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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본의 중견활동가들이 말하는 6월항쟁 이야기

국본의 중견활동가들이 말하는 6월항쟁 이야기

이명준 촛불항쟁으로 6월항쟁이 업그레이드 완료

황인성 6월항쟁과 촛불집회의 기본 정신은 주권재민

일시 및 장소 2017년 3월 20일 10:00~13:0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회의실
진행·정리 이종률·김남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관리실 / 사진 유창훈 사진작가

광장에 모인 시민의 힘으로 군사 독재 권력을 끌어내리고 제도적 민주주의를 부활시킨 6월 민주항쟁이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1987년 6월의 함성은 2016~17년 천만 촛불 광장으로 이어져, 시민주권·국민주권을 외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새롭게 다시 쓰고 있다. 민주누리 9호 특집 대담에서는 30년 전의 6월항쟁과 촛불 광장을 모두 경험한 두 분을 모시고 6월항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6월항쟁을 현장에서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서 활동한 이명준 씨와 황인성 씨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6월항쟁의 의의와 한계, 이를 통해 되새겨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지 진단해 보았다.

6월항쟁의 주역은 거리의 국민들
황인성 6월항쟁을 돌이켜보면 내 생에 있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기억인 것만은 틀림없다. 6월항쟁을 이끌어낸 깃발 역할을 한 것이 국본인데, 국본의 조직화 과정에서 일정하게 현장 실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주역은 실제로 거리에 있었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다. 6월항쟁은 이전의 다양한 운동 성과가 집적되면서 터져나온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교사운동, 농민운동 등에 앞장섰던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 가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6월항쟁이 만들어졌다.

이명준 6월항쟁 이전까지만 해도 시위나 집회는 특정인들만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컸다. 그러나 운동가들 사이에는, 전국적인 대형 집회를 조직하면 그동안 관찰자에 머물렀던 국민들이 시위현장으로 꼭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친위 쿠데타 설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비상시를 대비하여 각계를 책임지는 4인을 일종의 연락책으로 뽑았다. 나는 가톨릭, 고 성유보 선생은 민통련, 황인성 씨는 개신교, 김도현 선배가 야당과 민추협을 대표했다. 동교동계의 대부분은 연금되어 역량 발휘를 못 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야당 대표는 김영삼 씨였다. 오늘 대담 자리에 나온 나와 황인성 씨는 6월항쟁에서 국본의 연락책 역할을 하였다. 우리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서 뽑혔던 것이 아니라,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일정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6월항쟁의 전사
황인성 6월항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사(前史)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종교운동은 우리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민과 운동을 분리시키는 용공조작이 횡행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종교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방어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운동의 진정한 요구와 주장을 대중 눈높이에 맞게 번안해서 전달하는 역할을 통해, 이념적으로 급진화되어 대중적 기반이 부족했던 민족민주운동의 한계를 메워주는 역할도 했다. 또한 종교운동이 가진 세계적 네트워크도 한국 민주화의 이슈를 세계에 알려 외교적으로 반독재투쟁에 기여했다.

특히 개신교 쪽에서 86년에 시작한 KBS 시청률 거부운동은 ‘국민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이끌어내었고, 국본의 결성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땡전 뉴스’ 등 정권의 호위무사 역할을 했던 공영방송에 대한 비판 운동이었는데, 이름은 국민운동이라고 붙였지만 처음부터 전 국민적인 논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양상은 국민운동으로 갔다. 스티커를 만들어 배포하고 집 대문과 차에 붙이는 등 대중의 호응을 끌어내는 방식이었는데, 그 전에는 별로 없던 풍경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보니 엄청난 돈이 필요하더라. 민통련, 여성단체, 문화운동단체 등이 다 참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이명준 1986년 5.3인천사태 당시에 나는 천주교 인천교구에서 주보를 펴내는 홍보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송기인 신부가 부산에서 특강을 주선하셔서 내려가 강의를 하고 밤기차를 타고 올라오는데, 인천에 가기 위해 환승을 하려다 영등포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붙들려 인천 동부서 정보과에 잡혀 있었다. 이때 민통련 집행부는 대부분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는데 성유보 선배는 감옥에 안 잡혀 들어갔는다. 나중에 “형은 왜 안 들어갔냐”고 물으니 “나 대중연설 하는 거 싫어하잖아”라고 했는데, “민통련 집회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다 감옥에 붙들려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차별 구속, 수배가 이어졌다. 이때 정권이 이렇게 과격하게 진압을 한 것은 민주화운동도 또한 과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서울 인천 근교에 있었기 때문에 5.3 때 세게 붙었다. 그래서 정권에 무차별 탄압의 계기를 주었고 대중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운동가들의 이념적·행동적 과격성, 이게 5.3에 대한 반성 지점이다.

