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통일의 집을 가다.
문익환 통일의 집을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지난 6월 1일, 늦봄 문익환 목사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통일의 집’이 새로 개관하였다. 24년 전 세상을 떠날 때 살 던 자택을 개조한 ‘통일의 집’ 은 이전에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었지만 박물관 형식으로 개조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새롭게 리모델링 한 것이다. 필자도 5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사진과 포스터, 저서, 초상화, 시를 써넣은 액자 등 전시물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하고 지도와 연표를 제작해 붙여 놓아 훨씬 보기 편해졌다는 느낌이다.
물론 가정집을 개조한 공간이라 일반 박물관이나 기념관과는 달리 소박하고 잔잔한 기운이 감돌아 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든다. 만들어진지 반세기가 지난 피아노도 5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물건이고, 처음 보는 사진들도 눈길을 끈다. 문 목사의 생전 영상도 볼 수 있다. ‘통일의 집’ 의 뒷 벽에는 문 목사의 초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고, 뒷동산 잔디밭에 앉아 감상할 수 있다. 6월 1일 개관식이 이곳에서 열렸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했는데, 박 시장은 한 때 문 목사의 변호사로 활동한 바 있었다. 5년 전에는 공사 중이던 우이-신설 경전철이 개통되어 훨씬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달라진 부분이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공간은 아니라고 한다.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만주 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간도는 일제의 억압을 피해 두만강을 넘은 한국인들의 해방구이자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활동 무대였다. 안중근 의사는 명동촌 문 씨 집 사랑방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했고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김약연은 그 마을의 지도자였다. 김재준 목사는 학창시절 은사였으며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는 명동학교 선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와 끊을 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인 윤동주는 1917년의 끝자락인 12월 30일에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918년 8월 27일에 장준하가 태어났다. 장준하의 고향은 우리 땅인 평북 의주였지만 바로 만주 땅과 마주보는 위치였다.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던 정일권은 윤동주보다 한 달 전인 1917년 11월 21일, 간도와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문익환은 고향친구 윤동주와 장준하와 평양 숭실학교를 같이 다녔고,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문을 닫자 간도의 광명중학으로 옮겼는데, 이 때 정일권을 만난다. 정일권은 이승만과 박정희 밑에서 육군 참모총장, 국회의장, 국무총리, 주미대사, 외무장관 등 말 그대로 대통령을 뺀 모든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다. 심지어 늘그막에는 자유총연맹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그가 일본군 장교를 하고 있는 동안, 장준하는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중국대륙을 걸어서 횡단하고 있었고, 윤동주는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문익환은 1945년 소련군이 진주하자 걸어서 만주와 북한을 지나 서울로 이주했고, 신학교를 다니다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를 했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고급 인력을 전장으로 보낼 수 없었다. 그는 통역 장교로서 도쿄 맥아더 사령부와 판문점에서 일했다. 아마도 그가 목사의 길을 가지 않고 관계로 진출했다면 장관이나 국회의원 자리는 쉽게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길을 가지 않았다. 최근에 김삼웅 선생이 <헛되이 백 년 사는 사람 되지 않으리>라는 책을 내놓았는데, 원효대사, 김시습, 이지함, 이회영, 김홍섭, 함석헌 같은 인물을 다루었는데, 문익환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충분히 입신양명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재야의 길을 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체제보다 반체제, 정통보다 이단, 합리보다 파격, 안일보다 고뇌, 안주보다 방랑, 관습보다 탈속이 주특기다. 신념을 위해 제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권력의 유혹에는 허유(許由)나 소부(巢父)처럼 귀를 씻으며, 결단코 재물이나 체면에 급급하지 않는다. 고루한 인습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예속의 끈을 잘라버리며 정해진 틀이나 규격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획일주의를 거부한다. 거부할 뿐만 아니라 틀을 바꾸고자 한다.
이들은 유별난 꿈과 정열의 소유자이고 출중한 능력을 가진 자이며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낭만과 정서를 간직한 사람이다. 세속의 금줄(禁制)을 벗어던진 탈선자이고, 고린내 나는 상투 속의 권위에 단발령을 내리는 자이고, 사대주의적 학문에 찌든 먹통들을 깨부수는 의병이고, 곡필과 궤변으로 이름을 날리는 논객을 무찌르는 촌철(寸鐵)의 게릴라 대장이다.
이런 기질의 그는 휴전 협정 후 그는 어울리지 않은 군복을 벗고 1955년부터 한신대 교수와 한빛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68년 이후 신구교가 함께 한 공동번역 성서 책임위원으로 이 대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주로 구약 그중에서도 시와 예언서 부분을 맡았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 각성한 그는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계기로 58세였던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며 반독재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이 때 일생의 동지였던 김대중과 인연을 맺는다. 이 때 그는 거의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였는데, 이후 199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 동안 6차례 투옥되며 11년 3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아들 문성근 씨는 이런 ‘늦바람’에 대해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아버님이 성서번역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예언서였습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이 뭡니까? 더러운 세상을 향해 옳은 말을 하는 것이고, 결국 박해를 받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거지요. 성서 번역을 마치고 해야 할 일은 ‘그것’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영화 <1987>에서 나오는 그 연설 아닌 연설, 이한열 열사 장례식의 그 절규로 6월 항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는 민주화운동에 헌신 했을 뿐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며 다양한 방안을 찾았다. 그는 1989년 3월에 통일의 길을 열자는 목표 하에 북한을 방문한다. 그는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고, 그의 활동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헛된 꿈이라는 이유로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남북 사이의 벽을 조금이나마 깨뜨렸기 때문에, 현재의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새로운 희망의 기류가 흐르면서 문익환 목사는 재조명되기 충분한 인물이다. 그는 지금의 통일의 집에서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같은 날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고향 친구이자 중학교 동창’ 정일권도 세상을 떠났다.
언론은 두 인물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장례식도 아주 대조적 이었는데, 아주 유명인사 였음에도 두 장례식의 조문객은 거의 겹치지 않았다고 한다. 문 목사의 영결식은 한신대에서 시작해, 대학로,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노제로 치러졌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지금 윤동주, 장준하, 문익환에 대한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그들의 인생을 다룬 책들은 쏟아지고 있다. 이에 비해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정일권은 소위 산업화 세력에게 조차 잊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를 기린다는 책을 1996년 정일권 기념사업회라는 조직에서 내놓았지만 그 후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역사는 일신의 영달을 원한 자에게 그것을 주고, 예언자적 삶을 사는 자에게는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자리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