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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현재 상황에 대한 단상

베네수엘라 현재 상황에 대한 단상

글. 임승수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작가) reltih@naver.com

지금부터 100년쯤 전에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미국의 석유자본은 냉큼 베네수엘라로 진출해 파이프를 꽂아 베네수엘라 석유에서 나오는 부의 상당부분을 가져갔다. 자국의 석유를 미국에 팔아넘기고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챙겨 기득권을 유지하는 매국노들이 베네수엘라의 지도층을 형성했으며 정치권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는 이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 양당이 번갈아가며 집권하는 체제였다. 때문에, 산유국임에도 국민의 대다수가 빈곤계층을 형성할 정도로 사회적 모순이 심한 나라였다.

이 모순이 한꺼번에 터진 사건이 1989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항쟁, 이른바 카라카소 사건이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인한 외환 부족으로 IMF의 긴급차관을 받아들였는데, IMF가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베네수엘라에 강요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정말 가혹한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의 IMF 시절보다 훨씬 심각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민중들이 봉기했고 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

차베스의 쿠데타 실패와 재기
1992년 당시 군인이었던 우고 차베스는 뜻 있는 동지들을 모아 국민을 학살해 민심을 잃은 정부를 전복하고자 쿠데타를 시도했다. 쿠데타는 실패하고 차베스를 포함한 핵심 군인들은 감옥에 갔지만 국민 대다수가 쿠데타를 지지하는 분위기였으며 우고 차베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민심을 잃은 대통령은 의회에서 탄핵되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미 기존의 보수 양당은 신뢰를 잃었고, 보수 양당에서 탈당한 낡은 기회주의 정치인들은 당시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우고 차베스가 감옥에서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저마다 주장하며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처럼 유세를 했다. 그 기회주의 정치인 중에서 라파엘 칼데라가 당선되어 쿠데타를 시도한 우고 차베스와 군인들을 사면했다.

감옥에서 나온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바꾸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좌파 세력의 총단결을 이끌어내어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된다. 이때 차베스가 내세운 대통령 선거 공약이 ‘제헌의회 소집’이었고 지금 마두로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제헌의회 소집’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차베스가 당선된 당시의 베네수엘라는 의회를 보수세력이 이미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차베스 정부의 개혁조치가 제대로 실행될 가능성은 무척 낮았다. 바로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내세운 공약이 ‘제헌의회 소집’이었다.제헌의회는 말 그대로 헌법을 제정하는 의회다. 헌법을 새로 제정한다는 것은 기존의 헌법을 폐기한다는 의미다. 기존의 헌법이 폐기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존의 국가기구가 모조리 해체된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는 모두 헌법에 근거해서 존재의미를 갖는데, 헌법이 폐기되니 존재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낡은 헌법이 폐기되면 기존의 국회의원들은 더 이상 국회의원이 아니게 되고, 기존의 판사 검사도 더 이상 판사 검사가 아니며, 차베스 역시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그 새로운 헌법에 근거해서 새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제헌의회 소집과 좌파 집권
차베스는 1999년에 취임해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들에게 제헌의회 구성을 승인 받고, 제헌의회를 구성할 의원을 뽑기 위한 전국적인 선거를 치른다. 차베스가 압도적인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이다 보니 제헌의회 선거 역시 좌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좌파적 사상을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헌법을 만든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헌법에 명시하고 베네수엘라의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기 위한 근거 조항을 만든다. 350개 조항에 이르는 베네수엘라의 헌법에는 좌파들이 만들고 싶은 진보적인 국가의 상이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

새로운 헌법이 국민투표를 통해 발효되고, 이 새로운 헌법에 근거해서 대통령 선거도 다시 치르고 국회의원도 새로 뽑게 되었다. 이 선거를 통해 차베스는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고, 베네수엘라의 의회는 좌파가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게 됐다. 베네수엘라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좌파 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된 계기가 바로 제헌의회다. 하지만 정치권력은 절반의 권력일 뿐이다. 진짜 권력은 먹고 사는 것을 통제하는 경제권력이다. 베네수엘라 경제권력의 핵심인 석유는 사실상 미국이 배후조종하는 베네수엘라 기득권 세력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그 중심은 바로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였다.

이 국영석유회사는 당시 사실상 기득권 세력의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역할만 하는 무늬만 국영인 회사였는데, 차베스는 이곳의 부패한 임원들을 전부 해임하는 조치를 취했다.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2002년에 차베스 정부를 축출하려는 보수군인들의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차베스를 싫어하는 미국의 원조하에 일어난 쿠데타는 실패했고, 같은 해에 석유산업을 마비시켜서 차베스 정부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자본 총파업’이 벌어지지만 그것마저 차베스 정부의 현명한 대응으로 무산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고 있는 경찰의 모습(위), 제헌의회 출범을 축하하는 베네수엘라 친정부 지지자들의 집회(아래) ©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사회주의의 성공
쿠데타와 석유산업 부문의 ‘자본 총파업’을 이겨낸 차베스 정부는 석유산업을 제대로 국유화시키면서 그것을 재원으로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의 복지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대기업을 국유화하며, 협동조합적 기업들을 지원하는 등 시장경제의 틀을 넘어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베네수엘라의 빈곤층이 격감하고 심지어 우파들조차 차베스 정부의 복지정책을 칭찬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차베스는 2006년에 압도적인 표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21세기 사회주의’를 베네수엘라에 구현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차베스는 ‘21세기 사회주의’가 베네수엘라만의 힘으로는 추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차베스는 미국의 개입을 뚫고 베네수엘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남미의 국가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의 주도로 중남미 좌파 정권들의 연합체가 만들어지고, 또한 중남미 국가연합이 탄생했다. 한편 미국은 이런 차베스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수엘라 보수세력과 미국의 총공세
2013년에 차베스가 돌연 암으로 사망하고, 이를 틈타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보수세력은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지도자가 사망한 틈을 타 베네수엘라의 보수세력들은 경제영역에서 자신들이 여전히 갖고 있는 영향력을 이용해 사실상 ‘자본 파업’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유통 영역을 교란시키거나 생산에서 사보타지를 하는 등의 방식이었다. 게다가 예상치 않게 석유가격은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폭락했다.

차베스가 석유만 믿고 설치다가 망했다는 식의 비난이 많은데, 정말 상황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역대 정부 중에서 차베스 정부 때 최초로 비석유부문의 세금 수입이 50%를 넘은 것이었다. 그만큼 차베스 정부는 이전 정부에 비해 석유 외 산업 부문을 성장시켰다. 하지만 한때 배럴당 100달러를 넘던 유가가 이 정도로 하락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제재를 강화하며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다. 마두로 정부는 차베스가 시작한 ‘21세기 사회주의’ 혁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미국과 국내 기득권 세력의 공세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신을 통해 마두로와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접할 기회가 없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외신은 모두 그 소스가 미국 언론이기 때문이다.

미국발 외신에 놀아나며 베네수엘라 기득권 세력의 사보타지를 민주주의 진영의 투쟁으로 오인해 마두로 정부를 비난하는 분위기는 옳지 않다. 주류와 지배계급의 시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미국발 외신을 맹신하여베네수엘라 기득권 세력의 사보타지를민주주의 진영의투쟁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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