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관과 경복궁 : 우리의 할퀴어진 역사
환구관과 경복궁 : 우리의 할퀴어진 역사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환구관과 경복궁이 감내해온 수난의 세월
지난 2009년 11월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한 지 144년 만에 새 광화문 상량식이 열렸다. 조선 태조 4년에 경복궁 정문으로 들어선 광화문은 줄곧 서울의 역사적 중심지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새로 지으면서 경복궁의 동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소실되는 운명을 맞이하기에 이르는데, 그 광화문이 철근 콘크리트 시절을 거쳐 다시 고종 당시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되기에 이른 것이다.
역시 고종 때 세운 환구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제에 의해 황궁우 등 극히 일부 건물만 남긴 채 사라진 환구단은 정문도 없이 오랜 기간을 한 호텔의 조경시설인양 버텨와야만 했다.
서울에 남아있거나 복원된 5개의 궁궐과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 그리고 종묘와 사직 등을 두고 봉건왕조의 잔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반면 장구한 역사를 갖는 나라의 위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형태나 의미가 타자의 불순한 의도와 폭력적인 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때 고민의 종류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황궁우와 그 앞의 삼문, 그리고 석고와 돌난간이 남아 있는 것의 전부이지만, 1897년 완공된 환구단의 원래 영역은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과 롯데호텔, 프레지던트호텔 터를 아우를 정도로 광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강의 각축 속에 왕실의 존속과 나라의 안녕을 고민하던 고종은 환구단을 세워 황제를 칭함으로써 역사적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한다. 고종은 이곳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민심을 앙양하기 위해서였는지 미뤄두었던 명성황후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국장으로 치렀다.
그러나 환구단의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현재의 롯데백화점 본점 뒤편 주차장 자리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석고각은 해체되어 남산 북동쪽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로 옮겨져 종루로 이용됐고, 석고각의 정문 광선문 역시 남산 북쪽 기슭의 동본원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1932년 건립된 사찰이며, 동본원사는 1929년 정동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최초의 ‘제야의 종’ 행사를 열 때 범종을 제공한 사찰이다.
파괴된 환구단 터에 들어선 것은 조선총독부립경성도서관, 이른바 총독부도서관과 조선경성철도호텔이었다. 특히 조선경성철도호텔은 2만2천여 평방미터의 대지 위에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의 설계로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들어섰는데 석재와 벽돌만 빼고 모두 외국산으로 지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위상을 뽐내기 위한 건물이었다. 황제국과 천황국 사이에 끼어 있다 비로소 황제국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으로 뒤덮여 버린 것이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지 않은 건물이라고 해서 비극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재실 건물은 1960년대 말까지 ‘아리랑하우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귀빈 음식점으로 이용됐고, 환구단의 정문은 군사정권 시절 우이동의 옛 그린파크호텔로 옮겨져 ‘백운문’이라는 편액을 걸고 호텔의 정문으로, 이어서 시내버스 차고지의 정문으로 이용됐다. 호텔 내에 인수각이라는 이름을 달고 음식점으로 사용되던 건물 역시 환구단 정문과 비슷한 시기에 옮겨온 점이나 당시 직원들의 증언, 단청 흔적과 대들보 규모 등으로 볼 때 재실 및 그 부속건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경복궁 파괴와 함께 진행된 박람회
비단 환구단의 모습만 뒤틀린 것이 아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사업이 시작된 1918년이 아니었다. 그보다 3년 앞선 1915년 9월 11일부터 다음 달 말일까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그 개막은 경복궁 파괴와 궤를 같이 했다.
