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곳에서 만난 친일조각가 김경승의 흔적
의외의 곳에서 만난 친일조각가 김경승의 흔적
서울 이화장과 국립4.19민주묘지를 찾아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얼마 전 주말이건 평일이건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대학로를 찾았다. 공연을 보러 나온 이들이나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는데, 인파를 헤치고 동남쪽으로 조금 걸으니 이내 한적한 동네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넓은 안뜰을 갖고 있는 한 한옥이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이다.
미국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다 해방 한국의 초대 대통령에 오른 이승만…. 계엄령을 선포해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감금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사사오입’ 즉 변칙적인 반올림과 부정선거를 통해 제3대 나아가 제4대 대통령에까지 오르기도 했던 이승만….
그러나 그런 절대 권력자도 결국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치고 만다. 1960년 대구2.28학생운동으로 촉발된 반정부시위가 4.19민주혁명으로 이어졌고, 이승만은 결국 하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나먼 하와이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승에서의 삶이 끝난 뒤에야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기거했던 집이자 4.19민주혁명으로 하야한 뒤부터 하와이로 떠나기 전까지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이화장이다.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화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정면 가파른 비탈 위로 작은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국무총리와 각 부서의 장관 등 초대 내각을 구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건물로, 내각을 짠 곳이라고 해서 ‘조각당(組閣堂)’이라 불린다. ‘ㄷ’자로 생긴 본관에 들어서면 해외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사진과 친필서신 등이 진열되어 있고 1904년 옥중에서 쓴 국민계몽서 ‘독립정신’도 볼 수 있다.
작은 돌계단 너머에 있는 디귿자의 본채에는 이승만의 친필 문서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옷을 비롯한 살림살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 보이기만 한다. 아무리 그가 살았던 곳이라 해도 역사적 인물, 그리고 그 시대의 공과 과를 공히 살펴봄으로써 시대를 읽고, 나아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도록 하는 맥락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서다. 오로지 그에 대한 헌사품 같은 느낌이 전해져올 뿐이다.
심지어 마당에 있는 동상은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한다. 198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세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인데, 공교롭게도 친일부역혐의자 김경승의 작품이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후원한 ‘결전(決戰) 미술전람회’. 김경승은 이 대표적 친일미술전 심사위원을 맡았고, <대동아 건설의 소리>라는 다분히 일제 찬양적 작품을 제출하기도 했다. 또 친형 김인승과 함께 ‘조선미술가협회’라는 대표적 친일미술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전시회로 벌어들인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는 등 일제 협력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해방의 그날까지 진정한 친일미술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인물이 만든 이승만 동상…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로서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기도 한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국립4.19민주묘지를 거닐다 보면 의아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묘지 한복판에 서있는 기념탑을 만든 이 역시 미술계의 대표적인 친일부역혐의자로 꼽히는 김경승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위해 식량증산에 힘쓰자’는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을 비롯해 조선인의 전쟁 협력을 다룬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냈던 김경승의 작품이 비단 국립4.19민주묘지 기념탑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울 남산에 있는 백범 김구 동상과 종로 탑골공원의 월남 이상재 동상, 신사동 도산공원의 안창호 동상과 같은 민족해방운동가들의 동상도 모두 김경승의 작품이고, 전북 정읍의 황토현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처럼 외세에 저항했던 이들의 동상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해방 뒤 독립운동가들의 동상 제작사업에까지 앞장섰던 것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에는 물론 해방 뒤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간 것이 그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성수나 김활란 등 해방 뒤 사학재단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해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동상을 제작한 것도 바로 김경승이었다는 데에, 그리고 독재정권이 몰락한 뒤에는 그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이들을 기념하는 기념탑을 제작했다는 데에 답이 있다. 그는 시대적 아픔을 함께 하는 예술가라기보다는 힘과 돈을 좇는 이기적 기능인에 가까웠다.
그와 같이 친일반민족행위에 열심이었던 이가 해방 뒤 사과는커녕 일언반구의 해명도 없이 한국 예술계의 원로임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해방 뒤 미군정 때에 대부분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사실상 복권되었으며 이어 들어선 독재정권기에는 실질적인 힘을 되찾았다.
4.19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기나긴 시간에 비례해 4.19를 역사 속의 한 사건이라 치부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4.19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동학혁명을 시작으로 3.1만세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으로, 그리고 해방 뒤 87년 6.10민주항쟁을 비롯하여 최근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의 전환점과도 같은 대사건이 4.19민주혁명이었다.
그런 면에서 국립4.19민주묘지를 돌아보며 알게 되는 것은 단순히 4.19혁명의 기억만이 아니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해온 영욕의 한국 현대사가 국립4.19민주묘지에 녹아 있다. 이제 두어 달 뒤면 4.19가 있은 지 58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