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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정선 : 주민들이 다시 세운 정선 함백역을 찾아

강원 정선 : 주민들이 다시 세운 정선 함백역을 찾아

"마냥 부숴 버리기만 하면 후손들이 어떻게 역사를 알겠어요?"
- '함백역' 복원운동에 앞장선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을 만나다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함백역 내에 마련된 마을역사자료관에는 철거 당시 나온 콘크리트 잔해와 기차표, 관련 사진자료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함백역 내에 마련된 마을역사자료관에는 철거 당시 나온 콘크리트 잔해와 기차표, 관련 사진자료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가족 중 누가 광산에 다닌다는 것은 바로 풍족을 뜻했다. 매달 초면 나오는 임금과 안남미일망정 허연 쌀을 타오는 배급날, 그 배급을 타기 위해 도장과 전표를 들고 선 얼굴의 여자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런 엄마가 해주는 쌀밥을 배불리 먹고 군것질까지 하는 애들을 이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것이 정신의 다툼이 됐든, 육체의 싸움이 됐든 마찬가지였다."

최용운은 자전적 소설 『그곳엔 까만 목련이 핀다』에서 강원도 함백에서의 어린 시절을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시절을 누리던 시절의 탄광 노동자는 일은 비록 고되고 위험했을지언정 대기업 직원보다 많은 월급에 자녀 학자금 등 두둑한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던 탓이다.


함백역은 한국 탄광산업의 시발역으로서, 1957년 3월 9일 열린 개통식에는 교통부장관과 상공부장관은 
물론 주한미국대사 및 주한자유중국대사까지 참여하는 등 국내외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사진은 준공식 당시의 다울링 주한미국대사.

심지어 지난 1957년 3월 9일 열린 함백역(咸白驛) 개통식에는 이종림 교통부장관과 김일환 상공부장관을 비롯해 월터 다울링 주한미국대사와 왕동위안 주한자유중국대사까지 참석하는 등 국내외의 관심을 받았다. 한국 철도역 가운데 30번째로 개통된 함백역은 그야말로 지난 경제개발시대 한국의 에너지 자급자족을 가리키는 '알파'요 '오메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함백역은 함백광업소에서 캐낸 무연탄을 대도시와 충주비료공장 등으로 수송하기 위한 시발점으로서, 산업철도 역사로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채굴이 한창일 때에는 하루 이용객이 5백 명을 넘었고 직원도 16명이나 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완공 5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갑자기 철거된 함백역
그러나 지금의 함백역은 그때의 함백역이 아니다. 열차도 승객들을 5km 못미처에 있는 예미역에나 떨어뜨려줄 뿐 함백역에는 서지도 않은 채 곧장 태백역을 향해 달려간다.

"1960~1970년대 탄광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지역의 정체성이 농축되어 있는 상징물이 바로 함백역이었어요. 그래서 2006년부터는 문화관광부와 강원도에서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을 가능하게 해준 광산업의 살아있는 현장'이라며, 이 마을을 근현대 역사마을로 만드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었고요. 거기다 2007년에는 완공 50주년 기념음악회도 열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마을의 상징을 부숴버렸으니…."

'철도합리화사업'이 이유였다. 함백역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석탄 수요가 줄면서 서서히 퇴락하다 1998년부터는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 지난 2006년 10월 31일 결국 기습 철거되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 지역사 연구에 전념해온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에게 있어 이 일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철거 현장을 목격했어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일단 철거를 잠시 멈춰달라고 하고 현장에 흩날리던 각종 일람표 등 서류들을 있는 대로 주워 담았어요. 다 모으니 라면 상자로 4개 정도가 되더군요. 건물이야 이미 부셔졌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역 안에 있던 자료들만이라도 구하고 싶었던 거죠. 그냥 보기에는 쓸모 없는 서류 뭉치 같지만, 실제로는 생활문화사적으로나 지역사 면에서, 그리고 교통사 연구에 매우 소중한 것들이거든요."

진 소장은 곧장 마을이장과 체육회장을 비롯한 마을사람들과 함께 '함백역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국가기록원과 철도청 등을 수시로 드나들며 함백역에 관련된 자료라면 있는 대로 긁어 모았다. 복원을 위한 모금운동에는 2천원 남짓한 용돈을 모아온 초등학생에서부터 추억의 단초가 사라져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전국의 옛 함백광업소 친목회원들까지 모두 2백여 명으로부터 3천여만 원이 답지해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물론 벽돌을 무상으로 지원하거나 전기공사를 자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변변한 설계도 한 장 남아 있는 것이 없어 함백역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영월군의 연하역(蓮下驛)을 실측해 모델로 삼았고, 전국 방방곡곡을 함백역의 그것과 비슷한 창틀과 기와를 찾아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복원한 함백역.

그렇게, 함백역은 철거 2년만인 지난 2008년 원래의 그 자리에 애초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섰다. 자칫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영영 사라져버렸을 뻔한 근현대 문화유산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복원된 것이다.

'사람들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상징물, 그것이 바로 문화재
"보통 문화재라고 하면 왕궁이나 사찰처럼 수백 년 된 목조건물을 떠올리지 함백역처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은 문화재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문화재라는 것이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의미가 녹아 있는 상징물이라고 생각할 때, 사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함백역이거든요. 이것이 없었다면 석탄 광산은 운영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이 마을이나 우리나라도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라고 해서 마냥 부숴 버리기만 하면 50년 100년 뒤의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탄광의 역사며 개발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겠어요?"


함백역 복원운동에 앞장선 진용선 정선아리안연구소장

그렇기 때문일까? 진 소장은 함백역 복원도 좋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육과 출판 사업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즉 함백역 안에 광산업의 역사를 소개하는 마을역사자료관을 꾸며 기차표와 탄부들의 월급명세서, 작업도구 등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해 놓고 있다. 함백역의 철거 전 모습과 복원 과정, 그리고 이후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 나왔고, 『함백역 복원지(復原誌)』도 발간되었다.


함백역 복원 준공식

이런 노력에 힘입어 철거될 처지에 놓여있던 전국 40여 개의 역들이 위기를 모면했고, 2008년에는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제1호 기록사랑마을'로 지정되어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한 중추로 발돋움하고 있는 함백역…. 정부나 지자체가 아니라 민간이 중심이 되어 근현대 문화유산을 복원해낸 첫 사례로서, 함백역은 반세기 전 석탄산업의 시발역에서 이제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운동을 위한 시발역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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