로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들은 ‘비정당적 실천’을 우위에 두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정치도, 국회도, 내년 대통령 선거도 모두 중요하며 ‘광장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는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보도자료와 전문가 토론회가 아니라 SNS의 풍자와 인터넷 게시판 논쟁이 여론을 형성하는 세상이 되었다. 시민단체 회원은 아니지만 스토리펀딩으로 시민운동을 후원하는 경우도 많다. 촛불도 광장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열었다. 하지만 촛불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민단체와 촛불시민, 나아가 현실 정치는 ‘현상유지적 병존’이 아니라 ‘상호진화적 공존’의 관계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촛불은 이미 광화문을 넘어 여의도와 청와대를 향했다. ‘촛불과 광장’의 힘은 그저 시민운동의 주체나 방식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중심부로 진격해 들어갔다. 진화와 진격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서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의 진정한 주권자가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