이후 같은 해 10월 건대 사태까지 거치면서 운동이 너무 과격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사구체·CNP 논쟁이 격렬했는데,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운동권 내부가 지쳐갔다. 양 김과 종교계가 일종의 쿠션 역할을 했던 시기였다. 운동권 내부는 종교계가 가지는 인권운동 성향을 넘어서려는 정치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것도 일정하게 수용을 하면서 같이 가야 했다.


✽ 신민당 개헌추진대회 저지 시위를 벌이고 있는 5·3인천사태 현장

황인성 5.3인천사태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민국련 사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YS, DJ, 문익환, 박형규 등 원로들 모임인 민국련과 학생운동권 사이에는 불신이 있었다. 민국련과 정치권에서는 학생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학생들은 서울의 봄 때부터 명망가 운동, 야당의 타협주의 부르주아 노선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결국 민주화라고 한 게 미국 조정하에 대충 변혁적 열망을 순화시키면서 지배체제를 유지한 것이지 실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이부영, 장기표를 비롯한 중견활동가들부터 안에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의 끝이 격렬한 5.3사태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인천에서는 최루탄 때문에 현판식도 못 하고 완전 박살났다. 정권은 운동권을 과격 용공 집단이라고 칭하고,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전체적으로 운동권을 잡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5.3 사태를 빌미로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 관련자를 수사하면서 몇 개의 반국가 조직사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후 건대 사태까지 가면서 운동권은 거의 초토화된다.

이명준 그게 4.13 호헌 선언의 배경이 됐다. 5.3에서 건대까지 오는 과정에서 극악하게 폭력화된 정부가 결국 박종철이라는 무고한 학생을 죽음까지 몰고 갔다. 그 정도까지 고문할 이유가 없었다.

6월항쟁 직전 4.13호헌조치에 대한 반대 성명들이 많이 나왔지만 구체적인 액션이 나오지 않았을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호헌철폐 단식 기도회를 전국 교구에서 차례로 진행하였다. 이때의 구호가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였다. 이 구호가 난해한 운동권 구호를 대중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개최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것도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다. 6월항쟁 당시에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양 김이 6.26평화대행진에 소극적이었는데, 박종철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항쟁의 동력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박종철을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
황인성 재야 운동권과 야당이 결별해버리고, 야당 안에서는 중요한 개헌투쟁 노선을 두고 분열하고, 가만히 두면 내각제로 합의개헌을 할 정도로 지리멸렬한 상황이었다. 정말 위험한 시기에, 말씀하신 박종철 사건이 터졌다. 그걸 계기로 분열되어 있던 정치권과 민족민주 운동권이 다시 대동단결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국민들 눈에는 정권이 아니라 운동권이 폭력적이고 과격한 집단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을 확 바꾼 것이 박종철 사건이다. 이때의 시민적 분노를 행동과 참여로 드러나게 하는 데 비폭력 평화시위라는 대응 기조가 상당한 기여를 했다. 꽃과 영정사진을 들고 나가고, 클랙슨을 울렸다. 이쪽이 돌을 안 던지니 저쪽도 최루탄 함부로 안 쏘고, 시민들이 대치선상에 접근해 왔다. 처음에는 ‘어이 그러지 마’ 말로 말리다가, 손으로 뜯어 말리고, 나중에는 몸으로 같이 부딪히는 시민참여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전술적 기조 변화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이다. 국민추도회라는 방식 자체가 유효했다. 조문할 때 돈을 내듯 성금을 모으자고 해서 통장을 개설하고, 평화행진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추모제를 조직화하고, 국민행동지침을 내보내는 것이 한번 실험됐다. 이게 나중에 6.10 때 더 체계화된 것이다.


✽ 시위대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최루탄을 쏘지 말라는 당부를 하며 꽃을 달아주고 있는 여성

이명준 ‘고문과 용공 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가 박종철 추모대회를 하며 활동을 넓혀가다가 국민운동본부로 발전했다. 이것이 추후 6월항쟁을 주도한 국본으로 발전한다.