이미 1862년 런던세계박람회 때부터 참관을 시작한 일본은 11년 뒤 비엔나를 시작으로 직접 세계박람회에 참가하는데, 77년부터는 일본 국내에서도 내국권업박람회 등을 개최하기 시작했고 1907년 들어서는 조선에서도 박람회를 연다.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 사다키치를 회장으로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장장 75일 동안 을지로 일대에서 계속된 경성박람회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이다. 문제는 1915년에 들어서면서 박람회 장소가 오랜 기간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해온 경복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경복궁을 무대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조선 통치를 시작한 지 5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식민통치의 치적을 선전하고 일본 상공업인에게 조선의 사정을 쉽게 파악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테면 경성박람회 때는 주로 일본 상품의 선전에 목적을 두었다면, 조선물산공진회는 위생이나 공업, 수산, 임업, 광업, 임시은사금사업 등 일제식민통치와 관련한 산업이나 행정 부분의 치적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1923년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 때나 식민통치 20주년 즈음인 1929년 역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도는 ‘조선왕조의 흔적 지우기’라는 면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박람회를 열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시관이 필요하다. 수많은 궐내각사 건물들을 헐어 치워버렸음은 물론이다. 애초 ‘5보에 1루, 10보에 1각’이라는 말이 있듯 크고 작은 전각들로 빼곡했던 경복궁이지만 조선물산공진회 때 정전인 근정전과 편전, 침전, 경회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 즉 356동의 건물들이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18개 동의 진열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동쪽 건춘문에서 서쪽 영추문 사이에는 횡단도로가 뚫렸고, 치장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옮겨온 석탑과 부도 등이 잔디밭과 분수대에 놓여졌다. 대부분의 석탑과 부도는 2005년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 갔지만,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직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되었다 돌아온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만은 최근까지도 경복궁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억불숭유' 조선의 궁 안에 불교 유물이 들어오게 된 엉뚱한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전시방식을 보면, 나무로 된 창고 같은 건물에 르네상스식 치장을 덧붙인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물품들은 대부분 서구를 모방해 지은 건물에 집중 전시되었다. 반면 농기구나 어구, 원예품처럼 근대와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조선의 전근대적인 물품’들은 근정전 행각에 배치해 전시했다. 이런 행사에 총독부는 기차 운임의 30%, 증기선 운임의 60%를 할인해 주는 등 조선인들의 관람을 적극 유도하여, 경성박람회부터 1940년 조선대박람회까지 4번의 박람회에 오간 연인원만 약 373만여 명에 달한다. 그곳에서 조선인이 대면하는 것은 결국 근대 일본과 전근대 조선…. 조선총독부가 각종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공간인 근정전과 그 앞마당은 일제를 위한 각종 식장으로 이용되었다. 테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나 사이토 마코토 총독 등이 박람회 포상식을 하거나 훈시를 한 곳은 근정전 용상 자리에 마련된 단상 위였으며, 1921년부터 43년까지 민족해방운동가와 싸우다 죽은 일본 순사를 기리는 ‘순직경찰관초혼제’가 주로 치러진 곳도 바로 경복궁 근정전이었다.
일제의 조선 왕궁 파괴와 희화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선당과 세자시강원, 비현각 등이 잇는 동궁 일대를 밀어버린 곳에는 총독부박물관을 세웠고,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는 총독부미술관을 건립했다. 이때 헐린 건물 가운데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라는 일본인에게 팔려 도쿄로 팔려갔는데, ‘조선관’이라는 이름의 사설 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불에 타 석축만 남고 모두 타버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다면 우리는…
올해는 이 같은 역사 현장을 파괴한 장본인, 즉 일본에 대한 전민족적인 저항을 한 3.1운동 99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에 의해 파괴된 경복궁 재건 사업도 꾸준히 진행되는 등 뜻 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 2007년 우이동에서 정문이 ‘발견’되면서 몇 년 전에는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정문을 이전 복원하기도 했다. 차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깃발을 올린 셈이다.
일본으로 팔려갔다 간토대지진 때 소실된 이후 1995년 12월 한국으로 환수되어 돌아온 자선당 석축도 오랜 기간 일반 공개가 미뤄져 오다, 이제는 누구나 볼 수 있게끔 개방되기 시작했다. 비록 아픔을 간직한 부정적 기억의 역사유산일지라도 숨기고 가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널리 드러냄으로써 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앞으로 맞닥뜨릴 비슷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들을 해나가야 할 지, 후대에 교훈을 줄 수 있는 상징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다크 투어리즘, 즉 어두운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가는 여행이 늘어나는 모습은 자못 경이적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의 그것만이 아니라 지난 오랜 독재정권기의 폭압의 현장, 나아가 그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의 현장, 크게 보아 인권운동의 현장으로까지 시민들의 관심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