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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 김득중의 필생(必生)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 김득중의 필생(必生)

이시영 시 <봄> <그네> <나무> <첫 아침>

글 최규화 (기자)​/ realdemo@hanmail.net

오래도 기다렸다. 주말부터 낮 기온이 10도 이상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손에 꼽을 만큼 참 혹독하게도 추웠던 지난겨울. 제아무리 매서운 계절도 자연의 시간표를 거스를 수는 없는지, 그예 봄이 오긴 올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곳곳에서 주꾸미니 대게니 상춘객들 발걸음을 붙잡는 먹거리 축제는 이미 시작됐다.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봄꽃축제도 여기저기서 막을 올릴 준비에 한창이겠다.

그러나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에, 전국에는 뜻밖에 큰 눈이 내렸다. 봄소식에 살짝 들떠버린 마음 때문인가. 춘분에 내린 폭설이 퍽 당황스럽다. 눈과 함께 온 꽃샘추위에, 지난주 옷장에 넣어둔 겨울 외투를 다시 꺼내 입었다. 3월도 벌써 하순에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봄은 멀었나. 봄은 봄이되 아직 봄이라 부르긴 섣부른 날, 이시영 시인의 시집 <하동>(창비, 2017년)을 읽었다.

보도블록과 보도블록 사이에서
민들레 한송이가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너 잘못 나왔구나
여기는 아직 봄이 아니란다 

시집의 13쪽에서 찾은 시다. 겨울은 겨울이라 춥다. 그나마 모두가 함께 춥다. 그러나 이런 때가 문제다. 봄은 봄이되 아직 봄이라 부르긴 섣부른 때. 여기저기서 이젠 봄인가 하고 들뜨기 시작하는 때, 저 혼자 아직도 시린 겨울 위에 서 있는 꽃들은 아마도 겨울보다 더 발이 시릴 거다.

봄은 평등하게 오지 않는다. 고개를 잘못 내민 민들레가 어디 있나 했더니, 저기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 있었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이 네 번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그곳 말이다.

2012년 새누리당 당사에서 4일, 2013년 대한문에서 21일, 2015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에서 45일 동안 김득중 지부장은 단식을 했다. 세 번째 단식을 한 그해 12월 회사는 2017년까지 해고자 복직을 약속했다.

해고자 167명 중 37명이 순차적으로 복직. 하지만 남은 130명의 복직은 미뤄지고만 있다.

2017년 12월에는 김득중 지부장을 비롯한 세 명의 조합원들이 쌍용자동차의 대주주인 마힌드라가 있는 인도로 원정투쟁을 떠났다. 해를 넘겨가며 53일간 투쟁을 벌인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를 약속받았지만 그것도 보람이 없었다. 결국 김득중 지부장은 네 번째 단식을 시작했다. 3월 21일 오늘까지 22일째다.

그네

아파트의 낡은 계단과 계단 사이에 쳐진 거미줄 하나
외진 곳에서도 이어지는 누군가의 필생 

‘아직도 쌍용자동차가 투쟁을 하고 있어?’ 누군가는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09년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 이후 만 9년. 햇수로 10년째다. 2015년 12월의 복직 합의로,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던 투쟁. 순서를 기다려 공장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거라고 관심 밖으로 돌려세운 기억들.

2월 28일 시작한 김득중 지부장의 단식농성도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국가적인 ‘빅뉴스’도 워낙 많기도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분 남북 간 화해의 바람을 타고 남북·북미 정상회담 소식이 이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미투’ 운동. 현직 도지사의 충격적인 성추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고, 부끄러움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도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대형 비리 사건 수사와 검찰 소환에, 개헌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극한 갈등 등 초대형 이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0년 전의 그 노동자들이 아직도 그때처럼 싸우고 있습니다’라는 심심한(?) 뉴스는 들어갈 틈이 없었다.

시집의 39쪽에 찾은 ‘그네’. 기억의 바깥에서 낡아간 “계단과 계단 사이에”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필생”이 이어지고 있었다. “외진 곳”에서 “거미줄 하나”로 “이어지는” 불안한 삶. 하지만 나는 의심하고, 또 기대한다. 시의 ‘필생’은 생명의 마지막이라는 ‘畢生’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남는다는 ‘必生’이 아닐까.

나무

강변에 나무 두그루가 서 있다
한그루는 스러질 듯 옆 나무를 부둥켜안았고
다른 한그루는 허공을 향해 굳센 가지를 뻗었다
그 위에 까치집 두채가 소슬히 얹혔다
강변에 나무 두그루가 서 있다 

시집의 11쪽에 실린 시 ‘나무’. 결국 믿을 것은 사람뿐이다. 단결뿐이고, 연대뿐이다. 김득중 지부장의 단식농성이 보름에 가까워지던 3월 13일. 해고자 16명은 회사로부터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복직을 위한 면접을 보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지지부진하긴 해도 해고자 복직을 위한 노사 간 대화가 오고가던 때. 회사는 노조와 아무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개인들에게 복직 면접 제안을 한 것이다.

복직 면접 문자메시지를 받은 사람 중에는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인 칠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항구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도 있었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를 받은 16명 중 15명이 복직 면접을 거부했다. 지난 10년 동안 그들이 함께 외친 “함께 살자”는 구호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해고자를 기만하는 ‘들러리 복직’ 거부한다”고 외쳤다. “끝까지 함께 살겠다”고 외쳤다.

그들은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섰다. 오른손을 들어 구호를 외쳤다. “한그루는 스러질 듯 옆 나무를 부둥켜안았고/ 다른 한그루는 허공을 향해 굳센 가지를 뻗었다”는 시의 구절이 겹쳐 보였다.

3월 18일에는 ‘해고자의 워낭소리’ 행진이 열렸다. 해고자들은 무쏘, 코란도, 티볼리, 렉스턴 등 제 손으로 만들던 쌍용자동차 차량 열 대를 밧줄에 연결해 직접 끌었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상징하는 열 대의 차량은, 역시나 지난 10년의 시간을 상징하는 열 개의 문을 지났다. 행진에는 해고자와 시민 150여 명이 참가했다. 차량은 해고자들이 끌고, 운전석에는 “스러질 듯 옆 나무를 부둥켜안”으러 온 시민들이 앉았다.

군산 GM 공장 철수를 두고도, 광주 금호타이어 해외매각을 두고도 노조를 탓하는 소리가 들린다. 10년 전 평택 쌍용자동차에서도 나왔던 ‘귀족노조’, ‘강성노조’ 같은 말들이 지겹도록 반복된다. 서로가 서로의 과거와 미래로 얽히고설켜 있다. 시집의 100쪽에서 찾은 시 한 편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으로 보내고 싶다. 쌍용자동차의 과거이거나, 혹은 부인하고 싶은 미래일 수도 있는 그 어느 곳들에도.

첫 아침

주차장 공터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 위에 까치 동무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혀 있다
나는 저 두줄의 시린 발자국이 지상의 끝까지 펼쳐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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