황인성 민족민주운동의 변혁적 지향과 일반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전두환 폭력 정권에 대한 거부감을 어떻게 접합시키느냐에 대한 고민이 컸다. 이명준 선배 말처럼 급진적 노선을 걷던 운동권이 독재정권에 의해 다 깨져나가면서,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 투쟁 때처럼 다소 느슨한 인권 위주의 연대 틀을 통해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시민과 운동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또한 민국련 사태를 통해서 정치권과 재야운동-민족민주운동이 함께 가면 독재정권에 대해 공세적인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운동에 균열이 생기면 수세로 전환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시민대중과의 올바른 결합, 대동단결의 원칙, 이 두 가지를 굉장히 중시하는 내부적인 성찰과 반성이 있었다.

이러한 사전성찰과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박종철 사건을 계기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6월항쟁의 기본모형이 다 나왔던 것이다. 이로써 1986년 하반기 이후부터 1987년 상반기까지 운동권의 주요 인사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폐허가 된 운동조건 속에서, 전체를 단결시키고 새로운 이슈를 계기로 시민대중과 운동권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만 봐도, 옛날 같으면 한 학생이 죽었으면 운동권 행사로 추모제를 하고 정치권 인사가 와서 조문을 하는 정도로 끝났을 일이다. 그런데 87년에는 국민적 결집체계로 대응을 해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국민추도위원회를 꾸리게 되었던 것이다.

6월항쟁에 대한 오해와 진실
황인성 지금에 와 돌아보니 6월항쟁에 대해 잘 못 알려져 아쉬운 점들이 있다. 우선 “개신교가 국본에 들어가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그렇다. 이에 답하려면 국본 설립 직전만 볼게 아니라 1980년 서울의 봄에 대한 좌절이라는 것을 봐야한다. 80년대에 운동이 새로 복원되는 과정은 그 이전 운동이 부족했던데 대한 매우 신랄하고 엄격한 반성을 거치는 것이었다. 명망가운동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불만이 있었고 야당에 대한 불신도 꽤 많았다. 한번 피비린내를 맡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개신교 내부에서는 연대하기는 하되 무엇을 중심으로 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할 때는 정치인과 같이 할 거냐 말거냐, 이 부분에서 개신교는 생각이 달랐다. 개신교로서는 정치인과 한 틀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정치권과는 필요할 때 언제고 연대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에 반해서 그 당시 민통련은 초반부터 정치인과 함께 해야 대중적 투쟁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6.26평화대행진에 대해서도 문동환 목사, 이우정 선생 등 개신교 어른들만 반대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당시 YS는 바로 6.26평화대행진을 발표하면 독재정권에 강경진압의 명분만 줄 수 있으니, 당장의 파국을 막고 정치협상을 통해 풀어보자는 입장이었고, 영수회담을 제안하면서 평화대행진 계획발표를 미루려고 했다. 그리고 국본 공동대표인 이돈명, 한승헌 변호사 등 가톨릭계나 법조계 어르신들을 만나 자칫하면 군인들이 나올지 모르니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득하며 동의를 구했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세대 간의 인식차이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당시 어르신들이 신중론에 기운 반면, 성유보, 김용태, 박용일, 정상모, 이미경, 유시춘, 인재근 등 젊은 층은 투쟁으로 정권을 더 압박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대 간의 판단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이지 부문 간의 문제였는가 하는 점에는 의문이 있다.


✽ 평화대행진 홍보전의 일환으로 벽에 군부독재 타도 글을 적는 시위대

이명준 6월항쟁의 전사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전사만 이야기하기도 짧은 시간이라 아쉽다. 6월항쟁에 있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의 리얼한 이야기를 제대로 다룬 자료가 거의 없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올해 30주년 사업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반갑다. 나도 인터뷰이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6월항쟁의 전사가 없으면 6월항쟁의 아름다운 추억만 자꾸 나오게 된다. 이면에 얽힌 이야기도 다 드러내야 한다. 오늘 그런 이야기 중 일부라도 풀어낼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들
황인성 5월 27일 국본의 결성식을 했고, 이 자리에서 ‘4·13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쟁취 선언’을 발표했다. 그저 형식적인 행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결성식을 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각 부문이나 조직의 대의원 숫자를 배정하고, 조직마다 논의를 해서 대의원 명단을 통보해 주면 이를 받아 조직을 구성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공식화하는 행사였다. 이때 문건을 쓰고 집회 계획을 짜고 사람을 동원하는 실무를 우리들이 했다.


✽ 위_ 서울 도심 일대를 가득 메운 6.26 평화대행진 참가자들과 대치 경찰들


✽ 아래_ 서울대 6.26 평화대행진 출정식에서 선보인 이애주 교수의 바람맞이 춤

국본 결성식 직전 이틀 동안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을 두 번이나 거쳤다. 결성식을 앞두고 성유보 선배와 내가 서로 모아온 명단을 들고 만나기로 했는데 선배가 반쯤 젖은 명단을 들고 나타났다. 당시 풍납 지역에 엄청난 수재가 있었는데 수해 때문에 버스도 끊겨서 선배가 명단을 주머니에 넣고 겨우 다리를 건너서 왔다는 것이다. 그 명단을 다 말려서 옮겨 적었다.

평창동에 있던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에서 성명서와 ‘국민에게 드리는 글’ 등 회의자료를 만들었다. 거기 있는 직원들 모두 하루 반나절을 그 일만 했다. 결성대회 자료를 쇼핑백 두 개에 나눠 담아 그곳에 살던 내 이종사촌 여동생으로 하여금 다음날 아침 8시 반에 종로2가 YMCA 회관 앞으로 가져와 달라고 부탁을 하고 성유보 선배와 함께 연구원을 나오는데, 그 지역 정보과 형사가 우리를 보았다. 태연한 척하며 택시를 타고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다음날인 국본 결성식 날 아침 이종사존 동생이 회의자료를 들고 기사연을 나서서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오는 데 기동대 버스가 기사연으로 올라오더라는 것이다. 같은 시간에 서대문에 있던 기장 선교교육원도 덮쳤던 것이다. 만약 그 자료들을 사전에 빼앗겼으면 결성식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명동성당의 추억
황인성 6월 10일 국민대회 이후 성공회 성당의 국본 어른들은 잡혀갔고, 우리 4명의 연락책은 밖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었던 중에 전혀 예상치 않게 명동성당 점거 농성 사건이 터졌다. 당시 기독교회관 3백 몇호실에 국본 사무실이 있었는데, 다음날 저녁 늦게 잠깐 사무실에 들렀을 때 명동성당에서 온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화염병 만들 휘발유가 다 떨어졌으니 빨리 휘발유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국본은 비폭력 평화시위를 강조하고 있던 판인데…. 국본은 비폭력평화시위를 해서 6.10국민대회가 생각보다 큰 성과를 거뒀는데, 학생들이 화염병을 만들어야 한다고 전화를 한 거다. 도청되고 있는 게 너무나도 뻔한데 말이다. 그래서 “국민운동본부의 기본 입장은 비폭력입니다” 하고 뚝 끊어버렸다.(일동 웃음)


✽ 명동성당 앞에서 춤사위를 벌이며 시위를 진행 중인 학생들의 모습 / ✽ 명동성당 앞에 바리케이드를 친 채 지속적으로 농성하는 시위대

이명준 당시에 신부님들 승용차에서 휘발유를 다 뽑아가서 신부님들이 화내셨던 기억이 난다. 나도 어느날 밤 명청(명동성당청년연합회) 대표와 함께 점거 농성중이던 학생 대표를 만나 “여기 추기경님과 신부님이 버티고 있어서 경찰이 안 들어오는 데 화염병을 왜 만드느냐. 근처에 제2금융권도 있고 신자도 많아 농성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이 언덕에서 경찰하고 붙어서 화염병 던지고 최루탄 쏘면 아무도 안 들어오려고 할 것이다. 이건 운동을 망치는 것이다. 평화노선이라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중들이 들어오도록 통로를 열어야 한다.”고 설득했던 기억이 있다.

6월항쟁 이후에 대한 반성
이명준 6월항쟁 때 6.29선언을 성취했지만 양 김이 대선 레이스로 뛰어들며 정치를 시작하니 국본이 와장창 무너졌고, 개헌도 정치권이 주도하였다. 민통련과 운동권이 양 김에게 단일화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는데 안 했다. 수십 년 동안 쌓여온 양 김의 주도권 경쟁과 대중의 직선제에 대한 열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결과였다. 88년 DJ의 평민당이 1당이 되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지만, 3당 합당으로 다시 거대여당이 탄생했다. 그 기울어진 운동장이 박근혜 정부 때까지 온 거다. 이번 촛불집회에도 큰 교훈을 주는 대목이다. 촛불의 1단계인 탄핵은 성공했지만, 다음 스텝은 물음표다. 정권교체와 개헌 등의 숙제가 남아있다.

황인성 양 김이 당시에는 염려 말아라, 실망시키지 않겠다, 단일화하겠다 철석같이 약속을 했었다. 그러고는 슬슬 말이 달라졌다. 나중에 둘 다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운동권에서는 오죽하면 ‘가둬놓고 담판 짓고 나올 때까지 풀어 주지 말자’고까지 했다. 근데 그게 그렇게 되나. 두 사람 중 더 괜찮은 사람을 우리가 뽑자, 그러고 한 사람을 세우고 한 사람을 죽이자, 그게 민통련의 당시 생각이었다. 민통련의 생각에 국민들이 다 따라주면 다행인데, 저쪽의 양 김을 추종하는 세력이나 국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YS나 DJ를 미는 지역적 세력에 비하면 운동권이 가지는 대중적 호소력이 미미했다. 오히려 저쪽에 끼치는 영향보다 우리 내부를 분열시키는 효과가 더 컸다. 뼈아픈 반성 지점이다.

6월항쟁과 촛불혁명
이명준 촛불항쟁으로 6월항쟁이 업그레이드 완료됐다. 특히 이번 촛불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시위를 끈질기게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6월항쟁 이후 양 김이 정치로 나서면서 국면이 전환되고, 그 바람에 헌법 개정에 있어서도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에 누가 정권을 잡든 개헌 국면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다.

황인성 6월항쟁과 촛불항쟁은 모두 주권재민의 대원칙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국민·시민 대중의 능동적인 참여와 공동행동만이 역사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동력이라는 보편적인 명제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가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했다. 항쟁과 혁명은 언제든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려고 하면 잘 기억하기 위한 기념사업과 현재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촛불의 교훈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상
황인성 6월항쟁 당시의 국본 결성 과정과 이번 촛불비상국민행동 결성 과정을 대비시켜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6월항쟁 때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없어 기습작전을 했다. 호헌철폐라는 공동목표가 있었지만, 그렇게 단번에 이뤄질 거라고는 꿈도 못 꿨다. 6월항쟁 때는 주요 인사들이 다 감옥에 들어가고, 다음에 더 추슬러서 운동을 하면 ‘그해 하반기 정도 되어야 결과가 나오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폭발적 분노와 호응으로 인해 한 달 반 만에 저쪽의 양보를 받아낸 것이다. 전망하지 못한 사태 전개 때문에 사태 주도력이 정치권으로 가버렸다. 이번에는 6월항쟁의 결과로 인해 자유로운 시민적 공간이 열려 있는 상태에서 촛불을 치렀다. 수위는 낮았고 서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가지고 있다. ‘이게 나라냐’ 라는 분노에서부터 출발해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의 지향을 각계각층에서 나름대로 준비해 나갈 수 있다. 대통령만 바꾼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훨씬 더 전망을 갖는 변혁과정을 내장하고 있다.


✽ 2017년 1월 촛불집회 현장에서 벌어진 빛의 퍼레이드

6월항쟁과 이번 촛불의 기본 정신은 같다. 국민이 권력의 주체라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얼마나 실질화하느냐다. 이번에 집회의 조직 과정을 보니 가족 단위 등 다양한 층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고 상호 소통하고 공감이 이뤄지도록 해 나가더라. 6월항쟁 때보다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민주적으로 더 잘 훈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더 충실한 민주화 과정을 밟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 촛불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서로의 초에 불을 나누는 모습

이명준 대선이라는 과제를 넘으면 전 산업적 구조조정, 남·북의 분단에 따른 ‘안보 위기’라는 진짜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고 삼성 등 기업들은 그 핑계로 일자리 정리 등을 하려고 할 것이다. 새 정부가 경제를 살리지 못하고 트럼프 정권하의 미국과의 외교에서도 문제가 생기고 하면, 또 탄핵 카드가 나올지 모른다. 한 번 탄핵을 해봤으니 두 번도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촛불이 엄청난 성과를 거뒀지만 국민의 경제적 이해가 아주 세분화되어 있어서 그러한 다양한 이해를 충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싸움은 언제나 51대 49의 싸움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공화국’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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